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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06)화 (106/264)

며칠 전의 만남이 없었던 일인 양, 그는 그렇게 말했다.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진위는 알 수 없었으나, 애리얼도 굳이 그때의 일을 들추고 싶진 않았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애리얼은 인사를 올리며 눈앞의 데본시아를 조용히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기괴하게 번뜩이는 안광과 광기로 물든 얼굴, 짐승의 울음처럼 갈라지는 목소리를 한 채 그녀를 끌어안았던 며칠 전의 그가 신기루였던 듯. 정상이 아니었던 그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평소의 그다.

데본시아가 손짓하며 애리얼을 불렀다.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애리얼은 차분한 얼굴로 다가가 백합 브로치를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라면 언제든지.”

살갑게 웃은 그가 곧게 펴진 애리얼의 손을 감싸 구부렸다. 손바닥으로 말려든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브로치를 쥐었다.

“그리고 이건 안 돌려줘도 돼. 돌아갈 때 필요할 거야.”

애리얼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내민 손을 거뒀다. 데본시아가 준 것이라 찝찝하긴 해도 거절할 순 없었다. 렉시우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이 브로치가 필요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래. 저자세는 그만두고 옆에 앉을래?”

애리얼은 브로치를 챙겨 넣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같은 소파를 공유하는 것이 조금 신경 쓰였으나 달리 앉을 데가 없었다. 그 탓에 시선이 아주 가깝게 마주쳤다. 데본시아의 오드 아이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애리얼은 애써 그를 피하지 않은 채 최대한 침착하려 했다.

“무슨 용건이 있어서 왔을까?”

그가 물었다. 애리얼은 잠깐 망설이다가 주 용건을 말하지 못하고 미뤘다. 다짜고짜 마도구를 빌려 달라는 건 너무 염치가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서 전하를 통 뵙지 못해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왔습니다.”

“내 걱정이라니, 나쁘지 않은 거짓말이네.”

그는 다 안다는 눈치로 애리얼의 양심을 찔러 댔다.

허울 좋은 거짓말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애리얼은 고개를 숙이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실은 전하께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일인데?”

데본시아가 슬쩍 얼굴을 기울이며 물었다. 뭐든지 다 들어줄 것 같은 목소리가 분에 넘치게 상냥했다.

“마도구를 하나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거?”

“근원 소멸기라는 것을 빌리고 싶어요.”

데본시아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테이블에 올려진 호출 벨을 눌렀다.

이윽고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는 애리얼에게도 익숙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미카엘 제라온. 황태자의 보좌관.

“근원 소멸기를 가져와.”

“근원 소멸기…… 맞습니까?”

한 번 더 확인하는 제라온의 음성에는 믿을 수 없다는 어리둥절함이 배어 있었다.

데본시아는 무심한 얼굴로 긍정했다.

“응. 지금 바로 가져와.”

“알겠습니다.”

문밖에 있던 인기척이 멀어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갖고 들어와.”

데본시아가 명령했다. 문이 열리고 제라온이 들어왔다.

제라온은 검은 천에 감싼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들고 있었다. 길쭉하고 가느다란 물건으로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애리얼은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졌다.

제라온은 천에 감싼 물건을 얼른 데본시아에게 건넸다. 들고 있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반면 데본시아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그걸 들었다.

“수고했다.”

“네.”

물건을 넘기자마자 제라온이 방을 떠났다.

데본시아는 넘겨받은 것을 그대로 애리얼에게 내밀었다.

“자, 원하던 거.”

애리얼은 검은 천으로 감싼 그것을 얼떨떨하게 받아서 들었다. 천 너머로 서느런 감촉이 느껴졌다. 가늘고, 금속으로 된 물건인 것 같았다. 싸한 기운이 손을 타고 몸으로 흘렀다. 예사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레이신이 원했던 물건이다.

“가, 감사합니다.”

“응.”

“언제쯤 돌려드리면 될까요?”

“다 쓰고 필요 없어지면 그때 돌려줘. 그냥 가져도 되고.”

“네? 그럴 수는……. 용무가 끝나면 바로 돌려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래. 더 필요한 건 없어?”

“아뇨! 충분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여야 할지…….”

“네가 보답 같은 걸 말하면 괜찮다고 하려고 했는데, 막상 들으니까 요구하고 싶어지네.”

그가 마도구를 든 애리얼의 손끝을 톡 건드렸다. 가벼운 접촉에도 애리얼은 어깨를 움츠렸다. 나른하게 내리깔린 그의 눈동자가 묘하게 번뜩였다.

“어디까지 해 줄 수 있어?”

“어디까지라니…….”

“내가 좀 욕심이 많거든.”

내리깔렸던 눈동자는 이제 똑바로 애리얼을 향하며 다가왔다. 서서히 이채에 물드는 오드 아이가 오싹했다. 전에도 느꼈던 감각이 그녀에게 위험 신호를 보냈다.

거친 목소리, 올가미같이 질겼던 팔심, 의미심장한 말들, 그리고…… 고백.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애리얼은 몸을 떨었다. 힘이 풀린 손에서 마도구가 스르르 미끄러졌다. 귀한 마도구가 바닥으로 추락하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데본시아의 손이 떨어지려는 근원 소멸기를 붙들었다. 검은 천에 감싼 그대로 다시 애리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장난이야. 그냥 줄게.”

다시 마주한 그의 얼굴에선 오싹한 광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생긋 웃는 얼굴은 친절하기만 했다.

애리얼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용건은 이걸로 끝?”

“네. 귀한 시간을 뺏어서 죄송했습니다.”

그러고는 뒷걸음질을 쳐서 도망치듯 침실을 나왔다.

