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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10)화 (110/264)

“아가씨, 빈말이 아니고…… 정말 눈이 부셔요. 아름다우세요.”

칭찬이 많지 않은 카논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애리얼은 떨떠름한 얼굴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흰 리본을 달아 곱게 틀어 올린 머리칼, 매끄러운 피부를 감싼 순백의 드레스. 아나스타샤가 준 드레스로 치장한 애리얼은 예식장에 들어가는 신부 같았다. 이대로 연회에 가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은 당연지사.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그녀에겐 곤혹스럽기만 한 차림새였다. 아나스타샤가 준 것이라 거부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너무 요란한 것도 같은데…….”

“연회잖아요. 다들 이 정도는 입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주목이 끌린다면 차라리 그걸 즐기시는 건 어떠세요? 파트너도 대공자 저하께서 해 주신다면서요. 눈이 몰리는 건 어쩔 수 없을걸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건가.”

“그렇죠. 이왕 가는 거 즐기고 오세요.”

“그러네……. 이왕 가야 하는 거, 웃으며 갔다 올게.”

애리얼은 해탈한 듯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즐기자고, 마음을 가벼이 하며 문을 열자 복도 벽에 기대선 파트너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제복을 차려입고서 귀에는 십자 이어링을 달았다. 반짝이는 드롭 이어링이 연회와는 다소 맞지 않았으나 수려한 외모 덕에 트집 잡힐 일은 없어 보였다.

“왜 이렇게 늦…….”

불만을 토로하려던 그가 얼빠진 표정을 했다. 애리얼의 전신을 담은 금색 눈이 홀린 듯 멍하게 풀렸다.

“선배?”

넋이 나가 있던 그가 애리얼의 부름에 얼굴을 붉혔다. 얼굴뿐인가, 눈가에 귀, 목까지도 벌겋게 물들였다.

지이이잉-

클러치 백 속에 따로 챙겨 온 휴대폰이 사정없이 울렸다. 한동안 잠잠했던 탓인지 유독 요란하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드디어 페널티의 순간이 도래했나 싶어 혼비백산하며 렉시우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구명줄을 잡듯 다급한 손짓으로 제복 입은 팔을 붙들자, 그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소스라치며 애리얼을 뿌리쳤다.

돌발적인 행동에 밀려난 애리얼이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보았다. 그제야 화끈하게 달아오른 렉시우스의 낯이 보였다.

진동의 의미를 깨달은 애리얼이 뒷걸음질을 쳤다. 당황하여 입이 딱 다물렸다.

“아……. 이건, 그…… 이러려던 게 아니고…….”

그가 평소답지 않게 여유를 잃고서 변명했다. 그러다 여의치 않자 미간을 구기고 입술을 깨물다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뿌리쳐서 미안. 에스코트는 제대로 해 줄게.”

“……응. 고마워.”

애리얼은 다가온 손에다 어색하게 제 손을 얹었다. 맞잡은 그의 손바닥이 달군 돌처럼 뜨거웠다.

***

스카이라는 아주 바빴다. 빌어먹을 건립 기념제 때문이었다. 이유도 모르게 잠적한 황태자 몫의 일까지 하느라 그는 눈코 뜰 새 없었다. 후학기에 일을 좀 빼 주겠다더니 그 반대로 되었다. 본디 데본시아의 몫이던 짤막한 기념제의 축사마저 그가 해야 했다.

‘입만 번지르르 나불대는 개자식.’

연회장의 중앙 발코니에 선 스카이라는 한바탕 욕지거리를 뱉고 싶은 걸 참았다.

총학생회장 대행. 데본시아의 일을 한동안 대신 수행하게 된 스카이라는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직 연설의 도중이었다.

“찾아 준 학우들에게 먼저 감사를 전하지. 뛰어난 재능으로 아카데미를 빛내 주어 제국의 미래 역시 밝다. 다만 학업 증진을 위해서는 때때로 적절한 휴식도 필요한 법. 오늘은 본디 특별하게 태어난 그대들을 위해 아카데미가 세워진 날이므로, 그 주인공들로서 마음껏 즐기길 바란다.”

