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17)화 (117/264)

총성이 울리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고통스러워하는 마수의 소리가 아까 들었던 하울링보다 더 시끄럽게 들려왔다. 코앞이라고 해도 좋을 가까운 거리에서 뿔이 돋은 거대한 사슴의 형상이 절뚝거리며 물러났다.

애리얼을 향해 뻗었던 사슴의 앞발이 브레이슬릿의 방어술에 막혀 갈가리 찢겨 있었다. 총에 맞은 사슴의 가슴팍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썩은 물을 연상시키는 지독한 악취와 피비린내가 코를 아리게 했다.

애리얼은 바짝 굳은 채 다시 총구를 겨눴다. 타르와 같은 액체가 그녀의 발치를 적시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데본시아에게 감사한 순간이었다. 브레이슬릿이 없었다면 즉사였다.

애리얼이 반격을 준비하는 동안 여자는 머리를 감싸 쥐고서 엎드려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듯 무력한 모습이었다.

사슴을 닮은 마수가 이를 드러내며 포효했다. 기이하게 비틀린 괴성에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초식 동물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삐죽삐죽한 포식자의 이가 피에 절어 있었다.

타앙! 탕!

애리얼은 망설이지 않고 마수의 미간을 쏴 맞혔다. 검은 피를 뿜으며 마수의 머리가 우그러졌다.

끼에엑, 끼엑. 기괴한 울음을 내며 마수가 주춤거렸다.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는 안 죽는 건가?’

애리얼은 곧장 마력의 출력을 열 배로 높였다.

타앙! 탕! 탕!

연달아 세 발을 쏴 맞혔다. 마력탄이 터지며 큰 살덩어리가 툭 떨어졌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흘러내리고, 마수의 형체는 이제 사슴이라 부르기 어려울 만큼 뭉개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애리얼은 지독한 악취와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렸다.

어둑한 숲의 너머에서 소름 끼치는 하울링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총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걸 것이다.

얼른 도망쳐야 했다.

애리얼은 휴대폰으로 나아갈 방향을 확인한 뒤 여전히 땅에 엎어져 있는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세요!”

그러자 생존 본능만큼은 명확한 듯한 여자가 냉큼 손을 잡았다. 애리얼은 그대로 그녀를 데리고 달렸다.

하울링 소리가 둘을 쫓아왔다. 아무리 빠르게 달음박질을 쳐도 붙잡힐 것이다. 울창하고 어두운 숲은 끝날 기미가 없었고, 공작저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여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가쁜 숨을 내쉬며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나무뿌리가 드러나 들린 아래 큰 구덩이가 파인 곳이 보였다. 둘은 충분히 숨을 만한 알맞은 은신처.

함께 뛰던 둘은 동시에 같은 곳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무기가 없는 여자가 먼저 슬라이딩하듯 구덩이로 파고들었고, 애리얼은 총을 겨눈 채 뒷걸음질을 쳐서 들어갔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나무 사이로 숲의 빈 자리를 진동시키며 퍼져 나갔다. 수많은 발굽이 달리는 굉음도 이어졌다. 쿵쿵쿵쿵. 땅이 진동했다.

나무 아래 숨은 두 사람은 이어진 손을 꽉 맞잡았다. 공포에 잠식되어 온몸이 떨려 왔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토록 감사할 줄 몰랐다.

두 사람은 구덩이에서 십여 분을 숨죽여 있었다. 그동안 하울링 소리는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길 반복했다. 청력이 혹사당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시간이었다.

다행히 마수들은 둘의 위치를 찾지 못했다. 수많은 발굽이 만들어 낸 땅의 진동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고통스럽던 소음도 멀어졌다.

애리얼은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그러고서는 살아남은 동지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예요?”

“카렌……. 그쪽은요?”

“애리얼이요.”

“애리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전에 쏘지 않아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버리지 않아 주신 것도…… 감사해요.”

“네. 저와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요, 카렌.”

그렇게 말하자 카렌의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커졌다.

“저는 짐이 되기만 했을 뿐인데요.”

“아니에요. 이런 무서운 상황에서 혼자가 아니라서 안심했어요. 카렌이 있어서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 모를 거예요.”

