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우스의 리드는 탁월했으나, 애리얼은 실수를 연발했다. 엉망인 스텝이 파트너의 발을 연신 밟고 말았다. 귀족 공녀의 교양으로서 최소한의 기본기만 교육받은 탓이었다.
그녀는 창피함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신경 쓰지 마.”
렉시우스는 능숙한 동작으로 그녀의 실수를 가려 주었다.
그는 어설픈 애리얼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제 겉옷에 싸여 제 리드를 따라오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좋았다. 헤픈 웃음을 지을까 봐 억지로 이를 악물게 되는 것만 제외하면 기껍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느리던 곡이 끝나고 춤이 멈추는 게 너무나 아쉬워서 탄식이 터질 만큼.
“한 곡 더?”
그가 못내 아쉬워하며 물었으나 애리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간 선배 발등에 구멍을 낼지도 모르겠어요.”
“밟았는지도 모르겠던데 무슨 소리야?”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지만, 더 추기에는 제가 너무 미숙…….”
애리얼의 말은 무르익은 연회에 맞춰 우렁차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묻히고 말았다. 곡이 바뀌고, 렉시우스는 모르는 척 애리얼을 이끌며 한 곡을 더 추게 했다.
홀의 구석에서 고상한 사교춤이 이어졌다. 훤칠한 제국의 영웅과 무서우리만치 아름다운 편입생의 페어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오랜 전쟁으로 부재하다가 연회에 나타난 대공자가 애지중지 모시는 소녀. 제국을 뒤흔들 절색이라며 수군거리는 소리에는 질투와 감탄이 뒤섞여 있었다. 오늘 연회의 최고 화두였다.
“저렇게나 아름다우니, 귀애를 받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가…….”
“약혼한 사이라는 이야기도 있던걸?”
“그런데 저 편입생은 황자 저하 쪽 사람 아니었어?”
“연막이겠지. 아직 공식적으로 밝힌 약혼이 아니니까.”
“그냥 편입생이 여기저기 찌르는 중인 거 아니야? 저 얼굴이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제국 영웅 칭호는 그냥 다는 줄 알아? 그런 데 흔들리실 분이겠냐고.”
“야, 대공자 저하도 눈이 있는데 그러실 수도 있지!”
“난 무조건 약혼녀라고 봐. 발표만 안 했지, 저 모습을 보면 누군들 모르겠어?”
목소리를 낮춰 도는 이야기에 어느덧 조금씩 유언비어가 섞여 들기 시작했다. 저마다 말을 얹고 살을 붙이며 퍼져 기어코 황족이 있는 발코니에까지 흘러갔다.
대공자의 약혼녀. 와전되어 애리얼을 지칭하는 그 말이 스카이라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는 대번에 인상을 팍 구겼다. 지독한 불쾌감에 살의마저 치밀었다. 소파 팔걸이에 걸쳐 두었던 손이 둥글게 말렸다. 이렇게나 빼앗기는 게 원통하고 고통스러운 적이 있었던가. 손등에 뼈가 도드라지고 시퍼런 핏줄이 섰다.
스카이라는 가슴을 들썩이며 씨근댔다.
애리얼 허클리. 그가 처음 봤고, 그가 데려온, 그의 사람이었던 이.
그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혈압이 끓어오르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속이 갈가리 찢겼다.
이전처럼 열등감 때문이라거나 자존심 따위가 상해서라는 이유라면 편했을 텐데. 폭풍처럼 발발한 스카이라의 분노에는 불안이 크게 내재해 있었다. 이대로 영영 애리얼과의 거리가 벌어져 그녀에게 닿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분리 불안에 걸린 아이처럼 겁이 났다. 만약 애리얼이 정말로 렉시우스와 약혼이라도 한다면…….
말아 쥔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당장 발코니에서 아래의 연회 홀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대로 애리얼에게 다가가 렉시우스를 떼어 내고 싶었다.
“저하…….”
옆자리에 앉은 헬레나가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스카이라는 핏발 선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헬레나가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기가 눌린 얼굴이 소극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꿋꿋하게 하려던 말을 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연회는 뒤로하고 쉬시는 건 어떠실까요?”