각양각색, 화려하되 천박하지 않은 의상을 갖춘 학생들이 연설의 끝에 맞춰 갈채를 보냈다.

섬세하게 조형한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 아프게 번쩍거렸다. 스카이라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애써 찌푸리지 않은 채 중앙 발코니를 내려왔다.

“저하, 멋진 연설이었습니다.”

헬레나. 그가 겪는 두통의 원인 중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가 부리나케 다가왔다. 진녹색 드레스는 요조함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지나치게 밋밋했다. 목에 걸린 진주알도 크기가 작고 검소했다. 백색 연미복에 붉은 휘장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의 옆에 서면 시녀로 보일 지경이었다.

스카이라는 그녀를 무시해 지나쳤다.

흠칫하며 잠시 몸을 물린 헬레나가 멀어지는 그를 급히 따라왔다.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구두 소리에 스카이라는 진저리를 냈다.

그는 심약한 척하는 왕녀의 집요함을 이골이 나게 겪었다. 특히나 이번 기념제의 파트너 건으로 애를 먹인 건 상상 이상이었다.

스카이라는 대외적으로는 아직 약혼녀가 없는 상태였다. 그랬기에 기념제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오는 공녀들이 줄을 세울 정도로 많았다. 작년에도 겪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좌관을 시켜 대충 거절하도록 미리 조처를 해 뒀었다.

그런데 왕녀가 은근하게 정보를 뿌리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아직 공식적으로 성사된 것이 없는 사이인데, 그녀는 반공인 된 사람처럼 말을 흘렸다. 왼손 약지에는 황실의 각인을 끼고서, ‘저하께서 부르셔서’ 따위의 말을 지껄이고 다녔다.

스카이라와 그의 측근들은 그녀가 보인 언행들이 소문이 되어 들불처럼 번지기 전에 막느라 애를 먹었다.

조용히 처신하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왕녀는 자극적인 정보를 뿌려 소문을 만드는 교묘한 수를 썼다.

그렇다고 처벌을 하기도 어려웠다. 실제로도 그녀가 한 짓 자체는 별거 없었다. 황태자에게 하사받은 황실의 각인을 끼고 해석하기 나름인 소리를 하고 다녔을 뿐.

그 점이 가장 교활했다.

스카이라는 복도가 끊길 때까지 걷다가 야외로 트인 발코니로 휙 빠져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금발을 쓸고 지났다. 그는 피로로 구겨진 미간을 문지르며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었다.

야외 발코니까지 커튼을 걷고 따라온 헬레나가 유약한 모습으로 그의 눈치를 봤다.

본인이 저지른 일과는 무척 다른 얌전한 행동거지에 그는 비웃음이 터졌다.

“생각보다 치정에 밝더군, 왕녀.”

헬레나가 표정을 굳혔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기뻐서…….”

저 말이 개소리라는 걸 스카이라는 잘 알았다. 기쁘긴, 인정해 주지 않아 자격지심에 찌들어 벌인 짓이란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왕녀는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별짓을 다 하는 인간이었다. 정작 그의 입장이나 심정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으면서.

“더러운 추문이라도 내고 싶었나?”

“아, 아니요, 아닙니다. 저하, 저는 단지 저하와 연결된 것이 너무 벅차서 저도 모르게…….”

“연결되다니, 그런 망상으로 소문을 퍼트린 건가?”

“아녜요……. 전 정말 저하께서 하신 말씀은 단 하나도 어기지 않았어요.”

“그 맹점을 노려서 찔렀다는 말로 들리는데.”

“제, 제가 어찌……. 저는 그리 해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정말로 그냥 기쁘고 좋아서…….”

우물쭈물, 소심하고 불쌍하게, 헬레나는 동정심을 부르는 자태로 우는소리를 냈다. 안타까운 피해자인 것처럼. 항상 일을 저지르고는 저런 식으로 회피해 왔을 테지. 왕녀는 그의 방에 몰래 침입하거나 그가 건드린 물건을 훔쳐 숨길 때도 저런 얼굴을 했다.

