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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04)화 (104/264)

애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금지를 말하는 순간, 그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오만 가지 난처한 단어들을 모조리 듣게 될 터였다.

그녀는 그냥 말없이 손을 겨누고서 그를 조준했다. 그대로 마력탄을 쐈다.

렉시우스는 웃는 낯으로 날아온 마력탄을 모조리 무력화했다.

***

“반했어.”

식사의 도중, 렉시우스가 여상하게 고백을 던졌다.

덕분에 애리얼은 먹던 것을 뱉어 낼 뻔했다. 황급히 입을 가리고서 음식물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선배…….”

“이것도 금지?”

그가 산뜻하게 빙긋 웃었다. 몹시 얄미운 얼굴이었다.

렉시우스는 최근 저돌적이고 노골적으로 굴었다. 온갖 말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예삿일이고, 툭하면 애리얼의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그녀가 넌더리를 내면 그는 더 집요해졌다. 그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애리얼은 대꾸하지 않고 식사를 대충 마무리했다. 페널티며 공략 탓에 확실하게 거절할 수 없는 건 상당한 고충이었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렉시우스가 따라 일어났다. 그녀는 졸졸 따라다니는 그의 모습이 마치 잘 훈련된 대형견 같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침 식당 홀을 나서려는데 열린 문에서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스카이라.

최근 코빼기도 안 보이던 그가 청록색 정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일에 시달린 듯 음영이 짙은 얼굴이었다.

애리얼은 걸음을 멈추었다. 하필이면 정면으로 눈이 맞았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대충 인사를 건네려는데 헬레나가 떠올랐다. 이름을 부르려던 목소리가 급격히 말려들어 갔다.

애리얼이 멈칫한 사이 스카이라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애리얼을 지나쳤다. 그가 홀의 중앙으로 들어서자 시녀가 마중 나와 서류철 같은 걸 건넸다.

“이게 끝이야?”

“네, 기숙사로 온 건 이게 전부입니다.”

“다음부턴 아카데미 일이라도 황성으로 보내.”

“네, 주의하겠습니다, 저하.”

“스카이라.”

대화가 마무리되려는 찰나, 렉시우스가 그를 불렀다. 새파란 눈이 렉시우스를 향해 돌아갔다.

스카이라와 시선이 마주치자 렉시우스는 입꼬리를 당겼다. 애리얼의 곁에 친근하게 붙어 선 채 과시하는 듯한 웃음으로 스카이라를 도발했다.

“오랜만인데 인사도 안 해 줘?”

“원래도 정답게 인사하는 사이는 아닌 거로 아는데.”

“나는 넘긴다 쳐도 애리얼한테는 해 줘야지. 안 그래?”

“시간 아깝게 뭐 하러.”

스카이라는 차갑게 답했다. 인상도 쓰지 않았다. 굳이 감정을 소모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는 서류철을 쥔 채 빠르게 홀을 빠져나갔다. 쌩하니 지나치는 걸음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애리얼은 혼이라도 난 사람처럼 시무룩해졌다. 그가 너무 냉랭해서 서운하기까지 했다. 이제 끊어진 관계라 이건가. 휴대폰 속 그의 호감도 창에는 하트 세 개가 자리한 걸 뻔히 아는데. 일부러 저러는 걸 아는데도 주눅이 들 정도로 스카이라는 냉담했다.

평소와 다르게 기숙사 홀에서 식사한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렉시우스는 다소 풀 죽은 애리얼을 살피다 그녀의 어깨를 감아 당겼다.

“신경 쓰지 마.”

렉시우스의 목소리가 나직이 귀를 울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애리얼은 살짝 주눅 들었던 표정을 담담히 굳혔다.

‘스카이라의 호감도는 이미 목표 수치를 채웠어. 렉시우스도 마찬가지고, 데본시아는 불안할 정도로 넘치는 수준이고.’

남은 건 레이신뿐이다.

***

이 주일이 지났다.

애리얼의 일상은 꽤 평안했다. 도발 같은 렉시우스의 고백에 나름대로 면역이 생겼고, 종종 마주치는 스카이라의 무시에도 조금씩 적응해 갔다.

