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맞춰 스텝을 밟고,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턴을 마쳤다. 마무리 자세까지 완벽했다.
렉시우스의 능수능란함에 대공비는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일평생 전쟁터만 전전하고 사교계에서는 발 한번 굴러 본 적 없는 아들이 사교춤을 이토록 잘 소화해 낼 줄이야.
“역시 대공자는 전장 따위보다는 연회 홀에 서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대공비가 진심을 다해 칭찬하자 렉시우스는 수려한 미소로 화답했다.
“춤을 빠르게 배우는 것도 전장의 검무에 익숙해져서 그런 겁니다.”
“초 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파트너로 그를 상대해 주던 대공비가 뾰로통한 얼굴로 그의 손을 놓았다.
“그나저나 웬일로 춤 연습을 다 하나요? 설마하니 건립 기념제에 참가하는 건 아닐 테고…….”
“맞습니다.”
“역시 그럴 줄……. 뭐라고 했습니까?”
“기념제에 참가하는 게 맞는다고 했습니다.”
재차 인정하는 그의 모습에 대공비가 기함을 했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봅니다. 대공자가 기념제엘 다 가다니요.”
“그럼 안 됩니까?”
“아뇨. 단지 너무 의외라……. 혹시 그때 그 아가씨랑 파트너로 갑니까?”
“이미 알고 계시면서 굳이 물으십니까.”
“렉시우스, 너 정말 진심에 진심인 거구나!”
대공비가 호들갑을 떨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너스레에 부끄러워진 렉시우스는 인상을 쓴 채 방을 나가 버렸다. 뒤에서 대공비가 웃으며 불렀으나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놀리는 기색이 완연했기에 일부러 무시했다.
그런 그의 앞을 우레우스가 막아섰다.
렉시우스는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길을 차지한 동생을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너냐?”
“혀, 형. 오랜만에 왔네! 아카데미는 안 힘들었어?”
“이 새끼가 징그럽게 왜 이래?”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면박을 주자 우레우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더니 대번에 삿대질을 해 댄다.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그럼 좋은 것도 아닌 짓을 왜 하고 있는데.”
“그건…….”
말끝을 흐린 우레우스가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모기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로 물었다.
“형, 그때 걔…… 언제 다시 와?”
‘걔’라는 건 누가 들어도 애리얼을 뜻하는 거였다.
렉시우스는 답 대신 우레우스의 이마에 딱밤을 놨다. 딱, 호두 깨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 미친! 아파 뒤지겠네. 저 새낀 손가락에 쇳덩어리라도 박았나!”
“아가리 곱게 놀려. 넘볼 사람 넘보고.”
그는 제 동생을 향해 날 선 경고를 날려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걸 두고 볼 우레우스가 아니었다.
“야! 기다려! 물은 거 답은 해 주고 꺼지란 말이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청이 시끄럽게 울렸다.
정말이지 피곤하다.
렉시우스는 열린 창문으로 훌쩍 뛰어내려 후원에 착지했다. 그제야 그를 쫓는 소음이 옅어졌다.
혈연이라 봐줬더니 자꾸만 기어오르는 저 동생 놈을 한번 손봐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느새 목적지였던 푸른빛의 둥근 거울 앞에 다다랐다. 개학 전에 거금을 들여 뚫어 놓은 아카데미행 워프 터널이었다.
애리얼과 붙어 다니기 위해 마련한 터널은 그 값을 톡톡히 했다. 덕분에 대공자로서의 업무와 아카데미의 생활을 둘 다 놓치지 않고 수행할 수 있었다.
‘지금 가면 걔는 또 방에만 있으려나?’
터널의 앞에 선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 애리얼은 계속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는지, 수업 시간 외에는 도통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렉시우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것만 같아서 불쾌했다.
짐작 가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걸 추궁했다간 그녀와 사이가 나빠질까 봐 걱정되어서 말을 아꼈다. 기념제까지는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으니까.
