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돌아온 애리얼은 예상외의 상황에 맞닥뜨렸다.
함께 오지 못한 카논 대신 방을 정리해 주던 시녀가 애리얼의 검은색 교복을 모두 회수해 간 것이다. 남은 교복은 가슴께에 금실 자수가 놓인 흰색 교복뿐.
당황한 애리얼이 항의했으나 시녀는 단호했다.
“앞으로는 백색 교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검은색을 선호해.”
“그래도 백색을 착용하셔야 합니다. 황태자 전하의 명입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인물이 시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학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가해지는 압박에 애리얼은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편입 추천인이 데본시아로 바뀌었단 게 확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애리얼의 고립을 원하는 데본시아는 그녀의 교복마저 제한했다. 흰색을 입으면 실수로라도 접근할 이들이 확 줄어들 테니까. 학생들이 알아서 그녀를 피할 테니까.
애리얼은 한숨이 나왔다.
참으로 피곤한 사고였다. 애리얼이 검은색 옷을 입는 게 단순히 친구를 가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여기는 모양인지.
‘난 그냥 눈에 띄기 싫어서 검은색을 입는 건데.’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런다고 명이 거둬질 것도 아니고. 애리얼은 말을 줄였다.
시녀는 정리를 마치고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갔다. 깍듯한 대우였으나 편하진 않았다.
애리얼은 카논이 보고 싶었다.
늦은 밤 겨우 기숙사에 당도한 카논을 봤을 때, 애리얼은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카논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애리얼의 어리광을 잠자코 받아 주었다.
***
후학기가 시작되었다. 이전 학기와 마찬가지로 일주일은 시간표를 짜는 적응 기간이었다. 다만 후학기였기에 첫 학기처럼 한 달의 적응 기간이 주어지진 않았다.
애리얼은 빠르게 실습으로만 시간표를 구성했다. 꺼리던 ‘마력전’과 ‘마공전’에 ‘공격술의 실전’이라는 과목까지 총 세 개의 수업이었다. 평소처럼 공략에만 집중할 거였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구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략에만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기숙사 개인실에서 점심을 먹은 애리얼은 조금 이르게 교육실로 향했다. 흰 교복을 입은 탓에 주변 시선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나마 차로 이동한 덕에 시선을 받는 시간은 짧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건물로 잽싸게 들어갔다.
실습수업이 몰려 있는 아카데미 12관. 그 앞의 거대한 원형 실습장이 웅장한 자태를 과시하며 솟아 있었다. 애리얼은 좋지 않은 기억이 깃든 실습장을 창문 너머로 한 번 훑고는 제2 교육실로 향했다. 월요일 오후 두 시 수업인 공격술의 실전이 진행되는 장소였다.
이제 겨우 한 시를 넘은 시각이라 교육실은 비어 있었다. 애리얼은 세 번째 줄 벽면 자리를 골라 앉았다.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자 무심코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망 위험, 페널티.
조금만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머릿속에 곧장 떠오르는 단어였다. 그것 때문에 애리얼은 어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겨우 잠이 들어서도 악몽을 꿨다.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대비할 수 있게 1회 알림이 있다지만, 전혀 안심되지 않았다. 알림과 동시에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실습 위주로 시간표를 짰다.
다소 가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실습을 세 개나 채운 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다칠 확률이 높은 수업이니만큼 페널티가 찾아올 확률도 높다. 하지만 그만큼 실습수업은 위험 대비가 철저하며 의료진이 상시 대기해 있었다. 애리얼은 이러한 실습수업을 통해 유사 상황에서의 대처를 연습하며 적응하고 대비할 계획이었다.
물론 이게 제대로 된 대비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상황이 닥쳤을 때 당황하는 건 줄여 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비어 있던 옆자리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빠듯한 존재감에 애리얼은 고개를 돌렸다.
렉시우스가 웃지도 않고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놀라우면서 놀랍지 않은 등장이었다. 애리얼은 태연한 태도로 물었다.
