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손끝을 떨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이 지독한 기시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 기시감으로부터 공포가 발현되는 이유는 대체 무언가. 애리얼은 데본시아가 두려웠다. 그가 무엇을 저지를지 아는 것처럼, 그를 보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렉시우스는 사나운 눈빛으로 데본시아를 견제하다가 애리얼을 살폈다. 창백한 얼굴이 어딘가 크게 아파 보였다.
“너, 괜찮다더니…….”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좀 솔직하게……. 아니, 됐어. 힘들면 말해. 쉬게 해 줄 테니까.”
렉시우스가 답답한 듯 말을 쏟아 내다 멈췄다. 애리얼의 안색이 이틀 전 연회에서보다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도무지 캐묻고 다그칠 수가 없었다. 걱정은 치솟는데 물을 곳도 없어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을 쓰라리게 하던 의문은 해소되었다. 적어도 그녀의 상태가 나빠지고 태도가 변한 원인이 자신 때문은 아니라는 거.
‘내가 아니라 쟤 때문이지.’
날카롭게 치든 렉시우스의 금안이 데본시아를 흘겨보았다.
데본시아는 어느새 미소를 지운 무감정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입을 벙긋거리며 소리도 없이 말을 전했다.
네가 싫어.
그 뜻을 읽은 렉시우스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피식 실소가 터져야 할 말인데, 이상하게 위협적으로만 느껴져서 짜증이 났다.
‘왕녀가 벌써 일을 벌인 건가?’
아마도 그랬으리라.
상황이 짐작이 가니 이제야 굳었던 렉시우스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졌다. 데본시아의 적의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으나, 나쁘지 않은 쾌감이 일었다.
상이한 감정을 담은 두 얼굴이 나란히 애리얼을 향했다.
그녀는 병인에 가까운 낯빛이었다. 파르르 떨며 둘의 시선을 마주하자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당연히 실습도 삐거덕거렸다.
애리얼은 끝내 수업을 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돌아갔다.
데본시아로 인해 불안했으며, 그와 계속해서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렉시우스도 신경 쓰였다. 조만간 둘이 제대로 싸울 것 같았다. 물론 둘의 성격상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으나, 둘 사이의 분위기는 그에 준했다.
그래서 애리얼은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불편하고 불안해서 저 둘과 있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무거운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바깥에서는 신경전을 벌이며 기어코 문 앞까지 따라온 둘의 소리가 들렸다.
“야, 그렇게 무작정 틀어박히면 어떡하냐. 진찰이라도 받고 들어가.”
“괜찮아? 아픈 거면 내가 봐 줄게.”
“네가 뭔데 봐 줘. 두 달이나 잠적하더니, 그동안 위선이라도 배워 왔어?”
“위선도 부족해서 스토킹에 심취한 너만 할까.”
“그건 네가 먼저 하던 짓 아니냐?”
둘은 애리얼을 살살 달래다가도 서로 실랑이를 벌였다. 이따금 열어 달라는 노크 소리가 섞이기도 했다.
애리얼은 물론이고 카논까지 숨을 죽이며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황태자와 대공자가 공녀의 방 앞에서 저렇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니. 그나마 예의상 문을 따고 들어올 일은 없다는 게 안심거리였다.
“전 괜찮아요! 그러니 두 분도 그만 들어가 보세요!”
애리얼이 큰 소리로 간절하게 외쳤다.
문밖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 상태로 침묵이 오래갔다.
애리얼의 눈이 초조하게 문과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아리앨라가 오기까지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었다. 다만 저 둘이 계속 죽치고 있을 가능성도 컸으니 초조하기만 했다.
“황태자 전하, 대공자 저하…… 듣고 계세요?”
그녀가 다시금 둘을 불렀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네. 나중에 봐, 애리얼. 기다릴게.”
긴 침묵 끝에 먼저 대답한 것은 데본시아였다. 그의 멀어지는 발소리가 천천히 울리다 이윽고 사라졌다.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어디 안 좋아져도 부르고.”
렉시우스 역시 당부의 말을 남기고는 열리지 않는 문 앞을 떠났다.
애리얼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며 움츠렸던 몸을 늘어트렸다.
“수업을…… 시험만 나가고, 나머지는 빼야겠어.”
그녀가 지친 듯 침대로 무너져 누우며 말했다.
카논은 잠시 놀란 얼굴을 했으나, 방금 전까지의 일을 떠올리고는 곧 수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의라 해도 높은 계급의 인물이 저렇게 찾아오면 겁을 집어먹는 게 당연했다. 황태자와 대공자의 의도에 완전하게 선의만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고.
“당분간은 방에서만 지내실 거죠?”
“……응.”
카논의 물음에 애리얼은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괜찮으실 거예요.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카논이 애리얼을 다독거렸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애리얼은 유일하게 순수한 선의로만 가득한 그녀의 다정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고마워. 카논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게 뭐 별거라고요. 돈도 다 받으면서 하는 일인걸요.”
“그래도.”
애리얼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앉았다. 늘 같은 카논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
정오가 지나자마자 아리앨라가 찾아왔다. 그녀는 저번처럼 등에 검은색 케이스를 메고 있었다.
“아리앨라, 그건…….”
“애리얼의 마력과 적성에 맞춰 특별히 준비한 총입니다. 무하 공작께서 주신 마도구에 안전장치를 추가한 거예요. 사실은 맞춤 제작을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아무튼 마음에 드실 거예요. 전에 쓰던 것보다 쓰기도 편할 테고요.”
아리앨라는 테이블에다 케이스를 올려놓고서 가져온 마도구를 보여 주었다. 총신은 검은색이고 개머리판은 백색인, 매끈히 잘빠진 외관의 저격 총.