그는 침음하며 워프 터널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애리얼을 떠올리자 또 속이 갑갑했다.
최근 렉시우스의 기분은 굉장히 들쭉날쭉했다. 애리얼과 함께하기만 해도 들뜨는데, 그녀의 언행 한 번에 기분을 잡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그녀의 미소 한 방에 응어리가 풀렸다. 기념제에서 그녀와 파트너가 될 기대감에 잠을 못 이루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맹목적인 제 감정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러다 기념제는 완전히 잊은 듯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그녀를 보면 들뜨던 기분이 다시 바닥으로 처박혔다.
제 세상의 중심이 온통 그녀가 된 것 같았다.
그는 그런데 그녀는 아니었다.
그게 몹시 불쾌하고 짜증 났다.
그녀와 길게 생활하면 생활할수록 눈치채기 싫어도 자꾸만 보였다.
도대체 뭘 그렇게 꾸미고 있는지, 데본시아는 잠잠한데 오히려 애리얼 쪽이 문제였다. 그의 눈을 피해 오만 가지 일을 다 벌이는 것 같았다. 레이신과 만나는가 싶더니, 황성에도 출입을 했고, 이젠 아예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는다.
“가만있으면 알아서 지켜 줄 건데, 왜 자꾸 혼자 일을 벌여.”
저를 의지해 주지 않는 그녀가 미워 원망을 토해 냈다.
이런 치졸한 감정이 드는 게 쪽팔렸다. 그런 와중에 초연한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짜증이 재발했다.
‘지가 뭔데 그렇게 무심해?’
괜한 억하심정을 느끼며 그는 쭈그렸던 다리를 폈다. 그새 잠깐 안 봤다고 애리얼이 보고 싶어졌다. 온종일 애리얼만 생각한다. 정말 중증이었다.
***
그 시각, 애리얼은 아리앨라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은빛의 총구에서 검푸른 마력탄이 쏘아졌다.
방어술을 두른 아리앨라가 애리얼의 마력탄을 받아 냈다. 마력탄이 직격하자 그녀의 구두가 바닥을 긁으며 살짝 뒤로 밀렸다. 공격술과 방어술이 충돌하며 요란한 소음이 울렸다.
콰앙!
결계를 쳐 두어서 밖으로 새어 나갈 걱정은 없었지만, 방 안은 꽤 시끄러웠다.
파지지직, 파직. 검푸른 마력의 잔상이 흘렀다. 애리얼은 결계와 방어술에 막혀 금세 사라지는 마력의 잔상을 잠시 좇았다.
파랗던 마력탄은 연습을 거듭할수록 점점 어두운 색으로 변해 갔다. 순도가 높아진 마력이 사용자 고유의 빛을 띠게 되는 현상이었다. 애리얼의 공격술이 어느 정도 이상의 파괴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마력의 색이 점점 진해질수록 마력탄을 받아 내는 아리앨라의 고충도 커졌다. 결계와 방어술을 이중 삼중으로 치며 심혈을 기울이느라 그녀는 쉽게 지쳤다. 최근에는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쉬어 주지 않으면 몸이 버티질 못했다. 그러나 강대한 마력의 성장을 보는 데 심취한 아리앨라는 제 몸을 돌보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녀의 손이 벌벌 떨리는 걸 포착한 애리얼이 먼저 총을 내려놓았다.
“잠시만 쉬었다가…… 점심 먹고 다시 해요.”
“네? 왜죠?”
아리앨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였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윽고 활짝 웃는 얼굴로 속행을 말했다.
“전 괜찮아요, 애리얼! 조금만 더 하면 제 겉면 방어술을 완전히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력의 진화 과정을 제 몸으로 생생히 받아 내고 싶…….”
“그, 뭐라도 먹고 해요! 간단하게라도 뭔가 먹지 않으면 효율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애리얼은 다급히 아리앨라의 말을 끊어 내고 휴식 시간을 마련했다. 이쯤에서 제지하지 않으면 아리앨라는 정말 쓰러지다 못해 애리얼의 마력탄에 제 몸이 관통당할 때까지 수업을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하면 고지가…….”