“선배, 이거 들어?”
“아니. 그냥 너 찾으러 왔어.”
“어떻게 알고? 설마 감시…….”
“감시는 무슨 감시야. 그런 거 안 붙여도 네 행동반경쯤은 뻔한데.”
“…….”
“아직도 공격술 쓰는 거 포기 못 했냐? 기어코 이걸 듣네.”
“응. 기어코 들어. 그건 그렇고, 선배는 왜 날 찾았는데?”
“지켜 주려고.”
애리얼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온종일 붙어서 지켜 준다고 하는 거야.”
그는 웃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답했다.
“……진심으로?”
“어. 오늘부터 그러려고.”
애리얼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렉시우스가 갑작스럽게 진중해지면 대개 거짓이었다. 그는 대충 무심히 굴 때가 오히려 진심이었다. 그러니 지금 하는 말도 진심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어떻게?’
애리얼은 기함해 벌려진 입을 움직여 물었다.
“진짜 계속 같이 다닐 거야?”
“그래 달라며.”
“근데 그게 가능해? 선배 일정은?”
“그것부터 묻는 거 보니까, 내심 지켜 주길 원했나 보다?”
“……아니라곤 못 하겠다.”
애리얼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데본시아와 달리 렉시우스는 나름대로 믿을 만한 면이 있었고, 실제로 도움도 많이 받았다. 페널티 때문에 방어술을 연습하다 막혔을 때도 애리얼은 그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런 그가 지켜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페널티는 지금도 유효하게 발동되고 있을 터.
아픈 건 싫고, 죽는 건 더 싫고, 데본시아는 꺼림칙하고, 스카이라는 도움을 요청할 상황이 아니며, 레이신은 말 한번 붙이기도 어렵다. 위험 상황에서 도와 달라며 손을 내민다면 렉시우스가 최선이었다. 그가 있다면 어지간한 위험 상황은 꽤 안정적으로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선배가 해 주겠다는 걸 굳이 거절할 만큼의 여유는 없어. 거절해도 강요할 기세기도 하고. 아무튼…….’
다만 그것과 별개로 개인적인 대처 능력을 키워 두긴 해야 했다. 그러니 이 시기에 받는 렉시우스의 비호는 애리얼이 성장할 시간을 벌 기회이기도 했다.
“고마워.”
애리얼은 짧지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렉시우스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으나 굳이 말로써 꺼내진 않았다. 그는 애리얼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웬일로 흰 거 입었네.”
“황태자 전하의 명이라서…….”
“아, 그래. 그놈이.”
렉시우스는 괜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황태자. 그 명칭을 듣자 속에 불을 지른 듯 홧홧하고 짜증이 났다. 미간을 구기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실소가 터졌다. 얼추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고작 옷 하나에 기분이 나빠지는 자신이 웃겼다.
극적인 표정 변화를 보이며 낮게 웃는 그를 애리얼이 의아하게 보았다. 왜 저럴까.
렉시우스는 의구심을 품은 그녀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제 생각에 몰두하기도 바빴다. 사념에 잠긴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묵직한 기운을 담고 내리깔렸다.
데본시아는 이번 학기부터 애리얼의 편입 추천인이 되었다. 스카이라의 자리를 뺏은 것이다. 스카이라가 뭐 때문에 고분고분 물러났는지 짐작은 갔다. 데본시아가 애리얼을 빌미로 잡고 협박하다시피 했겠지.
렉시우스는 제국의 황태자라는 놈의 행동거지에 혀가 내둘렸다. 왜 이렇게까지 할까. 그 의도를 파악하려면 애리얼의 곁에서 행동을 함께해야 했다.
데본시아가 벌이는 일은 대부분 애리얼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므로 애리얼의 옆에 붙어 있으면 데본시아의 동향을 파악하기에 최적이었다.
더불어 개인적인 사심을 채우기에도 아주 좋았다.
