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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16)화 (116/264)

그때 무엇을 말해야 정답이었을까.

렉시우스의 호감도는 오르지 않았고, 그의 개인 루트에도 진입하지 않았으니, 애리얼의 대답은 정답에 가까웠다. 어디까지나 공략에 한해서는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답을 고른 것치곤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렉시우스가 그토록 상처받은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일까. 어울리지 않게 눈썹을 찌푸리며 허탈한 미소를 짓던 그 얼굴이 계속 눈에 어른거렸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녀는 호감도나 페널티, 공략과 엔딩을 생각하며 움직여야 했다.

애리얼은 곧장 총을 쥐었다. 다이얼을 돌리고, 모드를 바꿔서 들어 보고. 어떻게 해야 솔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레이신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모든 환경에 더는 정을 주지 않고 탈출할 수 있을까…….

안전핀을 꽂아 둔 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허공을 조준한 총구 끝에 인물의 윤곽이 맺혔다.

“아리앨라!”

애리얼이 다급히 총구를 바닥으로 향하며 외쳤다.

“위험했어요!”

“괜찮아요. 안전핀 채우고 있었잖아요?”

아리앨라가 능청스럽게 방긋 웃었다.

그녀의 등장에 애리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슬퍼하기는커녕 죄책감에 잠길 시간도 없었다. 망설이기에는 애리얼 앞에 놓인 상황이 순탄치 않았다.

곧 솔렘의 연회 날이 온다.

***

학기말 시험을 치르면 학기가 끝난다. 그때부터는 동계 방학이었다.

솔렘의 연회는 그 전에 있었다. 소수의 초대받은 계급만 참가하는 특별한 연회이기에 대부분의 학생은 이와 연이 없었다. 굳이 솔렘의 시험에 도전하려는 이도 없었다.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의 엘리트는 함부로 목숨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애리얼은 입장이 달랐다.

솔렘의 공작저도 아닌 공작령의 북쪽 입구로 향하는 길은 휑했다. 시험의 도전자가 가는 길.

렉시우스를 비롯한 고위 계급은 모두 초대를 받아 자리를 비웠다. 애리얼을 방해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애리얼은 햇빛조차 들지 않는 숲의 입구에 섰다. 등에는 검은색 케이스를 메고, 손에는 솔렘의 증표를 쥐었다.

그녀를 데려다준 차는 곧장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돌아갈 길도 머니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애리얼은 공작령 입구에 선 문지기에게 다가가 증표를 내밀었다. 문지기는 증표를 확인하고는 애리얼의 차림새를 훑었다.

황립 아카데미의 백색 교복 차림.

레이신이 신분 증명을 위해 애리얼더러 입고 오라던 복장이었다. 카논을 통해 전해 받은 서신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 복장을 보면 문지기가 몇 가지를 질문할 것이며,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된다고 했다.

“이름은?”

문지기는 백색 교복을 보고서도 애리얼에게 하대를 했다. 솔렘의 시험은 도전자의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았다. 시험의 공평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애리얼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애리얼 허클리.”

“증표는 누구에게서 받았지?”

“솔렘 공자 서하께 받았다.”

“어디서 만났지?”

“아카데미 교사 동 별관에서.”

“무얼 건네고 받았지?”

“근원 소멸기.”

“허클리 백작 공녀. 오늘의 첫 번째, 확인했다.”

문지기는 주머니에서 순록이 새겨진 은색 반지를 꺼내 애리얼에게 건넸다.

“이 반지는 뭐지?”

“위치 추적기다. 올해 시험은 솔렘 공작령을 통과해 공작저까지 도착하는 것으로, 시간제한은 연회가 끝나기 전까지. 그 반지는 네가 정식 참가자이며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그의 설명에 애리얼은 쾌재를 부를 뻔했다. 연회가 열리는 공작저에는 지금 레이신을 비롯한 공략 대상들이 몰려있다. 그러니 휴대폰의 위치 추적 기능을 사용하면 공작령의 지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소를 찾아가는 시험에서 애리얼이 가진 위치 추적 기능이 달린 휴대폰은 치트 키나 다름없었다. 이번 시험은 그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녀는 차분하게 감정을 다스리며 검지에다 반지를 끼웠다.

