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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11)화 (111/264)

그녀가 발코니로 향했다. 붉은 커튼 사이로 하얀 치맛자락이 사라졌다. 파란 눈이 그 흔적을 좇았다. 

행여나 놓칠까, 스카이라는 한껏 예민해진 상태로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학생들은 알아서 물러나며 그에게 길을 터 줬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살벌하여 아무도 다가서지 못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순식간에 목적지에 다다른 그가 붉은 커튼을 거칠게 걷었다. 야외 발코니의 찬 공기가 밀려왔다. 애리얼,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스카이라가 바랐던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벽처럼 앞을 막은 남자가 그의 화를 부추기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남자의 뒤로 기껏 걷었던 커튼이 미끄러지며 발코니를 가렸다. 스카이라는 선명해지는 분노에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물었다.

남자의 번드르르한 낯이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연회를 이끌고 계셔야 할 황자 저하께서 이런 구석까지는 무슨 일로?”

“렉시우스 크레시앙.”

스카이라의 음성은 그가 보이는 분노의 기색과 달리 몹시 차분하며 낮았다. 그를 상대하는 렉시우스 역시 차분하게 표정을 굳혔다.

“웬일로 진지하게 풀 네임을 부르실까?”

“애리얼 허클리에게 볼일이 있다.”

“내 파트너는 너한테 볼일이 없을 텐데. 그냥 저를 통해 말씀하시죠, 저하.”

렉시우스는 빙긋 웃었다. 장난치듯 살가운 표정이었으나, 서늘하게 죽은 금색의 두 눈은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제는 스카이라가 그의 말을 들어 먹을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황족으로서의 명이다. 비켜.”

“억지 부리지 마, 황자님.”

렉시우스가 냉정하게 타일렀다. 좀 더 이성이 남은 쪽이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애리얼과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총학생회장 대행으로서 네 일을 해, 스카이라.”

“비키라고 명했다.”

“야.”

“비켜!”

스카이라가 크게 소리쳤다. 홀에 있던 이들이 놀라 그를 주목했다.

렉시우스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작작 해라.”

“네가 비키면 작작 하고 갈 거야. 나와.”

“이게 진짜…….”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없는 스카이라의 행태에 렉시우스는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쥐기 일보 직전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인물이 끼어들었다.

“스카이라.”

고상하고 우아하며 익숙하디익숙한 음성에 스카이라가 먼저 반응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커다래진 눈동자로, 가시를 삼킨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두 달도 넘게 보지 못했던 데본시아와 마주했다. 아파서 여태 일을 미루고 이번 연회에도 오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이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

군청색 정장에 하얀 백합을 부토니에르로 꽂은 황태자가 미려하게 웃었다.

“왕녀를 혼자 뒀던데.”

스카이라를 나무라듯 말한 데본시아의 뒤로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린 헬레나가 나타났다. 스카이라를 살피는 헬레나의 연녹색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분노로 이지를 잃기 직전이었던 스카이라의 눈동자가 싸하게 식었다. 그는 분노로 말아 쥐었었던 손을 힘없이 풀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여태 애리얼을 멀리했었는지, 그 이유가 순식간에 떠올라 그의 뇌를 울렸다. 그 사실이 겁화와 같은 질투를 죽일 수는 없었으나, 이성을 되찾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허탈하게 죽은 그의 푸른 눈이 데본시아와 왕녀를 담았다.

그렇게 스카이라는 발코니를 코앞에 두고서 묵묵하게 걸음을 돌렸다. 데본시아와 헬레나의 옆을 스쳐 지난 그는 홀의 중앙 계단을 올랐다. 그 뒤를 헬레나가 쫓아갔다.

데본시아는 멀어지는 둘을 무심히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싱긋 미소 지은 얼굴이 렉시우스를 향했다.

“오랜만이야, 렉스.”

두 달이 넘어서 겨우 아카데미에 등장한 황태자는 능청스러웠다.

렉시우스는 눈치 빠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자신 역시 능청스럽게 굴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데본시아의 마법에 세뇌당해서 기억을 잃은 듯이, 자연스럽게.

“그러게. 두 달이 넘게 얼굴 한번 안 비치고. 크게 아프기라도 했나 봐?”

“응. 꽤 아팠지.”

“너 정도 되는 인간이 두 달이나 앓아눕다니. 신벌이라도 내렸나 보네.”

“신벌이라……. 그럴지도.”

렉시우스의 비아냥거림에 데본시아는 모호한 말을 흘렸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발코니의 안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에 렉시우스는 여과 없이 불쾌함을 드러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말로써 표현하지 않아도 다 느껴질 만큼의 큰 적의. 데본시아의 시선이 발코니에서 다시 렉시우스를 향했다.