“어려운 수업을 잘 따라와 준 보답이에요. 받아 주세요.”
“그…… 감사합니다!”
애리얼은 큰 고민 없이 총을 받기로 했다.
공격술용 마도구는 방어술용 마도구보다 마력과 적성에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았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드는 게 시험에서도 유리했다.
게다가 이 정도의 무기는 다른 데서 구할 수 없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총을 거절하지 않자, 아리앨라는 기쁜 듯 활짝 웃었다.
“한번 잡아 보세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케이스에 고이 모셔진 총을 꺼내 들었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내친김에 슬쩍 마력을 흘려 보았다. 총은 조금도 흘리지 않고 그녀의 마력을 흡수했다.
안정감이 이전 총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몸에 딱 맞게 제작한 느낌. 쏘면 조절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파괴력을 재현해 낼 듯했다. 압도적인 공명감이었다. 적응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 정도면 시험에서도 잘 써먹을 수 있겠다.’
애리얼은 미소 띤 얼굴로 총을 살폈다.
모드를 바꾸는 다이얼과 반동을 흡수하는 보조 장치는 이전과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총구 끝에 가로로 네모난 장치가 달려 있다는 거였다.
무슨 장치일까.
“총구에 달린 이 네모난 건 뭔가요?”
“마력 조절 장치예요. 애리얼의 마력 순도가 많이 높아져서 파괴력을 조절하기 위해서 달았어요.”
“제 마력이 조절할 만큼 강한 건 아닐 것 같은데, 그 정도인가요?”
“자신을 과소평가하시네요. 애리얼은 강해요. 균형이 너무 틀어져 있긴 하지만요.”
아리앨라의 설명에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방어술도 못 쓰는데, 자신의 파괴력에 휩쓸릴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브레이슬릿의 방어술이 있다지만, 조절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자, 그럼 새로 얻은 무기를 테스트할 시간이네요!”
아리앨라가 멋진 구경거리를 앞둔 사람처럼 발랄하게 말했다.
***
벌써 열흘째, 애리얼이 기숙사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렉시우스는 매일 애리얼을 찾아갔으나 그녀와 대면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방에만 콕 틀어박힌 애리얼은 몸이 별로라거나 기운이 없다는 소리만 반복하며 그를 피했다. 그가 의사를 데려오겠다고 하면 그 정도는 아니라며 둘러댔다.
이쯤 되면 속아 주는 것도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것뿐이야. 정말 아무 일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수업 가도 돼, 선배.”
“너도 없는데 내가 뭐 하러 수업을 들어.”
노골적인 대답에 애리얼이 말을 잃었다. 그는 이때다 싶어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낙제하고 싶은 거 아니면 나와.”
“학기말 시험만 안 망치면 낙제 안 하잖아.”
이번에는 렉시우스가 말을 잃었다.
아카데미는 수업을 일부 듣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을 능력으로 판단했다. 수업 일수를 며칠 빠지든 학기말 시험만 잘 치르면 점수로 인정해 줬다. 그렇다고 출석 일수를 아예 안 보는 것은 아니다. 점수가 조금 모자라도 개근했다면 낙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수업을 빼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매우 소수가 취하는 방식이며, 실력에 자신 있어 하는 제1 기숙사의 학생들이 자주 취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애리얼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렉시우스, 데본시아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 렉시우스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대놓고 말하지만 않았을 뿐 저를 만나기 싫어 방 안에 틀어박힌 게 뻔히 보이는데,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솔직히 상처받았다.
“같이 가기 싫은 거 알겠어. 알겠으니까, 얼굴만 잠깐 보자.”
“…….”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그의 묵직한 저음이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애리얼은 그런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작은 인기척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문이 열렸다.
잠옷 같은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친 애리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갈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차림이었다.
그나마 아파 보이지는 않는 게 다행인가.
렉시우스의 눈이 오랜만에 보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따가운 시선에 그녀가 바닥을 보던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담았다. 열흘 만의 만남이었다.
“선배?”
그녀의 입술이 오물거리며 그를 부른 순간, 그는 상체를 숙이며 팔을 뻗었다. 애리얼의 어깨를 감싸고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뺨에 그녀의 머리칼이 닿았다. 부드럽고 매끈하고, 입욕제의 향이 풍기는…… 꿈에마저 나왔던 감촉.
“왜 이렇게 도망가.”
“…….”
“피하지 마. 네가 피하면 자꾸 불안해져.”
애리얼을 꽉 껴안고서, 그는 제 약점을 드러냈다. 절절하게 내뱉는 음성이 그녀를 흔들었다.
그에게 감싸여 안긴 애리얼은 침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감정이라는 파도에 이토록 휩쓸리는 그가 안타깝고, 그의 마음을 승낙도 거절도 하지 못해 미안했다.
그녀는 차마 마주 안아 주지도 못하는 팔을 힘없이 늘어트리고서 입을 움직였다.
“미안해.”
애리얼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비수에 찔린 듯이 그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크게 상처받을 말이 아닌데도, 그의 마음에는 상처가 났다. 고작 ‘미안해’라는 말이 어쩌면 이토록이나 서운할까.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달래는 데에 그치는 소리 같았다.
렉시우스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허탈하게 웃었다.
“너도 참 잔인하네.”
그의 팔이 맥없이 풀렸다. 다만 숙인 상체는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답변 잘 들었어.”
“…….”
“그래도 나는 포기 안 하니까, 나한테 잡히기 싫으면 계속 도망쳐야 할 거야.”
나직하게 경고를 내뱉은 그가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쓴웃음을 지은 그의 얼굴이 한동안 애리얼을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에서 애정과 집착의 경계에 선 감정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