레이신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애리얼은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한 달 후에 아카데미 건립 기념제가 열린다. 같은 기숙사끼리 모이는 건립 기념제의 참가자 명단에는 그의 이름도 있었다. 만날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확실한 기회가 생기자 초조해져 있던 애리얼도 조금 여유를 찾았다. 공격술도 나름대로 잘 익혀 가고 있었고, 몇 개는 실전에서도 무리 없을 정도로 수준을 갖췄다. 휴대폰이 진동하는 일도 없었다.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점이라면, 데본시아. 개학 전날부터 애리얼을 찾았던 그는 웬일인지 벌써 삼 주째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오후 여섯 시, 자습을 마치고 도서관을 나오며 애리얼은 잠시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이내 거두었다.

‘스카이라도 바쁜 거 같고, 데본시아도 그렇겠지.’

그쪽에서 굳이 나타나 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렉시우스도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고, 오랜만에 혼자가 된 애리얼은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 시간 잠잠한 휴대폰 덕에 페널티에 대한 경계도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켜며 느긋한 걸음으로 자신의 기숙사 방에 들어섰다.

커튼이 쳐진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저녁 준비로 카논이 부재하는 바람에 인기척도 없었다.

애리얼은 전등을 켜기 위해 벽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때, 돌연 문이 닫혔다. 주변이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했다.

애리얼은 닫힌 문 쪽을 황급히 돌아보았다. 바람이 불었을 리도 없는데, 왜. 선뜩한 의문이 머리를 스친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감아 왔다. 끌려 들어간 등 뒤로 단단한 몸이 맞닿았다. 높은 체온이 느껴졌다.

“애리얼.”

거칠게 갈라진 음성. 더운 숨결이 뒷덜미를 오싹하게 훑고 지나갔다.

애리얼은 헛숨을 들이켜며 떨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황태자 전하?”

“응. 보고 싶었어.”

우아함이라곤 없는,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가 평소와 다른 상태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계속 아파서, 여태 올 수가 없었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 목에 닿는 뜨거운 호흡이 애리얼의 공포를 부추겼다.

그가 애리얼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등에다 가슴팍을 맞대고서 뒤에서부터 꽉 끌어안았다.

애리얼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헉, 숨이 막혔다. 으스러질 듯 강한 압박감이 그녀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전하, 잠시만 놓고…….”

“지금도 아파.”

결박당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데본시아가 칭얼거리듯 말했다.

“원래는 더 쉬어야 하는데, 그런데, 네가 렉스랑 너무 친하게 지내서…….”

“다…… 알고 계셨어요?”

“응.”

그가 애리얼의 손을 끌어가더니 고개를 푹 숙여서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렉시우스가 매번 입 맞추던 손이었다. 묵직하게 눌리는 감촉에 애리얼은 경직되었다. 그는 렉시우스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달아오른 입술을 진하게 문지르다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조금 남았어.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나니까…… 기다려 줘. 애리얼.”

꽉 잠긴 목에서 쇳소리로 내는 부탁…… 아니, 애원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녀의 방에 나타나 강제로 붙잡고 있는 주제에. 이토록 애처롭게.

애리얼은 시한폭탄을 안고 있어 달라는 요구를 들은 사람처럼 표정을 굳혔다. 데본시아는 왜 이런 소릴 하는 걸까. 그에게 붙잡힌 채 입만 움직여 물었다.

“뭘 기다려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데본시아는 대답 대신 애리얼을 단단히 끌어안고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팔이 올가미와 같이 그녀의 몸을 엮었다.

“사랑해.”

그가 동문서답으로 고백했다.

끓는 듯한 음성에 애리얼은 오한이 들었다.

그의 고백은 렉시우스가 장난스럽게 던지던 언행과는 전혀 달랐다.

늪처럼 질척하고 음습한 감정의 수렁. 발을 들이는 순간 빠져 헤어 나올 길이 없는 지독한 함정의 기운. 삐죽삐죽 튀어나온 덫의 아가리가 발목을 물어 챌 준비를 하며 끼이익 벌어지는 환청이 들렸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사랑은 그토록 위협적이었다.

벗어나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애리얼은 강렬한 거부감을 느끼고서 그를 뿌리쳤다. 팔꿈치로 그의 가슴팍을 가격하기까지 했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데본시아는 애리얼을 놓치고서 휘청이며 물러났다. 가까스로 테이블을 짚으며 쓰러지는 걸 막은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둠 속에 비치는 그의 윤곽이 괴물처럼 다가왔다.