“너답지 않게 표정 관리를 못 하네.”

“안 하는 거야.”

“그래? 굳이 숨길 생각도 없구나?”

데본시아는 렉시우스를 떠보듯 가만히 주시하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애리얼에게 안부 전해 줘.”

황태자는 모두가 있는 홀에서 친근하게 그녀의 이름을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렉시우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나선 끝까지 여유로운 태도로 제 성질을 건드리고 떠난 황태자며, 몰려드는 군중의 시선까지. 온통 불쾌하기만 했다.

그렇게 몇 분, 데본시아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주변의 시선들도 제각기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그제야 그는 평안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붉은 커튼을 걷고서 발코니에 진입할 때는 약간의 미소마저 지었다.

어두운 하늘, 밤의 풍경 아래 하얀 드레스가 달빛을 받아 눈송이처럼 곱게 빛났다. 결계 속에 가만히 보호된,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의 파트너. 난간을 붙잡고 먼 곳을 바라보던 애리얼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었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

“일이 있긴 있었네?”

“어. 누굴 좀 만났거든. 공적인 사이라 대화는 짧게 끝냈어. 굳이 네가 들을 만한 사안도 아니었고.”

“그래? 선배가 나오지 말래서 일단 가만히 있긴 했는데…….”

“답답했겠네. 미안.”

“아냐. 어차피 사람 많은 데는 크게 좋아하지 않아서 괜찮아.”

“그럼, 여기 계속 있을까?”

렉시우스가 그녀 주변에 펼쳐 놓았던 방음 결계를 은근슬쩍 지우며 물었다. 애리얼이 미심쩍은 기운을 느끼기 전에 화제를 돌리려는 능수능란함이었다.

애리얼은 자연스레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그녀는 연회장으로 통하는 커튼 쪽을 흘금 보았다. 연회장에 가득한 사람들과 자신에게 몰리던 시선, 수군거리던 목소리 등이 떠올랐다. 굳이 겪고 싶지는 않은 썩 유쾌하지 못한 상황들. 그걸 상기하자 애리얼은 발코니에만 죽 머물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었다.

‘그래도 기껏 왔는데, 여기에만 있는 건 연회의 예절에도 어긋나고.’

이후에 솔렘의 연회에도 참가해야 하는데, 피하기만 하는 건 능사가 아니었다.

‘별로 내 취향은 아니겠지만…….’

조금 더 발코니에 있을 것인지, 아니면 바로 들어갈 것인지.

난간에 기대어 고민하던 애리얼의 목덜미로 찬 바람이 불었다. 소름이 돋는 11월의 냉기였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렉시우스는 툭툭 단추를 풀더니 겉옷을 벗어 애리얼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차가워진 피부를 부드럽게 감싼 옷의 촉감에 애리얼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가 무심히 말했다.

“날이 춥네.”

“선배는 안 추워? 괜찮아?”

“괜찮아.”

“그러면 잠시만 빌릴게. 고마워, 선배.”

애리얼은 겉옷을 벗어 준 그의 호의 덕분에 연회장으로 돌아갈 생각이 꽤 옅어졌다. 그가 권유해 준 대로 잠시 여기 있는 것도 괜찮겠지.

그녀는 제 어깨를 덮은 제복의 옷깃을 소중하게 쥐고서 난간에 기댔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려왔다. 커튼에 막힌 탓에 멀게 느껴지는 소리가 바깥의 바람과 섞였다. 환한 달과 어우러지니 상당히 운치가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고 선 애리얼의 곁으로 렉시우스가 붙어 섰다. 그의 오른팔이 애리얼의 등을 지나 난간을 짚었다.

옷이 스치고 몸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렉시우스는 한쪽 팔 안에 온전히 들어오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몹시 만족스러운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기증이 일 정도로 긴장이 됐다. 난간을 짚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차갑던 대리석이 그의 손바닥에 닿아 미적지근해졌다.

애가 탄다는 말이 이토록 잘 와닿는 때가 있을까.

“선배는 홀에 안 들어가 봐도 돼?”

모종의 감정이 고조되는 와중에 그녀가 물었다.

렉시우스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안 들어가 보냐니, 내심 저를 보내고 싶은 것인가. 고작 이런 말 한마디에 그는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대답했다.

“안 가도 돼.”

“만날 사람 없어?”

“없어.”

“연회는 안 즐겨?”

연거푸 물어 오는 통에 렉시우스는 심통이 났다. 괜히 저를 귀찮게 하지 말고 연회에나 가 버리라고 이렇게 유도 신문을 하는 건가. 비뚤어진 마음에 퉁명스럽게 답했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즐겨.”

“응……. 다행이다.”

“다행?”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묻자 애리얼은 허둥지둥 해명했다.

