방을 나오자마자 데본시아는 황성으로 순간 이동 했다. 멀지 않은 거리를 굳이 마력을 소모해 가고 싶지는 않았으나, 상황이 급했다. 누군가 제 고유한 영역 안에 발을 들였다. 결계까지 무시하고서 진입한 걸 보면 상당한 실력자일 것이다.
그는 지하로 내려와 침입자가 있을 장소의 앞에 섰다. 그가 출입을 금해 둔 지하의 성역.
그 검은 문에는 숨겨져 있어야 할 봉인 도식이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도식은 군데군데 끊어지고 희미하게 꺼져 갔다. 강제로 파괴되어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봉인술이 부수어진 문이 힘없이 끼익 소리를 내며 덜그럭댔다. 데본시아는 흔들거리는 문을 손끝으로 밀었다. 고작 그 정도의 미는 힘에도 문은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헐거워진 경첩이 떨어지며, 쿵, 문이 바닥으로 넘어갔다.
풀썩, 재와 같은 먼지가 일어났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큰 키를 가진 침입자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침입자는 벽, 바닥, 천장을 빼곡히 채운 수십 개의 마법 도식을 첨예한 시선으로 도려내듯 살피고 있었다.
데본시아는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매끄러운 웃음으로 능숙하게 감췄다.
“약속도 없이 무슨 일이야, 렉스.”
벽을 보고 있던 렉시우스가 그의 목소리에 반응해 몸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능청스럽게 웃는 표정을 짓고서.
“너, 애리얼은 어쩌고?”
“아, 일부러 지금 온 거야? 내가 애리얼에게 정신을 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지. 근데 생각보다 정신을 잘 잡고 있어서 놀랐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렉시우스는 말꼬리를 늘이며 히죽 비웃음을 지었다. 그 서늘한 표정에 반응하여 데본시아의 눈에도 이채가 어렸다. 얼굴에 적대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본시아를 보며 렉시우스가 도발하듯 도식이 그려진 벽면을 짚었다.
“내 생각이 틀렸네.”
“틀리진 않았어. 그러니까 너보다 늦게 여기 왔지.”
데본시아는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미소를 유지했다. 그러나 렉시우스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았다. 렉시우스는 데본시아의 눈이 벽면을 짚은 제 손을 빠르게 훑고 지나간 것을 보았다.
중요한 사실을 눈치챈 렉시우스가 그에게 조용히 비수를 꽂았다.
“신성 극계 마법이지, 이거.”
신성 극계. 그 소리를 하자 데본시아의 안면이 일순 경직되었다. 금세 유연하게 웃어 보이긴 했으나, 렉시우스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진실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데브. 너, 무슨 짓거릴…….”
렉시우스의 말이 도중에 끊어졌다. 금색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눈앞에 보이던 데본시아의 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렉시우스는 본능적으로 제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데본시아의 왼쪽 손목이 잡혔다. 데본시아의 방어술이 발동되어,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렉시우스를 관통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데본시아의 왼 손목을 당겼다. 쩌저적, 방어술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데본시아의 왼손이 붙들려 나왔다. 다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렉시우스는 데본시아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데 실패했다.
데본시아는 자유로운 오른손을 움직여 렉시우스의 머리채를 쥐고 바닥으로 처박았다. 렉시우스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다 멈추었다. 아래로 떨구는 게 여의치 않자 데본시아는 그의 고개를 반대로 꺾었다. 힘이 아닌 마력을 사용해 렉시우스의 움직임을 강제했다. 그제야 렉시우스의 시야가 겨우 천장을 향했다. 턱이 들려 올라가고 목이 휘었다.
완벽한 살기를 감지한 렉시우스가 쥐고 있던 데본시아의 왼 손목을 마력과 완력을 섞은 힘으로 비틀었다. 데본시아의 왼손을 덮은 방어술이 깨어져 나가며, 우두둑, 뼈가 뒤틀려 부서졌다.
“윽…….”
데본시아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돌연 웃기 시작했다.
그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에 렉시우스가 욕을 짓씹으며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아파서 돌아 버렸나.”
그러나 데본시아는 계속 웃기만 했다. 프흐흐, 가소로워하는 듯 코웃음을 치다가 렉시우스의 머리채를 틀어쥔 채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왼손을 이렇게 손쉽게 부수다니, 놀랐잖아, 렉스. 전쟁 영웅이라더니 강하긴 강하네.”
미적지근한 숨결에 렉시우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불쾌함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을 짓는다. 그걸 감상하는 데본시아의 눈은 광기로 가득했다. 그 광기에는 인간성이 상실되어 있었다. 렉시우스는 전쟁의 참상과 비견되는 잔혹함을 데본시아의 눈빛에서 읽어 냈다.