이제 저 표정을 보면 스카이라는 토악질이 났다. 욕지기가 인 그는 헬레나의 옆을 휙 지나쳐 발코니를 빠져나가려 했다.

헬레나가 멀어지려는 그의 소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공녀님께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날 이후 만난 적도 없고, 어떤 말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네가 말한 그 공녀는 아카데미와 괴리되어 있기라도 한가 보지? 아니면 흘린 소문도 듣지 못할 귀머거리이거나?”

“그건…….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 믿어 주세요!”

웃기는 소리.

그가 소문을 막지 않았다면 애리얼은 그가 아예 결혼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몇 주 전의 그 만남에서도 그를 반말로 대하지 못했겠지. 아예 알은체를 못 했을 수도 있다.

저 왕녀는 그것까지 계산하에 넣었을 것이다. 그러길 바라고 소문을 냈다.

시간이 갈수록 스카이라는 왕녀가 점점 더 거슬리고 역겨워졌다.

별관에서도 제안에 불과했던 약혼을 기정사실로 애리얼에게 통보하다시피 한 게 이 왕녀였다.

그가 이 약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는 조건이, 소문을 엄금하고 애리얼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는데. 왕녀는 약속하고 얼마 있지 않아 바로 그의 조건을 무시했다. 이제는 왕녀가 그를 진실로 좋아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스카이라는 차갑다 못해 잔인한 얼굴로 헬레나에게 경고했다.

“내가 한 말 잘 기억해. 지키지 못하면 기회는 없어.”

이전과는 다르게 여지가 조금도 없는 말투였다. 헬레나의 얼굴에서 단박에 핏기가 사라졌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음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의 소맷자락을 놓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카이라는 화난 걸음으로 발코니를 빠져나와 연회 홀로 들어갔다. 향수와 다과 냄새가 뒤섞인 홀은 그렇게 공기가 좋지 못했다. 그는 갑갑함을 느끼면서도 목까지 잠근 단추를 풀지 못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부나방처럼 모여드는 인원을 상대하느라 진을 뺐다. 미소까지는 못 보여 주더라도 총학생회장 대행에 걸맞은 친절을 보이는 것이 예의였다.

황족과의 연줄을 얻어 보려는 자들과의 영양가도 없는 대화가 한참 난무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스카이라가 보좌관을 불러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던 차였다. 그에게 몰려 있던 시선이 잠시 한쪽으로 쏠렸다.

장내의 공기가 술렁거렸다.

스카이라는 자신에게서 관심이 돌려진 걸 마냥 기껍게 여길 수 없었다. 그에게서 관심을 앗아 가 새롭게 이목을 이끈 존재를 본 순간 가슴이 찔린 듯 선뜩해졌다. 심장이 아릿한 고통을 내뿜으며 빠르게 뛰어 댔다.

눈 아프게 반짝거리는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 그 빛을 온전히 받아 내는 하얀 드레스. 매끈하게 틀어 올린 흑발을 고정해 묶은 하얀 리본. 기다란 리본 끝이 가녀린 어깨를 스치며 흔들거렸다. 새하얀 꽃송이 같은 자태의 소녀가 홀을 누볐다. 촉촉한 눈동자를 깜박이는 차분한 얼굴은 절세가인이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넋을 잃는다.

홀의 인원들은 감탄도 없이 그녀를 주목했다.

스카이라는 그녀를 보지 말라고 악을 쓰고 싶었다. 그녀를 향한 눈알들을 파 버리고픈 잔악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단단한 팔이 나타나 그녀를 안쪽으로 끌어갔다.

렉시우스, 그 개자식이다.

허억, 스카이라가 헛숨을 들이켰다. 속이 펄펄 끓었다. 가열된 피가 핏줄을 타고 머리로 흘러 이성을 폭발시키기 직전이었다. 데본시아고 왕녀고,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를 건드리는 팔을 부러트리고 싶다는 감정에 지배되었다. 분노, 증오, 질투.

끝내 이성을 잃은 그는 무작정 다리를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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