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건립 기념제까지 이틀이 남은 날이었다.
렉시우스와 나란히 앉아 마력 서적을 들여다보던 애리얼의 앞으로 아나스타샤가 다가왔다. 하얀 교복을 입은 그녀는 애리얼이 저와 마찬가지로 흰 교복을 입은 걸 보며 웃었다.
“애리얼은 역시 백색 교복도 잘 어울리네.”
살가운 칭찬에 애리얼이 고개를 들었다. 렉시우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치자 애리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녀 서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자주 보면 더 좋을 텐데. 아쉬워.”
“자주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력까지는 필요 없고……. 그보다 기념제가 코앞이잖니. 준비는 어때?”
“준비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가요?”
“드레스며 액세서리로 이어지는 치장과 사교춤을 비롯한 행동거지의 준비! 설마 그 당연한 걸 아직도 준비 못 한 건 아니지?”
아나스타샤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반짝이는 두 눈이 애리얼을 위아래로 훑었다. 또 그때처럼 인형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싶었다.
애리얼은 적당히 둘러대야 편하겠구나 싶었다.
“구색을 갖출 정도로는 준비를 마쳤습니다.”
“고작 구색을 갖출 정도라니? 그럼 안 되지! 황태자 전하의 이름을 등에 진 편입생답게 우아하고, 황태자 전하의 총애를 받는 측근답게 아름다…….”
탁.
책 덮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렉시우스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아나스타샤를 노려보았다.
“말이 길다?”
그는 불쾌함을 표하며 경고하듯 내뱉었다. 그러나 웬일로 아나스타샤는 물러나지 않고 눈을 치떴다.
“대공자 저하, 너무 조용하셔서 계신 줄도 몰랐네요.”
“눈깔이 사시인가?”
“말씀이 좀…….”
“네가 말을 못 가리는데 내가 가려서 말해야 할 이유는?”
“제가 무슨 무례를 저질렀다고 이러시나요? 따지고 보면 대공자 저하께서 먼저 황태자 전하께 무례를 저지르신 것이 아닌가요?”
“궤변을 지껄이네.”
“지껄이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뇨? 저하야말로 그렇잖아요!”
“내가 뭘?”
“애리얼이랑 이렇게 가까이 계시는 거, 황태자 전하께 실례라고요. 애리얼이 이제 황태자 전하의 사람이라 대공자께서도 친히 지내고 싶어 하시는 걸 이해는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붙어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요. 추문이라도 일면 어쩌시려고 이래요?”
“너야말로 조만간 버려지게 생겼는데 이쪽엔 신경 끄고 네 앞가림이나 하지?”
“뭐라고요!”
아나스타샤가 창백해진 얼굴로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 앉아 있던 새들이 놀라 날아갈 정도였다.
빠르게 말을 주고받는 둘 사이에 감히 낄 수 없었던 애리얼은 선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사실 끼지 않는 게 현명한 판단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가 허옇게 질린 낯을 하다가 순식간에 핏대를 세우며 발악했다.
“어떻게! 어떻게, 같은 황태자 전하의 아래 있으면서 그딴 망발을! 저는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고, 미래의 황태자비가 될 인물이라고요! 빨리 사과해요, 대공자!”
“일개 공녀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대공자라고 짤막하게 불러 대.”
“저는 미래의 황태자비……!”
“그래서? 지금 황태자비냐고.”
그가 낮게 목소리를 깔며 눈을 번뜩였다. 전장을 누비던 살벌한 기세의 눈빛이 아나스타샤를 관통했다. 그제야 아나스타샤의 입이 다물렸다.
렉시우스는 불쾌함이 짙어진 얼굴로 애리얼을 팔을 붙잡아 끌었다.
“가자, 애리얼.”
“아, 네. 만나 뵈어 기뻤습니다, 서하.”
그에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애리얼은 아나스타샤를 향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게 법도였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서도 제국의 신분 위계는 철저했다. 그랬기에 아나스타샤가 방금 존칭도 없이 렉시우스를 지칭한 건 무척 무례한 행동이었다. 상대의 허락 없이는 동계급끼리도 존칭을 생략해서는 안 됐다. 최소한 ‘님’이라는 기본 존칭이라도 달고서 불러야 했다. 그런데 하물며 더 위에 있는 계급을 함부로 부르다니.
‘그래도 선배는 그런 데 관대한 편인 줄 알았는데.’
애리얼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서슴없이 말을 놓으라던 그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는 호칭이나 말투에 야박한 편은 아닐 것이다. 동생인 우레우스의 언행을 봐주는 것만 해도 그렇다.
다만 아까는 아나스타샤가 그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의 반응이 날카로웠던 것이리라.
‘어쨌든 지금은 그 일로 예민한 듯하니까 나도 말을 조심하는 게 좋겠지?’
벌써 후원의 경계까지 끌려간 애리얼이 가쁜 호흡으로 그를 불렀다.
“대공자 저하, 너무 멀리 온 거 같아요. 잠깐만 멈춰서…….”
