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07)화 (107/264)

렉시우스는 물러나는 애리얼을 무섭게 쫓아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우리 공녀님께서 왜 여기까지 행차하셨을까? 안 좋은 기억도 있을 텐데, 응?”

“볼일이 있었어. 선배한테 말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 알리고 온 거야.”

애리얼은 붙잡힌 팔을 빼내려고 애쓰며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나 그는 팔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말에 수긍할 생각도 없었다.

“이 밤중에, 여기에 볼일이 있었다……. 하필 남자 혼자 있는 곳에.”

“…….”

“나만 이상하게 생각되는 거 아니지?”

의심과 분노에 찬 그의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폭발 직전의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빨리 변명 안 하면 너무 화날 것 같은데, 말 좀 해 봐.”

그가 채근했으나 애리얼은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를 납득시킬 변명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애리얼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렉시우스의 인내가 점점 얕아졌다.

그는 애리얼을 제 앞으로 당겨 와 그녀의 턱을 쥐었다. 강한 악력에 애리얼은 그와 억지로 눈을 맞추게 되었다. 치뜬 눈이며 일그러진 눈썹, 비틀린 입꼬리가 만들어 낸 표정이 아주 사나웠다.

“나 지금 기회 주는 거야. 변명이든 해명이든 하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애리얼은 아직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이 시간에 레이신 혼자 있는 공간에 찾아온 것은 너무 이상하니까.

애리얼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얼굴은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가만있으니까 자꾸 좆같은 상상만 들잖아.”

렉시우스가 임계에 달한 듯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네가 계속 입을 다물면 레이한테 직접 물어야 하는데, 지금 감정이면 걜 죽도록 패 버릴 수도 있을 것 같거든? 근데 그러면 안 되잖아?”

그가 으르렁거리다 타이르듯 말했다. 애리얼이 아닌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것 같았다. 질투에 미친 그는 친우를 상해할 수 있는 지경에 와 있었다. 아슬아슬했던 위험도가 임계에 달했다.

애리얼은 변명을 생각하기를 그만두고서 냅다 외쳤다.

“가문의 일이야!”

“가문……. 뭐?”

“이 이상은 나도 더 못 말해 줘. 선배가 믿지 못해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 없었어. 이건 확언할 수 있어.”

아예 거짓을 말한 건 아니지만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그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선배…….”

“아무리 들어도 진심 같지는 않은데, 거짓말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확 믿어 버리고 싶은데, 의심은 가고.”

정말이지 소름 끼치는 눈치였다. 그는 애리얼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렉시우스를 속여 먹기란 불가능했다. 눈썰미로 따지면 데본시아와 아주 용호상박이었다.

그래도 렉시우스는 데본시아만큼 꺼림칙한 인간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에게는 도움도 많이 받았고, 또 현재 그녀를 걱정해 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현재까지 위험 상황이 닥치지 않고 안전한 것은 그의 덕이 클 것이다.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통제적이라 갑갑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애리얼은 제 턱을 쥔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믿어 줘, 선배. 선배가 의심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

“믿어 줘.”

한 번 더 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 노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천천히 애리얼의 턱을 놓고, 제 손목을 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쓸어 잡았다. 보드라운 그녀의 손을 제 입술로 끌어갔다. 늘 하던 것보다 조금 진하게, 손등에 입을 맞췄다. 두 눈은 애리얼을 향한 채, 그녀의 살결에 입술을 문질렀다.

차가운 피부에 더운 입술이 마찰했다. 지그시 오래.

그가 더운 기를 품고서 애리얼을 보다가 서서히 눈을 감았다. 손등에 하는 키스인데도 야릇하게 느껴졌다.

입술을 맞추고 싶은 걸 손등에다 푸는 느낌이었다.

애리얼은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진한 접촉이 생소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억지로 손을 잡아 빼려 했으나 그에게 잡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렉시우스는 만족할 때까지 입술을 누른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번만 봐줄게.”

평소와 같은 음성. 나긋하게 미소 짓는 그의 뒤로 아침이 밝아 왔다.

***

11월에 있을 아카데미 건립 기념제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기념제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저마다 파트너를 구하느라 난리였다. 그 과정에서 여기저기 소문이 터지고, 고백까지 오갔다. 바야흐로 설렘으로 들뜨는 시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애리얼은 기념제로 흐르는 설렘의 기류에 타지 못했다. 기념제 후에 있을 솔렘의 연회를 대비하느라 바빴다. 솔렘의 증표를 가지게 되었으니, 솔렘의 시험을 무조건 통과해야 했다.

“죽을 수도 있는 시험이라고 했지?”

“네. 솔렘 공작저로 가는 길목에 마수를 풀어놓는다고 해요. 사망자가 나오는 것도 그 이유가 크겠죠.”

카논은 설명과 함께 솔렘의 시험에 관한 서류를 전했다. 백작가에서 따로 조사해 준 것으로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었다.

서류를 훑은 애리얼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

솔렘의 시험은 참가자가 많은 만큼 꾸준히 사망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솔렘의 초대를 받지 못한 자들이 매년 시험에 몰려들었다. 솔렘이 시험의 통과자들에게 정기적인 후원을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증표를 쥐고 임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목숨을 내걸어도 솔렘은 제 가문의 증표를 쉽게 베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증표가 가진 강력한 보증 때문이었다.

증표가 없는 이들은 시험을 통과했더라도 매년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후원이 끊겼다. 반면 솔렘의 증표를 가진 이들은 시험을 한 번만 통과하면 솔렘의 영구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난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셈이야.’