“총학생회장 대행이라도 내가 주관한 연회다. 중반도 안 되어 빠지면 연회 자체의 무게감이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내 손으로 이 연회를 망치라고?”
“저는 그저…… 저하가 걱정이 되어서…….”
“쓸데없는 참견이다.”
“스카이라.”
건너편 소파에 앉은 데본시아가 갑자기 난입하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또 혈압 오를 소리를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스카이라는 데본시아의 쪽은 보지도 않고 홀의 샹들리에만 응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본시아는 입을 움직여 그가 싫어할 소리를 뱉었다.
“상냥하게 대해 줘야지. 왕녀가 겁먹잖아.”
“고작 이 정도에 겁을 집어먹으면 폐하의 앞에서는 졸도라도 하겠네.”
“그래도 심약한 게 귀엽잖아.”
“귀엽긴 개뿔. 네 취향이면 네가 데리고 살아.”
스카이라의 비아냥거림에 헬레나가 동요했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아나스타샤를 살폈다. 황태자의 옆에 자리한 아나스타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백색 드레스를 입은 인형 같았다. 태연하다 못해 정적인 반응.
“하지만 왕녀는 너를 좋아하는걸.”
데본시아가 능청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헬레나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스카이라의 말에 스스로 변론을 펼쳐 보라는 듯, 그녀를 부추겼다. 움츠러든 헬레나는 안절부절못하다 데본시아의 시선에 겨우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 저하께서 불쾌하셨다면,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할게요. 부족한 점은 앞으로 고쳐 나갈게요. 그러니 제발 그런 말씀은…….”
구구절절한 헬레나의 구애 도중에 발코니의 커튼이 스르륵 움직였다. 붉은 커튼 너머로 시선이 모였다.
검은 정장에 헝클어진 금발. 간신히 격식만 차린 차림으로 레이신이 등장했다. 잘 말하던 헬레나의 입이 그의 등장으로 다물렸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발코니를 훑다가 빈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레이신에게로 고개를 향한 데본시아가 친근한 말투로 대화를 이끌었다.
“레이, 춤은? 그보다 파트너는?”
“안 출 거고, 없어.”
“그렇게 굴면 평이 안 좋아질걸?”
“내 평판이야 더 나빠질 것도 없을 텐데.”
레이신은 심드렁했다.
그는 연회는 물론 격식을 차리는 대부분의 자리를 몹시 귀찮아했다. 아카데미 건립 기념제는 황실에서까지 나서 강제하는 행사라 참여한 것뿐이었다.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다 사라질 요량이었다.
그와 친분이 깊은 데본시아와 스카이라는 그의 성정을 잘 알았다. 이 이상 대화를 시도해 봐야 즐겁지 않을 것을 안다. 종종 그와 마주했던 아나스타샤 역시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헬레나는 달랐다.
“좋은 밤이에요, 솔렘 공자 서하.”
헬레나는 스카이라와 친분이 있는 그에게 잘 보일 요량으로 한껏 미소를 피워 냈다.
그러자 내내 조용하던 아나스타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레이신은 늘 그렇듯이 헬레나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고, 헬레나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수치스럽다 못해 화가 났다.
왜 자신이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아나스타샤도 레이신도 불쾌했다. 이 나라의 공작가 자제라는 것들은 높은 신분에 걸맞지 않게 하나같이 예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소심하게 상처받은 척을 했다. 본연의 독선적인 성격이 치받아 올라왔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매섭게 치뜬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황태자가 일러 준 대로 가련한 소녀를 연기하여 황자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그러나 황자는 매번 냉기만 흘리며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옆에 붙어 알랑거리는 것은 그녀인데, 황자의 눈은 언제나 다른 곳을 향했다. 지금도.
샹들리에의 빛조차 미약한 저 홀의 구석, 하얀 드레스 위에 검은색 제복 상의를 걸친 소녀가 보였다. 애리얼 허클리. 그가 절대 손대지 말라던, 총애하는 공녀.
질투에 이어 자격지심에 풀이 죽은 헬레나는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눈에 황자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황태자가 보였다.
