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밤입니다. 플라넬의 왕녀.”
렉시우스는 존댓말을 쓰며 왕녀에게 말을 걸었다.
왕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그를 발견하고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게 존댓말로 말을 건 이가 여타 평범한 귀족 학생이 아닌 대공자였기에.
“대공자 저하, 말씀을 놓으세요. 저는 왕녀에 불과합니다.”
“미래에 황자비가 되실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동계급이시니, 존댓말로 대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황자비라는 말에 들뜬 왕녀는 그의 귀빈 대접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수줍게 웃었다.
“그나저나 대공자 저하께서는 어쩐 일로 여기 계신가요? 홀에 계시지 않고…….”
왕녀의 눈이 렉시우스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파트너인 애리얼을 찾는 모양이었다.
“파트너의 몸이 좋지 않아 바래다주고 오는 길입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예, 뭐. 저보다는 파트너가 힘들겠죠.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뇨……. 감사를 받을 일은…….”
헬레나는 기쁜 듯 연신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나누는 존중받는 대화였다. 헬레나는 대공자가 마음에 들었다. 무시나 비소를 일삼던 발코니의 공작가 것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는 황자가 아닌 황태자 쪽의 사람. 그와 이런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는 건 옳지 않았다. 자칫 황자의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바람이 차네요. 저는 이만 홀 안으로 돌아갈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가서 하면…….”
“황태자 전하와 관련된 일입니다.”
홀을 향해 몸을 돌리던 헬레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자리를 옮기고 싶습니다. 여기서 할 이야긴 아닙니다.”
“제가 거절한다면요?”
“왕녀님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제게 강요할 권리는 없습니다.”
렉시우스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며 고개까지 짧게 숙였다. 왕녀가 제국의 고위 계급 사이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기에 한 행동이었다. 렉시우스도 잘 아는 그들은 왕녀를 무시하길 일삼았다.
그러니 대공자인 그가 정중히 굴면 왕녀는 분명히…….
“대공자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분명 중요한 일이겠지요.”
왕녀가 몸을 틀어 렉시우스를 마주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렉시우스는 정중한 태도로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안전한 장소까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왕녀가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그의 팔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가 지금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는지, 왕녀는 모를 것이다.
***
헬레나는 홀의 한구석에서 진정되지 않는 가슴께를 누르며 방금의 일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왕녀님을 마음에 두고 계신 듯합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감히 사실이라 여기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대단한 소리였다. 헬레나는 비명이라도 지를까 봐 제 입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들쭉날쭉한 호흡이 색색 빠져나갔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그렇게 짐작한 증거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대공자는 확신에 차 보였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너무나 진실 같았다. 허무맹랑한 거짓으로 사람을 흔들 무뢰한으로 보이지는 않았었다. 아무렴 공작가 것들과는 근본부터 다르지 않던가. 대공자라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도 왕녀인 제게 머리까지 숙였던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황태자 쪽의 사람이기도 했다.
“사실 왕녀님도 조금은 아시지 않습니까?”
헬레나는 홀의 벽면에 붙어 선 채 그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내가 안다고……. 황태자 전하의 사심을…….’
그녀는 과시하기 위해 챙겨 온 황실을 각인을 손안에서 굴리며 떠올렸다. 황태자가 그녀에게 상냥한 축에 속하기는 했다. 혼담이 오가는 황자보다 훨씬 더 친절했다. 그 힘들다는 순간 이동 마법으로 장거리 이동을 거듭하고, 황자와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녀가 벌인 스토킹과 같은 사건들을 덮어 주고.
황태자비도 아니고 미래의 황자비가 될 상대에게 해 주기에는 지나친 대우였다. 오히려 문제 행동을 보고 제국의 위신을 생각해 잘라 내도 시원찮을 판국에.
‘설마…….’
헬레나는 황실의 각인을 꾹 쥐었다.
황자의 냉대 속, 유일하게 그녀를 지탱해 주는 자존심인 각인마저 황태자가 준 것이다.
