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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13)화 (113/264)

지이이잉-

오늘에만 두 번째 울린 진동에 애리얼은 요란하게 소스라쳤다. 대화를 나누느라 가까이 붙어 있던 렉시우스가 덩달아 놀랄 정도였다.

“너 왜 그래?”

“아니……. 그냥 발을 좀 헛디뎌서 그래요.”

“잡아 줄까? 아예 안겨도 좋고.”

렉시우스가 장난스레 말했다. 애리얼은 사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휴대폰의 진동 때문에 심란해진 탓이었다. 이 진동은 무슨 의미일까.

‘설마하니 렉시우스의 호감도가 오늘에만 두 번 오른 건…… 아니겠지?’

애리얼은 섬뜩한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그런 거라면 렉시우스의 하트는 네 개가 된다. 그의 개인 루트로 진입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도 레이신의 하트가 단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페널티 때문에 잠시 공략을 미뤄 두기로 했으나 이 지경까지 오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렉시우스의 표정이 못마땅하다는 듯 찌푸려졌다.

“내가 무슨 협박이라도 했어? 반응 한번 끔찍하네.”

“죄송합니다.”

“뭘 또 사과까지 해.”

“오해를 사게 행동한 거 같아서요.”

애리얼은 창백한 얼굴로 그의 곁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연회를 떠나고 싶었다. 당장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에 온 알림을 확인하고팠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

그녀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음을 눈치챈 렉시우스가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애리얼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먹은 것도 없는데?”

“그냥…… 좀 메스꺼워요. 어지럽기도 하고.”

“많이 안 좋아?”

“……네.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 갔다. 아프다는 건 순 거짓이었으나, 좋지 않은 예감으로 파리해진 안색 덕에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렉시우스는 미심쩍다는 눈을 하다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나가자.”

애리얼은 혼자 가도 된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말이 길어지면 의심을 살 것 같았다.

둘은 시선을 피해 연회장을 나왔다. 11월의 한기가 피부를 차갑게 식혔다.

소매가 없는 드레스는 추위에 취약했다. 바람이 불자 애리얼은 바르르 떨며 움츠러들었다. 렉시우스가 곧장 제 겉옷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애리얼은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하기에는 밤이 깊어진 바깥 날씨가 너무 추웠다. 게다가 그녀는 한창 아픈 척을 하는 중이었다. 추위를 견디겠다며 그의 옷을 거절하는 건 의심을 부르는 행동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도착했다. 기숙사까지는 금방이었다.

렉시우스는 아프다는 애리얼의 거짓말을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워낙에 눈치가 빠른 인간이었다. 이미 거짓이라는 걸 간파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줄곧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대했다.

애정이 느껴지는 렉시우스의 태도에 애리얼은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미 그의 루트에 들어오게 된 걸까. 낭패감에 젖어 우울해진 표정을 아픈 척으로 숨겼다.

방문 앞에 선 애리얼이 어깨에 걸쳐진 제복을 벗어 그에게 건넸다.

“바래다주셔서 고마워요. 들어가 볼게요.”

“너, 존댓말……. 아니, 됐다. 들어가서 쉬어.”

그는 애리얼의 말투를 지적하려다 한숨을 푹 쉬며 옷만 받아 들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구는지 이유를 물을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의 집요함을 생각하면 지금 보이는 인내는 나름의 배려라고도 할 수 있었다.

“선배도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애리얼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남기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렉시우스는 문이 닫히고도 몇 분을 더 머무르다가 자리를 떠났다.

그때까지 애리얼은 문 앞에 붙어 서 있다가 그의 인기척이 사라짐과 동시에 휴대폰을 꺼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쫓아다니고, 붙잡고 싶어 합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 2층 복도』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쫓아다니고, 붙잡고 싶어 합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연회장(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다행히 애리얼이 우려하던 렉시우스의 루트라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직전이기는 했다. 문제는 한 명이 아니라 무려 두 명이나 그렇다는 거였다.

‘렉시우스는 그렇다 치고, 마주치지도 않은 스카이라는 왜……?’

화면을 보며 생각에 골몰했다.

둘의 호감도는 어느 순간부터 하락 없이 상승만 하고 있었다. 심지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생뚱맞게 불쑥 오르기도 했다.

왜 이러는 걸까. 골몰하던 애리얼은 이윽고 중대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호감도 하트라는 것은 애리얼의 행동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공략 대상이 제 감정을 언제 어떻게 자각하느냐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니 설령 애리얼과 대화 하나 나누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들이 자각만 하면 하트는 늘어났다.

그렇다는 건, 이제 둘의 공략은 그녀가 조절할 수 있는 범위를 떠났다는 소리였다.

‘어쩌자고, 벌써!’

애리얼은 끙 소리를 내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 욕실에 있던 카논이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벌써 오셨어요?”

“응…….”

“아직 목욕물도 못 받아 놨는데……. 연회가 별로셨나요?”

“그냥 좀 피곤했어. 나랑은 잘 안 맞는 거 같아.”

애리얼은 힘없이 대답했다.

***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바래다주고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애리얼이 왜 저러는 건지, 연회장에 가 보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본인이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혼자 삽질이라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프지도 않은 주제에 아픈 척은 왜 그렇게 잘해서.’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까의 상황을 상기했다.

소스라치던 몸, 창백한 안색, 그녀답지 않게 줄줄 늘어놓던 거짓말.