그녀의 팔을 쥔 채 앞장서던 렉시우스의 걸음이 뚝 멈췄다. 고개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애리얼이 기민하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대공자 저하? 괜찮으세요?”
“뭐 해? 반말 안 하고.”
“그래도 돼요?”
“전부터 된다고 했잖아.”
“하지만 아까 저하께서 호칭 때문에 노하신 걸 보아서, 저도 말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결론이 그래? 내가 아까 샤펠 공녀한테 화낸 건……. 아무튼 넌 반말해.”
“알았어, 렉스.”
애리얼은 선뜻 말을 놓으며 그를 애칭으로 불렀다. 장난기가 물씬 풍기는 음성이었다.
그는 순간 허를 찔린 듯 멍한 표정을 하다가 픽 웃었다. 홍조까지 실린 얼굴이 짓는 미소가 꽤 천진했다.
“이게, 아주 날 가지고 놀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첫 만남에서 비슷한 대사를 했던 것 같은데, 그때와는 영 딴판인 분위기였다.
처음 만났던 난폭하고 막무가내로 굴던 렉시우스가 아닌, 하트 세 개의 애리얼을 아끼는 렉시우스.
그를 바라보며 애리얼은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공략이…… 게임이…… 여기까지 왔구나.’
떠나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이…… 종종 그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
저녁 식사도 끝나고, 별이 총총한 시각.
애리얼은 기숙사 방에 앉아 안전핀을 끼운 총을 홀로 들어 보았다. 어떤 자세가 더 편할지 연구하며 이리저리 다이얼을 돌려 형태를 바꾸기도 했다.
아리앨라는 무하 공작가에 본업을 보러 가서 기념제가 끝난 후에나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잠깐의 휴식과 함께 기념제를 즐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근데 그럴 수 있을 리가…….”
어휴, 한숨을 쉰 애리얼은 총을 도로 케이스에 넣고서 창가에 걸터앉았다. 열린 창으로 미풍이 불었다. 겨울에 부쩍 가까워진 탓에 바람이 찼다.
기념제가 다가올수록 그 후에 있을 솔렘의 연회가 압박으로 다가왔다.
예전보다는 마력도 훨씬 잘 다루고 공격술도 곧잘 시전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사념이 불안과 결합하여 길어지고, 애리얼은 갖은 걱정으로 손톱을 깨물었다. 갑작스럽게 들린 노크 소리가 아니었다면 밤새 그러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쿵쿵쿵.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묵직했다. 이어지는 목소리도 노크와 닮아 묵직하고 낮았다.
“애리얼 허클리, 샤펠 공녀 서하께서 오셨다.”
아나스타샤, 그녀가 호위를 대동하고 친히 애리얼의 방을 방문했다. 제 주인의 명으로 법도도 잊고서 하대를 감행하는 호위의 목소리가 사나웠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덜컥 불안해진다. 하지만 모르는 체할 수도 없는 일.
애리얼은 카디건을 걸치고서 문을 열었다.
호위가 물러나고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애리얼의 방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명랑하게 말했다.
“혹시 대공자 저하가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대공자 저하께선 기숙사 방에 오시지 않습니다.”
“응. 그러니 이제 방해꾼은 없는 거지?”
“일단 제 방에는 아무도 없긴 합니다.”
“그래, 그러면…….”
아나스타샤가 호위에게 뭔가를 가져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호위가 등 뒤에 숨기듯 들고 있던 것을 애리얼에게 건넸다. 상당한 크기의 새하얀 상자였다.
“자, 이거 받으렴.”
애리얼은 제 앞으로 건네진 상자를 얼떨결에 받아 들고는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뭔가요?”
“기념제를 위한 내 선물! 보아하니 준비를 제대로 안 하는 거 같아서.”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당연하지. 너는 황태자 전하의 사람이잖니.”
거기까지 말하고서 아나스타샤는 애리얼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춘 그녀가 애리얼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기념제에서 몸가짐을 바로 하고, 누구보다 아름답게 있어. 누가 달라붙어도, 넌 전하의 것이라는 걸 잊지 마.”
“그 말씀은…….”
“난 이제 가 볼게. 기념제에 예쁘게 하고 와.”
아나스타샤는 일방적으로 말을 끝내고서 휙 가 버렸다.
방으로 돌아온 애리얼은 선물이랍시고 떠안게 된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새하얀 상자 안에는 상자만큼이나 새하얀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동봉된 카드에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님께’라고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이름난 디자이너의 친필이었다.
한두 푼 하는 게 아닐 순백의 드레스를 애리얼은 떨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왜 이걸 줬을까? 이런 고가의 드레스를……. 왜 자꾸 나더러 황태자의 것이라고 말하는 거지? 나한테 동료 의식이라도 심으려는 건가?’
아나스타샤는 황태자의 약혼녀였다. 오히려 애리얼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치워 버리려고 해야 마땅한데, 그녀는 반대로 행동했다.
애리얼은 호의도 적의도 아닌 아나스타샤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