“그, 다른 의도가 아니라! 선배가 여기 억지로 있는 건 아니구나 해서…….”

“해서, 뭔데?”

“그냥…… 선배한테 싫은 일 하게 한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애리얼이 멋쩍게 웃으며 상체를 약간 젖혔다. 기특한 소리를 하는 그녀의 등이 그의 팔에 스치듯 닿아 왔다.

렉시우스는 날뛰는 심장을 다스리듯 느릿하게 호흡했다. 감질나는 접촉에 한숨이 절로 났다. 그는 대화를 잇지 못하고 이를 깨물었다.

끌어당기면 곧장 자신의 품 안에 묻을 수 있는데, 감히 포옹하지 못해 근질거리는 두 팔을 억제했다. 바로 옆에 두고서도 차마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인내는 고문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순간이 좋았다. 이 찰나에서 유발되는 설렘이 너무나 낯선 경험이어서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 겪는 감정의 요동을 기꺼이 인내했다. 한편으론 즐기기도 했다. 굉장히 신사적인 척을 하면서…….

바람에 날린 애리얼의 머리칼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났다. 매끄러운 감촉과 함께 꽃이 풍길 법한 단내가 물씬 풍겼다.

렉시우스는 숨을 멈추었다. 몸이 경직되어 손마디마다 힘이 들어갔다.

‘즐기기는 개뿔.’

인내가 간당간당하다. 격리된 발코니보다는 차라리 홀의 중앙에 있는 게 나을 것이다.

“애리얼.”

“응, 선배.”

“넌 연회가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지?”

“응. 계속 방에서만 지냈으니까, 이런 데는 처음 와 봤어.”

“그러면 즐겨야지. 이런 데서 시간 죽이지 말고.”

연회를 즐기기 싫다던 그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애리얼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애리얼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이 의아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커튼이 걷히고 환한 홀이 보였다. 찬 공기가 날아가고 연회장의 훈기가 몸을 감쌌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선명하게 들렸다.

몇몇 시선들이 애리얼을 향해 날아들었다. 홀의 안쪽으로 향할수록 자연스레 눈길이 모였다. 애리얼은 긴장감에 렉시우스의 손을 꼭 잡았다. 렉시우스는 맞잡아 오는 그녀의 손을 강한 악력으로 붙들어 주었다.

그는 번쩍이는 샹들리에 아래, 춤추는 페어들이 모인 홀의 가장자리로 파고들었다.

시선이 많이 닿지 않는 한산한 자리. 하지만 충분히 연회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곳.

커튼이 쳐진 창문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애리얼을 돌려세웠다. 점잖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지은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적잖이 당황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하긴, 야외 발코니에서 갑작스럽게 연회 홀로 끌려왔으니 무리도 아니다.

얼떨떨하게 그를 보던 애리얼이 작게 벌려진 입술을 움직였다.

“……선배?”

“긴장돼?”

“그것도 그렇고, 좀…… 놀랐어…… 요.”

“그래도 피하지는 않았네.”

“그야…… 선배가 즐기자고 해 줬으니까요?”

“나하고 어울려 줄 거라는 소리로 알아들어도 되지?”

“뭐 하시려고요?”

“연회에서 하는 거야 뻔하지.”

렉시우스는 턱짓으로 홀의 한중간에서 춤추고 있는 페어들을 가리켰다.

“……선배, 춤추시게요?”

“싫어?”

“아뇨…….”

연회에서의 춤은 일종의 예절이기도 했다. 귀족적인 교양을 갖췄음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예의로 한 곡은 무조건 춰야 한다. 모든 연회에서 적용되는 암묵적인 규칙이었고, 황족도 예외는 없었다. 황태자와 황자 역시 오프닝 댄스로 각각 한 곡씩을 소화하고 떠났다. 그런 와중에 연회에 처음 모습을 비친 애리얼이 한 곡도 추지 않는다면, 애리얼 본인은 물론 파트너인 렉시우스까지 구설수에 오를 것이다.

애리얼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렉시우스는 다가온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당기며 허리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능숙하게, 손등에다 입술을 누르고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사교계에 익숙한 귀족처럼, 지극히도 우아하게.

“레이디, 당신의 파트너로서 청합니다. 부디 저에게 첫 춤의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나른한 존댓말이 생소하게 귀를 간질였다. 전에 없던 정중함. 감히 고개를 저어 거부할 수 없는 그의 진지한 태도.

“제가 춤은 전혀 못하는데…….”

애리얼이 말끝을 흐리는 공교로운 순간에 곡이 바뀌었다. 느린 왈츠가 들려왔다.

렉시우스가 나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못해도 괜찮아. 마음껏 밟아.”

속삭인 그가 숙였던 상체를 세우며 애리얼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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