데본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더 강해. 그렇지?”
아주 다정한 말투. 데본시아는 렉시우스의 뒤통수를 휘어잡은 채로 마력을 쏟아부었다. 렉시우스는 눈이 까뒤집힐 듯한 고통을 겪었다. 뇌가 타는 것 같았다. 전쟁으로 단련되지 않았다면 게거품을 물고 단박에 기절했을 것이다.
“이, 개새끼!”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던 렉시우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욕을 뱉어 냈다.
데본시아는 해사하게 웃었다.
“화났구나?”
“나한테, 이딴 짓거릴……. 빌어먹을 놈!”
렉시우스는 꺽꺽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면서도 분노를 담아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나가면, 이제, 네놈에게 줄, 크레시앙의 비호는, 없…… 어.”
“그러지 말고 잊어버려, 렉스. 그러면 우린 아직 같은 편이야.”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 음성은 저주였다. 강도 높은 마력에 렉시우스는 제 머릿속의 한구석이 까맣게 소각되는 느낌을 맛봤다. 코피가 터져 흘렀다. 고통이 의식을 잠식하고 들어왔다.
여태껏 겪어 본 적 없는 강대한 마력의 위력이었다.
“……데본시아!”
악을 쓰듯 그를 부르다 정신이 끊겼다. 제국 유일의 신성 마법사. 그 강함에 결국 꺾여 버리고 만 제국의 영웅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데본시아가 휘청이며 벽을 짚었다. 생각보다 힘을 많이 썼다. 렉시우스의 그악스러운 악력에 분쇄 골절이 난 왼 손목이 끔찍하게 아팠다. 하지만 지금은 골절을 수습할 수 없었다.
데본시아는 벽을 짚었던 멀쩡한 오른손을 움직여 쓰러진 렉시우스의 옷깃을 잡아 들었다. 기절한 렉시우스의 고개가 무방비하게 아래로 늘어졌다.
렉시우스는 아직 적대할 수 없었다. 남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그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데본시아는 렉시우스의 기억 조정에 들어갔다. 다소 우악스러운 방식이었으나, 어차피 렉시우스는 기억하지 못할 테니 괜찮을 것이다.
그 상태로 데본시아는 렉시우스를 붙잡고 순간 이동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기숙사가 아닌 대공저의 빈방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렉시우스를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예상에 없던 장거리 이동이라 머리가 어질거렸다. 근처 소파를 찾아 앉은 그는 느리게 호흡을 골랐다.
렉시우스를 기숙사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렉시우스에게서 이틀분의 기억을 지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본시아는 렉시우스의 이틀 전 소재지인 대공저로 왔다. 보좌관을 통해 그의 동향을 미리 파악해 둬서 다행이었다.
어질거렸던 머리가 조금 진정되자 데본시아는 바로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자, 바닥에 무너져 있던 렉시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커윽, 컥, 막힌 기침을 뱉어 내자 핏방울이 멎지 않은 코피와 함께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웅덩이처럼 고인 핏물에는 타 버린 피막이 섞여 있었다. 입천장에 새겨 놓았던 세뇌 방지 도식이 다 타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망할 새끼…….”
렉시우스는 남은 점막 껍질을 퉤 뱉어 내며 욕을 짓씹었다. 적군이나 혹시 모를 첩자에 대비하려고 새겨 뒀던 전쟁용 방어술이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이야.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직도 그는 데본시아가 제게 세뇌와 기억 조작을 건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뇌에 불을 지른 듯 쓰라린 두통이 현실을 알렸다. 이를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까스로 지워지지 않고 남은 기억을 더듬었다. 완전히 방어하진 못했는지 이틀간의 일이 군데군데 끊어진 채 잔상처럼 떠올랐다.
조작된 애리얼의 검사지. 그 주모자인 데본시아. 그의 행적. 지하로의 통로. 출입 금지된 장소…….
안타깝게도 중요한 부분에서 기억이 끊겼다. 그는 황성 지하의 그 방이 어디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장면만은 명확했다.
좁지 않은 방을 가득 채우던 신성 극계 마법의 도식.
렉시우스는 극계 마법 도식을 연구하다가 영구 제명 당한 한 마법사를 알았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만났던 인물이었다. 무하 공작가의 수석 마법사인 클라우스 백작. 애리얼의 사촌.
물론 클라우스 백작과 데본시아가 동업자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뒤를 파 본 결과, 둘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다만 꺼림칙한 점은, 둘 다 애리얼의 주변인이라는 거였다.