애리얼은 그를 피해 문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황태자 전하……. 전하는 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건가요? 대체 저의 뭘 알고…… 뭐 때문에 이러시는 거예요?”

“글쎄.”

“……전하!”

그녀가 다그치듯 소리쳤다.

어둠 속에서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말해 주면 도망칠 거잖아.”

“네? 그게 무슨…… 무슨 소리예요?”

“나중에 말해 줄게.”

“나중에, 언제요?”

“네가 도망칠 수 없을 때.”

데본시아가 짐승의 울음처럼 거친 소리를 냈다. 선명한 위협으로 들렸다. 경고처럼 다가왔다.

우아하기만 하던 황태자가 거대한 맹수처럼 느껴졌다.

제국 누구도 보지 못했을 그의 이면이었다.

그녀 역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애리얼은 그런 그에게서 강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미친 듯이 다급해졌다. 근래 조금 느슨해졌던 초조함이 노도와 같이 그녀를 삼켰다.

그가 뻣뻣하게 굳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왔다. 아까처럼 그녀를 다시 품에 가두려는 듯이 한 발짝.

위협을 느낀 애리얼이 기겁하며 물러난 때였다.

똑똑똑.

“아가씨.”

너무나 반갑게 들리는 노크와 카논의 목소리.

그것이 방어술이라도 된 듯 데본시아의 손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그가 순간 이동으로 증발했다.

애리얼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복도의 빛이 새어 들어와 방 안을 밝혔다. 환하게 윤곽이 드러난 자리에 데본시아는 더 이상 없었다. 아닌 밤중의 악몽처럼 흔적도 없이.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자 힘이 쭉 빠졌다. 애리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카논이 놀란 얼굴로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귀신이라도 보신 얼굴이신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야……. 괜찮아.”

애리얼은 대충 얼버무리며 애써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은 전혀 괜찮지 못했다.

“조금 남았어.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나니까…… 기다려 줘. 애리얼.”

데본시아의 거칠었던 목소리가 연거푸 뇌리를 울렸다.

시간이 없다.

1년 차, 첫 생일에 무조건 특별 엔딩을 달성하고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위기감에 휩싸인 애리얼은 다급해져서 오로지 그것만 연거푸 되뇌었다.

***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교사 동 - 별관』

레이신의 위치가 아는 장소로 바뀌자마자 애리얼은 기숙사를 나섰다. 며칠간 밤을 지새우며 계속 화면을 들여다본 끝에 겨우 얻은 정보였다. 부족한 수면은 낮잠으로 충당해 가며 지냈다. 그 탓에 렉시우스의 의심을 약간 받긴 했지만, 들키진 않았다.

애리얼은 그만큼 레이신과의 접점이 간절했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 놓인 시각. 대부분의 사람이 아직 잠들어 있는 가장 고요한 순간을 틈타 그녀는 기숙사를 나섰다. 마침 렉시우스도 황성에 있는 덕에 움직이기가 한결 수월했다.

별관에 도착했을 때는 검었던 하늘 끝이 푸른색으로 조금씩 밝아 왔다.

애리얼은 별관 문 앞에서 왼 손목의 브레이슬릿을 매만졌다.

‘아리앨라는 이게 강력한 방어술의 일환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별관의 결계에도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미리 챙겨 놓은 별관 열쇠로 잠긴 문을 열었다. 오래된 경첩이 끼익, 소리를 내며 길을 터 줬다. 애리얼은 그 안으로 진입했다.

퀴퀴한 별관의 안쪽. 애리얼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높다란 나선 계단과 어두운 천장. 그걸 응시해도 기절할 것 같지 않았다. 전과는 다르게 정신이 명료했다. 아무래도 브레이슬릿의 방어 효과는 확실한 모양이다.

‘데본시아의 덕택에 레이신을 만날 기회가 생기다니, 웃기지도 않네.’

픽, 실소를 터트린 애리얼이 계단을 밟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긴장이 느슨해진 순간 경종이 울렸다. 고압적인 음성이 애리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순간, 계단 위에서 레이신이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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