애리얼이 카렌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가늘게 떨리는 손의 감촉에 카렌은 그녀가 진심임을 알아챘다.

“애리얼…….”

카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애리얼은 진흙투성이인 카렌의 손을 양손으로 덮어 감쌌다.

“우리 꼭 살아 나가요.”

“네!”

카렌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리얼은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하고서 카렌을 데리고 구덩이를 나왔다. 마수가 두려워 계속 숨어 있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공작저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카렌이 습격을 받았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던 마수 한 마리가 그녀 쪽으로 덮쳐들었다. 애리얼이 다급하게 총구를 겨누고 사격해 마수의 옆구리를 맞혔으나, 이미 카렌이 상처를 입은 후였다. 앞발굽에 찍힌 그녀의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크게 상처를 입은 마수가 시꺼먼 피를 흘리며 귀 아픈 울음을 내는 사이, 애리얼은 카렌을 부축했다. 한 발로 신음을 참으며 뛰는 카렌을 가까스로 엄폐 가능한 삼나무 뿌리 사이에 앉혔다.

애리얼은 카렌을 제 뒤에 놓고서 총의 다이얼을 돌렸다. 저격 총에서 기관총으로 바꾸어 정면을 조준하고 숨을 죽였다.

마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멀리서는 총성을 듣고서 다가오는 마수 무리의 하울링 소리가 들렸다.

진퇴양난의 상황.

“저를 버…… 버려요, 애리얼.”

나무 아래 널브러진 카렌이 힘없이 말했다.

“가서 도움을 불러 줘요…….”

“안 돼요. 카렌이 그때까지 버틸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제…….”

이미 포기를 했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희미하게 꺼져 갔다.

애리얼은 고뇌에 빠졌다. 다리도 성치 않은 카렌을 데리고 공작저로 가는 건 불가능했다. 애리얼마저 위험해질 터였다.

그렇지만 애리얼은 다친 카렌을 차마 두고 갈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하며 이름을 나눈 상대를 어떻게 두고 간단 말인가. 그녀를 두고 갔다간 인간으로서의 무언가가 큰 상처를 입게 될 것 같았다. 애리얼은 평생 죽어 가는 카렌의 악몽을 꿀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저는 카렌을 두고 가지 않아요.”

애리얼은 호흡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두두.

무리 동물이 달리는 듯한 소음이 울렸다. 수많은 탄환이 마수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애리얼은 마수의 형체가 뭉그러질 때까지 쏘아 댔다. 반동 흡수기가 충격을 막아 주었다. 덕분에 체력적 부담은 별로 없었다. 대신 마력이 쉴 새 없이 흘러나갔으나, 애리얼은 힘들지 않았다.

마력이 많아 총이 제격이라던 아리앨라의 판단은 정확했다.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뗐을 때, 마수는 슬라임처럼 형체가 무너져 있었다. 그런데도 여태 죽지 않고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설마 불멸인가?’

위험한 예감이 들었다. 아득한 공포가 애리얼을 덮쳤다.

이런 상황에서 몰려오는 무리를 과연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달려오는 발굽 소리가 땅을 쿵쿵 울렸다. 애리얼은 차가워진 손을 움직여 소리가 오는 방향을 겨눴다.

새까만 물결 같은 마수의 무리가 발을 구르며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절망감이 해일처럼 덮쳐오려는 순간이었다.

타앙! 탕! 타앙!

숲의 저편에서 울린 또 다른 소음에 무리가 방향을 바꾸어 달려갔다.

지금이 기회였다. 애리얼은 카렌을 부축해 일으켰다. 카렌이 이를 악물며 애리얼에게 기대어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실낱같은 가능성을 따라갔다.

***

우려하던 일이 최악의 최악의 형태로 터졌다.

렉시우스는 레이신의 멱살을 틀어쥐고서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지하에서 데본시아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 깊은 살의가 렉시우스의 눈에 깃들었다.

“이 미친 새끼가……. 뭣도 모르는 애를 사지로 처넣어?”

“그 애도 원한 거야.”