“추후 구조를 위해 현 복장을 유지하길 바라며, 이견이 없다면 통과하도록.”

문지기가 증표를 되돌려주며 말했다. 애리얼은 증표를 받고서 문지기를 통과해 몇 걸음 걸어 들어갔다.

빽빽하게 솟은 나무의 무성한 가지와 울창한 잎들이 하늘을 가렸다. 햇살이 들지 않는 숲은 밤처럼 어두웠다.

애리얼은 본격적으로 시험에 참여하기에 앞서 등 뒤의 케이스부터 땅에 내렸다. 총을 조립하면서 아까 문지기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오늘의 첫 번째……. 어제도 이 시험의 참가자가 왔었다는 소리겠지?’

그랬으면 유리했을까?

하지만 애리얼은 이보다 더 일찍 올 수는 없었다. 자신을 감시하다시피 하는 렉시우스가 자리를 비울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므로.

그녀는 조립을 끝내고 갈아입을 옷을 꺼내려다 멈칫거렸다.

‘추후 구조를 위해 현 복장을 유지하라고 했었지.’

그건 구해 줄 생각이 있다는 소리일 터. 그녀는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가져왔던 옷을 내려놓았다. 보험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구조될 수 있다면 교복을 입는 것이 낫다. 실습도 항상 교복 차림으로 했기에 아주 불편하지는 않았다.

애리얼은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낸 뒤 케이스를 끼워 목걸이의 형태로 만들었다. 백작저에 따로 부탁하여 만든 것이었다. 솔렘의 증표는 휴대폰 케이스의 뒤에 넣었다. 그러고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목표는 공작저로 가는 것.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솔렘 공작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저 멀리 레이신의 위치가 보였다. 애리얼은 화면에 떠오른 지도를 손가락으로 축소했다. 자신의 위치와 레이신의 위치가 동시에 표시되었다. 아주 멀지는 않아 보였다. 7km 정도 될 것 같다.

‘연회의 종료 시각은 열한 시. 레이신이 보낸 서신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어.’

휴대폰에 표시된 현재 시각은 여섯 시. 시간은 충분했다. 휴대폰이라는 압도적인 이점 덕분에 길을 잃을 걱정도 없었다.

주의해야 할 건 매년 사망자를 내는 마수의 존재다.

애리얼은 총을 쥐고서 주변을 경계하며 발을 내디뎠다.

바람도 불지 않는 삼나무 숲 어디에선가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솔렘의 연회에는 몸이 좋지 않은 황제를 제외한 제국의 모든 고위 계급이 참여했다. 솔렘에 초대장을 받아 온 왕족도 다수 있었다.

연회는 성대했고, 대화는 고상했다. 대부분 정치적 목적으로 연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참가하는 연회였다. 목적을 다하면 유희를 즐기듯 유유자적해지는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데본시아는 부재한 황제를 대신하여 솔렘 공작을 비롯한 각각의 주요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카우치에 앉은 렉시우스는 기품 있게 웃는 데본시아의 낯을 무표정한 얼굴로 쓱 훑었다. 최근에는 저 화려한 면상을 보기만 해도 심기가 뒤틀렸다. 그는 인상을 확 찡그리려다 참았다. 데본시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중에는 대공비도 있었다. 최소한의 표정 관리는 해야 귀찮은 잔소리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렉시우스는 한동안 황태자와 주변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딴 데서 뭐 하는 거지…….’

회의가 몰려왔다.

그는 애리얼과 함께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녀의 지척에 있고 싶었다. 이런 의미도 없이 의례상 참가하는 연회 따위는 지루하다 못해 염증이 났다. 혹여라도 제가 없는 사이 애리얼이 어딘가 나갔을까 봐 불안했다.

‘어디 위험한 데 가지는 않았겠지?’

그는 미간을 좁혔다. 그의 본능이 묘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가문의 일이야!”

해명하던 목소리가 번뜩 떠오른 순간 렉시우스의 호흡이 멎었다. 왜 갑자기 그게 떠올랐을까.