‘황태자께서 왜……?’
헬레나는 묘한 의문을 느끼며 그를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데본시아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생긋 웃으며 조용히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 뭘 눈치챘든 함구하라는 의미였다.
헬레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하니 황태자께서도 저 공녀를 신경 쓰고 계시는가.
‘아니, 설마…….’
만일 그랬다면 대공자가 저 공녀를 파트너로 대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태자파인 그가 황태자가 마음에 둔 인물을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면……? 나에게 경고하신 건가? 공녀를 건드려서 황자 저하를 자극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해하자 헬레나는 급격하게 주눅이 들었다. 왕녀로서의 자존심이 백작 공녀를 향한 자격지심에 갉아먹혔다.
언제까지 이런 기분에 내쫓겨야 하는가.
‘설마 황자비가 된 후에도 저 공녀의 눈치를 계속 봐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이런 수모를 받을 바엔 황자비 자리를 거절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푸대접을 받으며 황자비가 되어 봐야 좋을 일은…….
‘그래도 상관없어.’
스카이라에게로 시선을 옮긴 헬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황량한 실습장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던 나의 황자님. 궁지에 빠져 기절할 뻔했던 자신을 구하러 온 구원자.
그에게 들러붙을 수만 있다면 백작 공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황자비가 되는 쪽이 승리자다. 자신이 황자비가 되면 저 공녀는 잘해 봐야 정부나 되겠지.
누가 뭐래도 대외적인 첫 번째는 왕녀인 자신이다.
그러니 스토킹이든 추문이든, 어떤 극단적인 수를 써서라도 기어코 황자비 자리를 꿰찰 것이다. 설령 그게 제 사랑인 황자의 평판을 떨구는 일이 되더라도.
그 음습한 의도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스카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레나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저하! 어디를 가시려고…….”
“알 거 없어.”
“하지만…….”
더듬거리며 붙잡으려는 헬레나를 뒤로하고 스카이라는 발코니를 나섰다.
홀을 빙 돌아가는 그의 걸음이 쫓기듯 다급했다.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갖가지 감정으로 속이 화끈거려서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는 약점인 감정을 겉으로 죄 드러내게 생긴 참이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동요케 하는 애리얼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애리얼을 지나치지 못했다. 차마 홀을 나서지 못하고 커튼으로 가려진 발코니에 숨어 그녀를 훔쳐보았다.
왈츠를 막 끝낸 애리얼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에 걸친 겉옷을 렉시우스에게 돌려주었다. 렉시우스는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하다가 받은 겉옷을 왼팔에 끼고서는 그녀의 손을 당겼다. 렉시우스가 귓속말로 뭐라 소곤거리자 애리얼이 난감해하는 듯하다가 마찬가지로 작게 소곤소곤 말했다. 연인끼리 밀어를 속삭이듯 근거리에서 조용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홀의 잡다한 소리에 가려진 둘의 대화는 타인에겐 들리지 않았다. 도청을 허용하지 않는, 오로지 둘만의 이야기였다.
스카이라는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 냈다. 질투심에 온 창자가 꼬이는 것 같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애리얼을 붙잡을 듯 튀어 나가려는 제 오른손을 붙잡았다. 손목에 감긴 은색 브레이슬릿의 단단한 감촉이 힘줄을 세운 오른손과 함께 잡혔다.
“저하께서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물보라를 일으키며 강물에 뛰어들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했다. 황태자를 버리고 저에게 달려와 브레이슬릿을 건네던 그녀가…….
그는 헐떡이며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와이셔츠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질투, 분노, 불안……. 한 가지로 형언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날카롭게 속을 찔러 댔다. 심장을 도려내고 싶었다. 불에 달군 쇳덩이를 억지로 삼킨 것만 같았다.
“미칠 것 같아…….”
병인처럼 절절 끓는 목소리가 토해졌다.
이렇게까지 질투를 불태우며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스카이라는 스르르 미끄러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기다란 커튼이 무너진 그의 모습을 가려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홀의 한구석에서 애리얼의 휴대폰이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