“전하께선 약혼녀인 샤펠 공녀에게도 친절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확실히 그렇긴 했어.’
아까 발코니에서도 그랬다. 황태자는 제 옆에 앉은 샤펠 공녀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 황자가 헬레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을 때는 나섰다.
“그런데 사심이 없으실 거라고 단언하실 수 있겠습니까?”
헬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잘 안됐다. 상황이, 그녀가 겪은 일들이 자꾸만 설득력을 부여했다. 대공자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정말 그렇다고 하면…… 전하께서 왜 저를 황자 저하와 엮어 주려 하시는 거예요? 이상하잖아요!”
“왕녀님께서 황자님을 마음에 두고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희생적인 마음으로 엮어 주시려는 걸 겁니다. 게다가 전하께는 이미 정략으로 맺어진 약혼녀가 있으시니, 이렇게 하는 편이 그나마 왕녀님과 가까워질 방법이기도 하셨을 테고요.”
“저,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억측이에요! 아무리 설득하셔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순 없어요!”
“이해합니다. 저도 그저 측근으로서 관찰한 것을 토대로 짐작하여 말씀드린 것뿐이니까요.”
“그래요! 전하께선 심지어 오늘 홀에서 허클리 공녀를 보고 계셨다고요!”
“왕녀님께서 허클리 공녀에게 관심을 두고 계시기에, 전하께서도 관심을 가지셨을 뿐입니다. 허클리 공녀를 황자님의 아래서 빼내 오신 것도 왕녀님 때문입니다. 왕녀님께서 신경 쓰이시지 않게, 공녀를 자신의 손으로 다루려는 생각이신 겁니다.”
그때의 대공자는 칼같이 단정하여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진 것도 같았다. 몹시 진중하게 들렸다.
그래서 헬레나는 그 발언이 진실이라 여겼다. 실제로 헬레나가 허클리 공녀를 신경 쓰며 행동하는 걸 황태자는 알고 있었다. 그에 관련하여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오늘도 발코니까지 찾아간 황자를 다시 돌아오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상황이 맞아 들어가자 헬레나는 기이한 감정으로 고양되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나를…… 진정으로 마음에 두셔서 친절히 대해 주신 걸까?’
몸이 잘게 떨려 왔다. 황자를 마음에 담은 그녀에게 황태자의 애정은 부담스럽고 불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권력자의 애정은 그 나름대로 기껍기도 했다. 황자에게 줄곧 무시받고 공작가 자제라는 것들에겐 업신여김을 당한 그녀의 자존심이 황태자로써 채워졌다.
황자를 향한 애정과는 별개로, 헬레나는 대공자의 말을 진실로 믿고 싶어졌다.
***
이틀 후, 이른 아침 기숙사의 1층 휴게실.
애리얼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렉시우스의 앞에 스카이라가 나타났다.
“왕녀에게 무슨 소리를 떠들었는지 말해.”
다짜고짜 묻는 말에 렉시우스는 피식 웃음을 날렸다.
“감시를 붙였었나 봐?”
“연회 홀에서 많이 벗어나지도 않고 대화를 나눴잖아. 눈이 많은 걸 생각했어야지.”
“그래서 중요한 얘기는 자리를 바꿔서 한 거잖아. 그 덕택에 너도 모르는 거고.”
그렇게 반박하자 스카이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말해.”
“왕녀가 그렇게 걱정돼?”
“착각하지 마. 왕녀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왕녀랑 너 때문에 벌어질 일을 피하려고 묻는 거야.”
스카이라는 오래 시달려 염증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거짓 한 점 없는 그의 발언에 렉시우스는 무심코 소리 내 웃어 버렸다.
“너한테 도움이 될 일이야. 반대로 데본시아에겐 상당히 귀찮은 일이 될 거고.”
“대체 무슨 짓을 할 생각인 건데?”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다야. 더는 못 가르쳐 줘. 설명하기 귀찮아.”
그의 말에 스카이라는 불쾌한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하지만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렉시우스의 완고한 기색을 읽었는지, 이 이상의 추궁은 시간 낭비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스카이라가 떠나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 애리얼이 1층으로 내려왔다.