“그럼 아래층에서 뭐라도 챙겨 올게요!”
애리얼은 울상을 짓는 아리앨라에게 냅다 통보하고서 방을 뛰쳐나갔다. 이럴 때는 아예 자리를 피해 버려서 수업을 강제 중단 시키는 게 나았다. 아리앨라는 몰라도 애리얼은 그녀를 기어코 관통시켜 맞히고 싶지 않았다.
‘선배가 나한테 왜 그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아리앨라의 집요함을 떠올리며 애리얼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광적인 보랏빛 눈을 볼 때면 시한폭탄을 보는 것 같았다. 혹은 지치는 것도 모르고 이리저리 마구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래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닌데, 선배는 확실히 과보호 기질이 커.’
애리얼은 아리앨라와 자신을 비교하다가 딱 선을 그었다. 페널티나 공략 때문에 마력을 연마해야 하는 이 상황이 아니었다면, 애리얼은 코피를 쏟을 때까지 마법을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터덜거리는 걸음이 1층 휴게실에 도달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휴게실에는 햇살처럼 환한 색의 금발을 가진 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보는 옆모습이 무척 유려했다. 최근에 그녀만 보면 무시를 일삼는 스카이라였다.
‘되게 오랜만에 본다.’
애리얼은 홀린 듯 그를 주시했다. 끊긴 인연처럼 멀어진 그가 어쩐지 아련하게도 보였다.
책을 향해 눈을 내리깔던 스카이라가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긴 손가락에 얽혀 금발이 밀려난 자리에 흰 이마가 드러났다. 그가 나른한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쓸어 넘긴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흘러내렸다.
그는 한 폭의 그림같이 느릿하고 우아했다.
그러나 그의 눈이 애리얼을 포착했을 때, 우아함 따위는 사라졌다. 시선을 느끼며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린 그가 푼수처럼 양 볼과 귓바퀴를 붉히더니 고개를 홱 돌린다. 그렇게 얼굴을 감춘 채 쓸어 넘겼던 앞머리를 황급히 당겨 빗었다.
끊긴 인연이 아니라는 듯, 그는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왜 여기 있어.”
아주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어서 애리얼은 웃었다.
“먹을 걸 좀 가지러 왔어.”
“시녀를 시키면 되잖아. 뭐 하러 네가 직접 나와.”
원래라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아리앨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도망 나온 거라 상황이 달랐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산책 겸 직접 나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시간이 남아도나 보네.”
그가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본인도 휴게실에 죽치고 앉아 책을 읽던 주제에 말이다.
애리얼은 장난스레 반박하려다 말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쓰러질 듯 연약해 보이던 헬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만나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저하.”
애리얼이 머리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그러고는 뒷걸음질로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스카이라의 얼굴이 뒤늦게 일그러졌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책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고개를 젖혔다. 깨물린 입술 사이로 불만에 찬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선을 긋고 떠나 버린 애리얼을 따라가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먼저 선을 그은 게 제 쪽임에도 불구하고, 저를 피해 떠나 버린 애리얼에게 서운하고 화가 났다.
‘렉시우스랑 붙어 다니는 꼴을 언제까지 손 놓고 봐야 해?’
종종 보았던 둘의 정다운 모습을 떠올리자 열화가 뻗쳐 속이 뒤집혔다.
애리얼을 데려온 건 자신이었다. 그녀의 추천인을 자처하며 아카데미에 입학시킨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렉시우스, 그놈이 뭔데 그녀의 곁에 붙어 있는가.
그는 렉시우스가 거슬리고 화가 나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애리얼을 따라가 따질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허탈해졌다.
무시하기로 했으면서, 그렇게 멀어져서 데본시아의 관심이 끊기도록 하자고 마음먹었으면서. 이런 찰나의 만남을 바라 없는 시간 쪼개 가며 여기에 있던 자신이, 너무나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