데본시아는 멀어지는 애리얼을 가만히 뒀다. 그 태도에는 지배자가 취할 수 있는 오만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허락도 없이 떠나는 그녀를 너른 마음으로 포용하며 웃었다.

“아직 안 잡아먹는데, 겁이 많네.”

***

애리얼의 손에서 백합 브로치가 하얗게 빛을 발했다. 금세 시야가 전환되고, 그녀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역시…….”

애리얼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데본시아가 준 브로치의 마력은 브레이슬릿이 튕겨 내지 않았다. 고로 애리얼에게는 데본시아의 마력만 통한다.

그 오싹한 진실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서 이것도…… 쉽게 빌려준 건가?”

애리얼은 떨리는 팔로 고이 모셔 온 마도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검은 천에 싸인 것이 드라이아이스처럼 기이한 냉기를 뿜어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저주처럼 강력한 마력의 기운이었다.

마도구에 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그녀도 한눈에 알 수 있는, 굉장한 물건.

이런 것을 너무나 쉽게 얻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애리얼의 창백해진 손끝이 백합 브로치를 근원 소멸기 옆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브로치도 그냥 만든 것이 아니다. 애리얼을 위해서, 애리얼을 노리고 만든 것이다. 모양이 백합인 것도 애리얼이 그에게 건넸던 꽃이 백합이기 때문이리라.

데본시아가 행하는 충격적일 정도로 특별한 대우에 몸서리가 쳐졌다.

이런 어마어마한 것들을 만들고 다루는 그가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이 무서웠다.

“조금 남았어.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나니까…… 기다려 줘. 애리얼.”

뭐가 조금 남았다는 거였을까.

두려움을 느낀 애리얼은 한시라도 빠르게 레이신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안 된다. 렉시우스의 시선을 피하려면 새벽은 되어야 했다.

그녀의 두 눈이 이제 겨우 오후에 접어들기 시작한 창밖의 하늘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

아카데미의 새벽은 무척 고요하다. 대부분의 수업이 열 시 이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리 나와 준비하는 사람도 적었다. 특히나 교사 동 별관 쪽은 더 그랬다. 수업도 없는 외딴 장소.

애리얼은 그래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별관 문을 열었다. 휴대폰으로 확인한 레이신의 위치는 최상층이었다. 그녀는 검은 천에 싸인 근원 소멸기를 고이 들고서 계단을 올랐다. 낡은 나무 문의 앞에서 노크를 하려는데 꽉 잠긴 음성이 들려왔다.

“열려 있다.”

레이신이었다.

애리얼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끼이, 오래된 경첩이 굽어지는 소리가 사나웠다.

매트리스에 앉은 레이신이 옷을 주워 걸치며 애리얼을 맞았다.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던 구릿빛의 상체가 하얀 와이셔츠에 감추어졌다.

문가에 선 애리얼이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말씀하셨던 걸 가져왔습니다.”

끼익, 덜커덕.

대답에 앞서 소음이 울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레이신이 애리얼의 뒤로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밖으로 유출될 수 있으니까, 문단속부터 하고 말해.”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그의 저음이 바로 귓가에서 울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어요.”

얼굴이 스칠 듯한 거리감에 애리얼이 예민하게 몸을 움츠리자, 그가 멀리 떨어졌다. 배려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그녀의 반응 자체를 귀찮아하는 데 가까웠다.

그는 문만 닫고서 다시 매트리스에 주저앉았다.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그의 근처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레이신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애리얼은 곧바로 근원 소멸기를 건넸다.

레이신은 곧장 검은 천을 걷어 냈다. 은빛의 몸체가 드러나며 서늘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거대한 바늘처럼 생긴 날카로운 은색의 검날. 근원 소멸기였다.

그는 손잡이도 없는 그 물건을 맨손으로 집어 들었다. 이리저리 돌려 보며 확인한 뒤 벗겨 냈던 검은 천 위에 다시 검날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매트리스와 벽면 사이 틈에 끼워 둔 빳빳한 카드를 꺼내 애리얼에게 내밀었다. 녹색 바탕에 은회색의 순록이 그려진 가운데 솔렘이라는 명칭이 검은색으로 적혀 있었다.

애리얼이 카드를 조심히 받아 들고서 물었다.

“이게 솔렘의 증표인가요?”

“그래.”

“연회는 언제…….”

“솔렘의 연회는 12월 1일이다. 증표는 솔렘 공작령의 북문으로 와서 문지기에게 보여 주면 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봐.”

“네…….”

참으로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거래였다.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로 용건만 확실히 하는 그를 향해 애리얼은 묵례를 남기고 나왔다.

‘저렇게나 여지가 없는 사람이라니.’

애리얼은 레이신의 태도에 약간 주눅이 들었다. 그는 친밀하게 파고들 구석이 없었다. 더군다나 애리얼이 그런 언행에 능숙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공략을 생각하니 탄식만 나왔다.

만약 시험을 통과해 솔렘의 비호를 받는다고 해도, 그와 친해지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단기간에 그의 호감도를 올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그나마 첫 번째 분기 보상으로 받았던 ‘호감도 피버 타임’이 있으니, 그 효과를 기대해 보는 수밖에.

‘결국 특별 엔딩을 위한 제일 큰 문제는 레이신이야.’

그렇게 그녀가 레이신만 주요하게 생각하며 별관을 나선 순간, 잠시 잊었던 인물이 그녀의 앞에 장애물로 나타났다.

“어딜 가나 했더니.”

묵직한 목소리가 찬 공기를 뒤흔들었다.

새벽의 어둠에 동화되어 소리도 없이 나타난 장신의 윤곽에 애리얼은 그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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