렉시우스는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애리얼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살짝 굳었다.
“안녕, 선배…….”
말끝을 늘이는 건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렉시우스는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몸이 안 좋아?”
“아니, 괜찮아. 그냥 약간 후유증이 있는 것 같아.”
“부축해 줄까?”
그가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애리얼은 도리질을 하며 거부했다.
“괜찮아.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러냐.”
렉시우스는 내밀었던 손을 시큰둥하게 거뒀다. 그녀의 태도에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미세한 거리감이 느껴져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슴속이 쿡쿡 쑤셔 왔다.
‘뭐가 문제라서 이러는 거지?’
불안과 의문이 그를 세차게 감쌌다. 그녀에게 물어도 얼버무릴 게 뻔해서 그냥 입을 닫았으나, 갇힌 의문은 머리와 가슴속에서 자꾸만 부풀었다.
혹시 이대로 멀어지려는 건 아닐까.
그런 가정을 하자마자 그의 불안이 극을 달렸다. 굳은 얼굴로 기숙사 밖으로 향하면서 렉시우스는 줄곧 애리얼에 대해 고민을 했다. 만약 그녀가 이대로 말없이 도망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위험한 상상이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설마 딴 놈한테 갈 생각인 건 아니겠지?’
그저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을 뿐인데 온몸의 피가 끓었다. 그의 뇌리로 스카이라, 데본시아, 레이신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갔다. 그 밖에도 그녀의 곁을 스쳤던 남자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절로 주먹이 쥐어지고 살의가 불탔다. 애리얼의 주변에 있는 모든 남자를 형체도 없이 짓뭉개고 싶었다.
따뜻한 애정에서 어떻게 이런 감정이 발발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이다지도 폭력적일 수 있는지.
렉시우스는 고뇌하는 눈빛으로 허공을 보며 다리를 움직였다.
옆에 있는 애리얼을 당장이라도 어깨에 둘러메고서 자신만이 아는 곳에다 데려다 두고 싶은, 이 충동적인 욕구가 잦아들길 바라며 인내를 끌어모았다.
그렇게 둘은 각자의 이유로 줄곧 대화도 없이 걷다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애리얼은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 정리했다.
우선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솔렘의 연회와 그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오늘 오후면 아리앨라가 돌아오니 최대한 기숙사 방에만 상주하며 연습에 매진할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호감도도 신경 써야 했다.
당장 렉시우스와 스카이라를 대하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페널티가 올 확률이 높으니 렉시우스와는 붙어 있어야 하지만, 거리감은 조금 두는 게 좋았다. 지금까지와 비슷하게 행동하되 말수를 줄이는 것으로. 호감도가 더 오르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스카이라야 어차피 얼굴 한번 보기 어렵고, 그쪽에서도 저를 피해 주니 괜찮았다.
문제는 레이신. 다만 이쪽은 공략보다는 솔렘의 시험을 통과하는 게 급선무인 상황이었다.
‘데본시아가 제일 껄끄럽긴 한데, 아직은 아카데미에 잘 보이지 않으니 괜찮겠지?’
어쩌면 후학기 내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애리얼은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십여 분 후, 그녀는 얼음물 속에 잠긴 듯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마력전의 실습을 위해 렉시우스가 편 결계 안에는 현재 그녀를 포함해 세 명의 사람이 삼각형을 이루며 서 있었다.
한 명은 렉시우스고 다른 하나는…….
“잘 부탁해, 애리얼.”
늘 그렇듯 훌륭한 미소를 지어 내는 데본시아의 화려한 얼굴이 아주 오랜만에 아카데미에 나타났다.
애리얼은 어색하게 묵례를 건넸다.
시선이 땅을 향한 순간, 과거의 목소리가 사이렌 소리처럼 그녀의 머리를 울리며 선명히 떠올랐다.
“조금 남았어.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나니까…… 기다려 줘. 애리얼.”
그랬던 그가 오늘, 멀쩡한 모습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설마 유예가 끝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