애리얼은 레이신이 준 증표를 보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시험 내용은 매년 조금씩 다르다. 공통점은 마수가 나온다는 것.

마수는 솔렘에서 마력을 기반으로 사육한 육식 생명체였다. 마법으로만 무력화가 가능한데,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통하지 않았다.

‘시험에 통과하려면 마수를 무력화할 수준의 공격술을 장착해야 하는데…….’

애리얼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렉시우스는 여전히 그녀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공격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녀가 무리할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사흘에 하나꼴로 공격술을 가르쳤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동계 방학은 12월 5일부터이니, 12월 1일에 있는 솔렘의 연회는 후학기에 걸쳐 있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솔렘의 시험에서 페널티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렉스 선배더러 보호해 달라고 할 수도 없어.’

그러니 반드시, 애리얼은 마수를 처치할 수준의 공격술을 익혀야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애리얼은 카논을 통해 아리앨라에게 극비로 연락을 넣었다. 렉시우스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공격술을 익히기 위함이었다.

휴대폰을 미끼로 걸었더니, 아리앨라는 과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제 중요한 건 그녀와 어디서 과외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렉시우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애리얼과 함께 보냈다. 수업 시간표도 같고 지내는 곳도 같으니 그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유일하게 그와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녀가 개인 기숙사 방에 머무를 때였다.

그래서 애리얼은 아리앨라를 제 기숙사 방으로 불렀다.

아카데미 기숙사의 경비는 삼엄하고, 아카데미의 결계는 첨예하고 두껍다. 그럼에도 아리앨라는 모든 장애물을 통과하여 애리얼의 기숙사 방에 나타났다. 아카데미 수석이었다가 신성 마법에 손을 대 영구 제명을 당한 화려한 이력답게 능숙한 솜씨였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아리앨라는 애리얼의 기숙사 방에 방음 결계를 치고서 애리얼이 미끼로 건 휴대폰을 한 시간이나 들여다보았다. 보다 못한 애리얼이 휴대폰을 강제로 회수해가자 겨우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활보다는 역시 총이죠.”

아리앨라는 단박에 말했다. 애리얼이 쓰기에 어떤 공격술이 위력적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애리얼은 스스로 방어술을 쓸 수 없으니까 근접전보다는 저격술 쪽이 어울려요. 총알의 소모성 때문에 총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지만, 애리얼의 마력량이면 거의 무한 탄창을 가졌다 해도 무리가 없을 테고요. 하지만 애리얼은 근력이 많이 떨어지니까…… 시위를 당겨야 하는 활 보다는 방아쇠만 누르면 되는 총이 나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총을 쏴 본 적이 없는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총은 매개이고 섬세한 조작이 필요한 건 오히려 마력 쪽이라 마력의 숙련도가 더 중요해요. 마도구로 개조한 총이라 쏘는 것도 훨씬 수월하실 거고요. 배우기도 쉬워요.”

“그런 거라면 좋을 것도 같고……. 솔깃하네요.”

“그렇죠?”

“그런데 마도구로 개조된 총은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 아카데미 마공전에서도 다루지 않는 도구라 체험할 길도 없어서……. 무기상에서 파는 건가요? 아니면 마도구 상점?”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시험 삼아 만들어 둔 게 있는데, 그걸 드릴게요.”

그녀의 흔쾌한 제안에 애리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그래도 괜찮은가요?”

“당연하죠. 저도 무보수로 일하는 건 아닌걸요? 대금은 허클리 백작님께 어느 정도 받고 있고, 개인적인 호기심도 충족할 겸이니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고마워요, 아리앨라.”

“고마운 건 제가 고맙죠! 그 희고 기묘한 마도구,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리앨라가 휴대폰을 언급하며 눈을 빛냈다.

애리얼은 흔쾌히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오셨을 때 또 보여 드릴게요.”

“정말이죠? 얼른 와야겠네요!”

아리앨라는 그 말을 남기고서 방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작별인 줄 알고 애리얼이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아리앨라가 다시 나타났다. 직사각형 모양의 검은색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서.

“애리얼, 부탁한 총을 가져왔어요!”

그녀는 해맑게 말하며 테이블에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애리얼은 침대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다가갔다. 커다란 케이스를 열자 아리앨라가 말했던 예의 그 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색의 저격 총. 아니, 좀 더 특이하게 생겼다. 지나치게 긴 총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지고 다니면 이 기다란 총신이 바닥에 끌릴 것 같았다.

“이걸 들고 다니면서 쏠 수 있어요?”

“길이나 크기는 마력으로 조절이 가능해요. 원거리 저격에 가장 적격인 무기지만 빠르게 난사하는 것도 가능하답니다. 마법의 힘이죠!”

아리앨라는 직접 총을 꺼내 설명했다.

“여기 보시면 작게 다이얼을 달아 놨어요. 요걸로 용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 크기나 모양도 변형시킬 수 있고요. 그리고 또…….”

총의 기능을 꼼꼼히 설명해 주는 아리앨라의 두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제 걸작을 선보이는 듯한 말투였다.

그럴수록 애리얼은 이걸 잘 다룰 자신이 없어 불안해졌다. 이러다 애꿎은 마도구만 부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좋은 걸 제가 받아도 될까요?”

“그럼요! 이 애도 좋은 주인을 만나 기쁠 거예요.”

“좋은 주인이라기엔 제가 아직 많이 미숙해서…….”

애리얼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그러자 아리앨라가 애리얼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반드시 어울리는 주인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