‘내가 뭔 거지 같은 실수라도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는 즐겁다 못해 푼수가 되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좋았는데, 애리얼은 아니었다니. 상상만 해도 돌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생각으로 가득해진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가 떠날 때와는 극명하게 달라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웃고 떠드는 소리도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의 눈이 원인을 찾아 기민하게 내부를 살피다 한 곳에 멈췄다. 중앙 발코니. 거기에 데본시아가 서 있었다. 옆에는 드물게도 샤펠 공녀를 데리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샤펠은 장식품처럼 황태자의 옆을 지켰다. 애리얼의 것과 비슷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서.

“저 인간…….”

렉시우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아나스타샤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애리얼더러 치장에 신경 쓰라고 간섭하더니 이러려던 거였나.

그는 오늘 애리얼이 입은 드레스가 아나스타샤의 손을 타고 넘어온 것임을 알고서 참을 수 없이 불쾌해졌다. 아나스타샤가 무슨 의도로 애리얼에게 드레스를 줬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왜 구태여 애리얼과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발코니에 섰는지도,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애리얼이 황태자의 사람이라는 걸 공공연하게 과시할 생각이겠지.’

그러면 그를 파트너로 두고 어울린 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맞는다. 그 역시 데본시아 쪽의 사람이었으니까. 최근 부재했던 황태자를 대신해 적당히 그녀를 맡았다고 보일 것이다.

“한 가지 발표하도록 하겠다.”

렉시우스가 확신을 갖고 분노를 느낄 즈음, 데본시아가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아나스타샤 샤펠, 블랑셰 멜로르. ……그리고 애리얼 허클리.”

데본시아가 의도적으로 말을 늘이며 애리얼의 이름을 강조했다. 렉시우스의 눈썹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여태 부재하다가 전교생이 모이는 기념제를 택해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이거였나.

“올해의 편입생들은 이제 모두 내 이름 아래에 놓이게 되었으니…….”

렉시우스는 데본시아의 연설 도중에 연회장을 나왔다. 더 듣다간 혈압이 올라 의자라도 집어 던질 것 같았다.

잘 관리한 잔디밭을 거칠게 밟아 가로지르며 분을 삭였다. 무작정 흥분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이 안 된다.

연회장 주변을 한 바퀴 빙 돌고서야 겨우 차분해진 그는 데본시아가 저지른 짓거리의 대응책을 고민했다.

이대로 전부 데본시아의 의도대로만 가는 건 안 될 일이었다. 황궁에 심은 첩자들이 이렇다 할 성과도 내지 못하고 도리어 의심만 사는 상황이다. 저번에 보았던 그 기괴한 도식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놈의 신경을 흩트리고 시선을 돌리게 할 만한 요소가 필요했다.

‘소문 같은 건 무시하면 그만이니, 좀 더 집요하고 쉽게 끊어 낼 수 없는…… 이를테면 측근의 변심.’

렉시우스는 데본시아의 측근들을 한 명씩 떠올려 보았다. 보좌관, 직속 시녀, 호위. 하나같이 변심시키기 어려운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아주 불가능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공을 들이면 몇 명 정도는 그의 밑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데본시아였다. 사람에게 특히 냉정한 황태자가 변심한 측근을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변심한 그 즉시 제 주변에서 잘라 낼 것이 뻔했다.

지속적으로 데본시아를 흔들려면, 그가 쉽사리 잘라 낼 수 없을 주변인이 필요했다.

‘누가 있지?’

렉시우스는 이마를 짚으며 고뇌에 빠졌다.

어지간한 측근으로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을 테니, 신분이 상당히 높으며 중요 직책에 놓인 이가 필요했다. 잃으면 제국의 입장에서 손해인 존재가 적합하다.

‘이를테면 약혼녀인 아나스타샤 샤펠……?’

그녀는 지위가 높으며 함부로 잘라낼 수 없는 측근이라는 조건을 충족한다.

하지만 그녀는 어지간한 일로 변심할 인간이 아니었다. 데본시아에게 무아지경으로 심취한 이들 중 하나였고, 설령 어렵게 변심시킨다 한들 그녀가 데본시아를 흔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아무렴 대공자인 자신에게도 서슴없이 살기를 드러내던 게 데본시아다. 그보다 못한 아나스타샤 샤펠은 딱히 기대할 만한 패가 아니다. 오히려 단칼에 잘려 나가지나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떠오르는 건 혈연. 동생인 스카이라와 아버지인 황제.

언뜻 좋은 패 같았지만 렉시우스는 곧장 그 생각을 끊어 냈다. 이용하기 너무나 어려운 대상이었다. 심지어 데본시아는 혈연에도 연연하는 이가 아니었다. 과거 황후의 죽음에도 냉담하던 그의 반응을 생각하면 혈연은 오히려 최악의 선택지에 가까웠다.

그러면 남는 것은 한 명.

‘애리얼.’

렉시우스는 그녀를 떠올리자마자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이용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었다. 그녀를 데본시아에게 미끼로 던져 주느니 제 팔을 잘라 던지는 게 나았다.

‘그러면 남은 방법이…….’

막다른 길에서 탈출구를 찾듯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이윽고 그는 연회장 주변을 서성거리며 뭔가를 찾는 듯한 사람을 포착했다. 진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학생. 어딘지 익숙한 외관에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스카이라와 혼담이 오간다던 그…… 왕녀.’

스토킹에 무단 침입까지 서슴없이 하는 인간이라고, 황성에 심어 둔 기사들이 그렇게 보고했었다.

렉시우스는 빙그레 입꼬리를 휘었다. 그러고서는 옆구리에 끼워 들었던 제복 상의를 제대로 갖춰 입었다.

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는 천천히 왕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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