그는 손을 올려 슬그머니 올라간 입꼬리를 능숙하게 가렸다.
***
데본시아는 어둠 속에서 열을 앓았다. 부서진 뼈를 아직 붙이지 못했다. 어젯밤 렉시우스가 건드리고 부순 방을 복구하느라 마력을 크게 소모한 탓이었다.
다행히 도식은 온전해졌고, 방어술과 봉인술도 전보다 훨씬 견고해졌다.
이제 떨어진 마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두껍게 커튼을 친 방 안, 침대 위에서 그는 뒤척이는 것을 반복했다. 식은땀에 침구가 젖어 들었다. 열띤 호흡과 낮은 신음이 교차했다.
고통이 심했으나 그는 의사나 마법사를 부르지 않았다. 이 정도로 다친 몸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아무리 함구시킨다 한들 황태자인 그가 상해를 입은 것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을 터. 적어도 황제의 귀에는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조사에 들어갈 것이고, 그가 벌인 짓이 일부 꼬리를 잡힐 수 있었다.
그래서 데본시아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침실에 칩거했다. 최대한 타인과 마주하는 걸 피해야 했다.
고통에 점철된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가끔 미카엘이나 시에나가 찾아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들의 충성과 충직은 믿을 만한 것이었으나 그는 제 측근에게도 침실로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픈 황태자는 지독히도 예민하여 그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다.
다만 한 명은 예외였다.
매끄러운 긴 흑발을 드리우고 말간 얼굴에 검은 눈동자를 처연하게 내리깐, 열일곱의 소녀. 오늘 그의 요구로 하얀 교복을 입고 아카데미를 걸었을 그녀. 열에 혼탁했던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다.
아, 만나고 싶다. 선명한 욕구가 기어올랐다.
“으윽…….”
끙끙 앓는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었다. 그는 모로 누운 채 오른손으로 시트를 그러쥐었다.
당장 애리얼의 기숙사 방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만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이동을 할 정도의 마력이 모였을 때는 부디 제정신이길 바랐다.
그녀를 부수고 싶지 않았다.
***
일주일의 적응 기간이 지나고 시간표가 확정되었다.
애리얼은 처음 정했던 시간표를 그대로 유지해 제출했다. 렉시우스의 시간표도 그녀와 같았다.
일주일간 렉시우스는 줄곧 애리얼을 따라다녔다. 온종일 붙어서 지켜 주겠다는 말을 정말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지킬 셈인지. 그는 애리얼이 기숙사 방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곤 늘 그녀와 함께했다.
일어나서 이동하는 것부터, 수업이며 식사에 공부와 휴식까지. 애리얼이 하는 모든 일에 모조리 렉시우스가 따라다녔다.
심지어 애리얼의 마력전 대련 파트너도 그였다.
그녀가 쏘아 낸 마력탄을 손쉽게 무마시킨 렉시우스가 궁금한 듯 물었다.
“너 생각보다 안 질려 한다?”
“오늘이 첫 실습인데 벌써 질리면 안 되지.”
“수업 말고, 나 말이야.”
난데없는 질문에 애리얼은 마력탄을 날리다 다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첫 두 발은 제대로 그를 향해 쏘았으나 마지막 한 발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렉시우스는 비껴 나간 마력탄까지 가볍게 처리했다.
“반응 한번 알기 쉽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약혼 제안까지 들은 주제에, 내가 뭐 대단한 거 물었다고 그래?”
“선배!”
애리얼이 다급히 소리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반응에 렉시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결계 쳐서 못 듣는다니까.”
“그래도 신경 쓰여.”
“그런 거 다 신경 쓰면 나랑 어떻게 다니려고.”
“대화할 때만 조심하면……. 몇몇 개는 금지어로 정하자. 예를 들면 약혼.”
“그럼 약혼 말고 결혼할래?”
“결혼도 금지할게.”
“좋아해.”
“…….”
“이것도 금지할래?”
그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