애리얼은 레이신을 만나러 갔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왜 그랬을까.’

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것들이 줄줄이 연상되며 떠올랐다.

연회, 솔렘의 연회, 그로 인해 자리를 비우는 고위 계급들, 빈 기숙사, 감시가 없는 애리얼, 연회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 그리고 레이신.

‘솔렘의 시험.’

날카로운 직감이 진실에 가까운 대답을 알리고 있었다.

지루해하던 그의 나른한 눈이 번뜩이며 날카로워졌다. 빠르게 굴러가는 눈동자가 홀의 곳곳을 훑었다.

없다. 레이신이 부재했다.

그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믿고 싶지 않은 이 짐작이 정말인지, 레이신을 찾아서 물어야만 했다.

렉시우스는 날랜 동작으로 홀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구석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스카이라가 조용히 움직여 렉시우스의 뒤를 밟았다.

***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애리얼은 돌연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정면에 있는 삼나무에 껍질이 떨어져 나가 움푹 팬 자리를 중심으로 피가 휘갈기듯 묻어 있었다. 튄 자국, 부딪쳐 터진 자국. 야생 동물에게 습격받아 생긴 것처럼 난잡했다.

‘……마수.’

매년 사상자를 내는 그 존재를 떠올리자 삽시에 긴장감이 치솟았다. 애리얼은 굳은 얼굴로 주변을 경계했다. 총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감이 전부 예민해졌다.

멀리서 바스락, 뚜둑, 가지며 낙엽이 꺾이고 밟히는 소리가 났다.

애리얼은 곧장 몸을 낮추고 나무 뒤에 숨어서 소리가 나는 곳을 조준했다.

소리가 가까워졌다. 불규칙하고 주춤거리는, 불안한 발소리. 마수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쏘, 쏘지 마세요.”

벌벌 떨리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란 나무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등장한 윤곽은 사람의 것이었다.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여성. 헝클어진 머리칼에 진흙이 잔뜩 묻은 옷을 입고서 애리얼에게로 다가왔다.

애리얼은 사람임을 확인하고 총구를 내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러자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와 애리얼의 옆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삼나무 기둥은 둘을 여유롭게 가려 주었다. 애리얼은 조용히 주변을 경계하다가 소음이나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물었다.

“혹시 다치거나 습격당한 사람이 이 근방에 있었나요?”

“아…… 네. 다른 사람이 당하는 걸 봤어요. 저는 땅을 파고 숨어 있었어서……. 그런데 그대로 있다간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아서…….”

여자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저…… 꼭 후원을 받아야 하거든요. 사생아라서…… 집에 갈 수도 없는데, 그런데도 너무 무서워서……. 그, 그것들이 사람을 사냥해서 먹는 게……! 생긴 건 꼭 사슴을 닮았는데…….”

“마수 말인가요?”

여자가 애리얼의 물음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저 말고도 여럿 있었는데…… 전부 헤어졌어요. 마수를 피해 다니느라고 조금도 못 나아가고, 밤이 되면 더 심해지는데 그게…….”

구구절절 말하던 여자의 입이 순간 딱 다물렸다.

귀를 찢을 듯한 기이한 하울링이 들렸다. 거대한 원통을 휘돌며 울리는 듯한 바람 소리에 칠판을 긁는 것 같은 날카로운 비명이 섞여 들렸다.

애리얼은 온몸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꼈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흉흉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믿을 수 없게도, 레이신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기분과 비슷했다. 정확히는 레이신의 마력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기분이었다.

기괴한 하울링이 온 숲을 흔든다.

애리얼은 마력이 강하게 흘러나오는 쪽으로 총구를 향했다.

정면으로 몇십 미터 거리. 거대한 윤곽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잔뜩 겁을 먹은 여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슬금슬금 기어서 자리를 피했다.

“움직이면 안…….”

애리얼은 그녀에게 경고하려다 숨을 멈췄다. 거대한 마력이 빠르게 덮쳐드는 느낌을 받고서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본능적인 대처였다.

타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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