그나마 클라우스 백작은 뛰어난 마법사일지언정 신성 마법사는 아니고, 그쪽에서 손을 턴 지도 오래였다. 만약 그녀가 위협 요소로 변한다 한들 렉시우스가 제압할 수 있었다.
문제는 데본시아.
대공자인 그로선 정치적으로도 무력적으로도 황태자인 데본시아를 제압하기가 어렵다.
그 사실을 아주 잘 아는 렉시우스는 신중했다. 무턱대고 데본시아를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 데본시아의 행동을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섣부른 행동을 취했다간 오늘과 같은 일이 반복되기만 할 뿐. 세뇌당한 척 아군을 연기하며 진득하게 붙어 그 의도를 파악하는 게 먼저다.
‘그 방에 있던 게 정확히 어떤 건지 알아야 해.’
렉시우스는 군데군데 끊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정보의 파편을 다시 떠올렸다.
사방에 빼곡하던 문양과 문자. 그 어떤 마법과 비견해도 차원이 다르게 복잡한 도식. 데본시아가 한 짓임이 확실한 신성 마법의 도식.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미 뭔가를 했거나, 혹은 할 예정이거나. 뭐가 되었든 애리얼과 연관되어 있다.
***
데본시아는 황성이 아닌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기숙사 방의 욕실로 왔다.
예기치 않게 많은 마력을 써서 지독하게 어지러웠다. 별장에서처럼 세면대를 붙잡고 먹은 것을 게워 냈다. 위액까지 뱉어 내고 나자 구역질은 멎었으나 열이 확 올랐다. 그 와중에 골절된 왼쪽 손목이 욱신거렸다.
마법을 쓰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마법을 쓰면 마력이 날뛰는 게 문제였다.
그는 그나마 움직이는 오른손으로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었다. 지금은 왼손을 치료할 기력이 없었다. 시녀를 부르는 것도 귀찮았다.
데본시아는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손으로 대충 닦아 내고서 세면대에 기댔다.
“몇 달만 더…….”
그가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푹 고개를 숙여 몇 번 긴 호흡을 뱉었다. 고통으로 인해 예민해진 감각에 날이 섰다. 그런 와중에 욕실 문밖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데본시아는 기울어졌던 몸을 바로 세웠다. 치료하지 못한 왼팔을 축 늘어트린 채 욕실을 나왔다.
방 안에는 그가 바라던 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황태자 전하, 오셨어요?”
이브닝드레스를 걸친 아나스타샤가 치맛자락을 쥐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최대한 귀엽고 사랑스럽게. 그러면 데본시아는 늘 미려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묵묵부답인 데본시아를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싸늘했다. 심지어는 인상까지 쓰고 있었다. 불쾌한 것이라도 마주한 듯.
아나스타샤는 기에 눌려 주춤거리다 울상을 지었다.
“저, 전하…….”
“내가 널 불렀었나?”
“아…… 아뇨. 하지만, 그래도…… 소녀는 수업이 없는 동안 황태자 전하가 그리워서…….”
“애리얼은? 여기 있었을 텐데.”
“네? 애리얼이요?”
“네가 내보냈어?”
데본시아가 조곤조곤 물었다. 그의 음성과 표정은 무감정한 동시에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살벌했다.
거짓말은 꿈도 꾸지 못하게 하는 위압감이 아나스타샤를 짓눌렀다.
“애리얼이 전하의 방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전하의 방으로 왔습니다. 약혼녀로서 소명을 다하기 위해 대신 제가 있겠다고…… 애리얼을 내보냈어요.”
그녀가 더듬거리며 진실을 말하자, 데본시아의 얼굴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애리얼과의 시간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사람을 물려 둔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스카이라, 렉시우스를 신경 쓰느라 아나스타샤의 존재는 고려도 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귀신같이 소식을 전해 듣고 하루 일찍 기숙사를 찾아올 줄이야.
그건 방심이라기보단 지나친 무심함에서 비롯된 거였다.
데본시아는 아나스타샤를 귀찮아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할애할 시간이 아까웠다.
“나가.”
그에게서 짧고 냉랭한 명령이 떨어졌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그녀는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때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의 심기를 무시할 만큼 담이 좋지도 못했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얼른 걸음을 옮겨 방을 나갔다.
3층에서 내려와 제 방으로 향하던 아나스타샤는 무심코 몸을 돌렸다. 복도의 반대편, 애리얼의 방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잠들어 있을 애리얼을 떠올렸다.
아나스타샤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다가 조용히 웅얼거렸다.
“애리얼 허클리.”
몹시도 강한 질투와 적의가 비틀린 선망으로 자리했다. 아나스타샤는 애리얼의 겉가죽을 벗겨 뒤집어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