“웃기지 마. 그딴 걸 원했을 리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

“근원 소멸기까지 받아 처먹은 놈이 보상을 해 주기는커녕 뒤지라고 마수에게 던져 줘?”

“증표를 줬어.”

“뭐? 증표를 줘? 아주 대단한 일 하셨네.”

렉시우스가 피식 비웃으며 비아냥거리다가 분노해 목소리를 높였다.

“증표가 나간 것 때문에 공작이 시험의 난도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올렸는데도 그걸 입 닥치고 방관한 주제에!”

“그러면?”

“막았어야지. 아니면 최소한 걔한테 알려 주기라도 했어야지!”

“내가 왜 그런 친절을 보여야 하지?”

“뚫린 입이라고 이 새끼가!”

분노를 참지 못한 렉시우스가 레이신을 벽으로 던져 버렸다. 레이신의 몸이 가구를 넘어뜨리며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와장창, 우지끈, 우르르르.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난무했다.

털썩 주저앉은 레이신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의 힘없는 대응에 의문을 느낀 렉시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자신을 상대로라지만, 레이신이 이렇게 무력했던 예는 없었다. 늘 타격을 최소화하며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굳건한 게 레이신의 특징이었다. 이토록 무력한 그는 학기 초에 수면 부족으로 골골거릴 때나 보았다.

이유를 금세 짐작한 렉시우스가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내뱉었다.

“마력을 얼마나 처먹인 거야.”

“…….”

“설마 오늘까지 뜯기고 왔냐?”

“…….”

“마수에 기생당해서 뇌수까지 빨렸냐? 왜 대답이 없어?”

렉시우스의 조롱 섞인 물음에도 레이신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상대방에게 대항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반응해 주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듯 보였다.

‘하긴, 원래 저런 새끼였었지.’

극소수 정해진 인물을 제외하면 교류가 없는, 무시가 체화된 놈. 가문의 일에나 헌신적인 극단적인 영역 동물.

“어디로 보냈어.”

“……북부.”

“하필이면…….”

렉시우스가 으득 이를 갈았다.

응접실 밖에서 인기척을 죽인 채 둘의 대화를 엿듣던 스카이라 역시 이를 깨물었다.

공작령 중에서도 북부에 서식하는 마수는 특히나 포악하고 명줄이 질기기로 유명했다. 설상가상 무리를 지어 다니기까지 했으니, 정면에서 만나면 어지간히 훈련된 용병도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애리얼 같은 초보는…….

‘살 확률이 없어.’

스카이라는 굳다 못해 죽은 듯한 표정으로 복도를 뛰어나갔다.

***

땅이 헤집어지고 나무가 넘어졌다. 마수가 날뛴 자리는 태풍이 쓸고 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마수는 지능이 높았다. 무리 사냥을 하는 그것들은 기괴한 하울링으로 겁을 주고 경로를 제한하며 먹잇감을 막다른 길로 몰았다. 그리하여 흩어졌던 사람들은 나무가 무너져 길이 막힌 장소에 뭉치게 되었다.

애리얼과 카렌도 이곳에 있었다. 둘은 멀리 가지 못해 재생된 마수에게 쫓겨 이 장소로 들어오게 되었다.

가두리 양식장처럼 사람들이 갇힌 곳을 바라보며 마수 무리가 이를 드러냈다.

그래도 그나마 주춤거리며 다가오지 않는 것은 선두에 선 이들의 공격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쿵.

마수 하나가 악취와 함께 검은 피를 튀기며 쓰러졌다.

하지만 머지않아 재생되어 다시 달려들 것을 아는 공격대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선두에 선 애리얼은 긴장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피와 진흙이 묻은 교복은 더 이상 신분을 증명해 주지 못할 만큼 더러워져 있었다. 뺨이며 손등, 다리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마력 생명체인 마수의 직접적인 공격은 막아 냈지만, 그 외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쓰러지는 나무의 가지에 긁히거나 험한 땅에 걸려 무릎이 깨지는 건 브레이슬릿도 막을 수 없었다.

사상자는 이미 수십 명에 달했으며, 전부 젊고 어린 이들밖에 없었다. 솔렘의 후원을 바라고 참혹한 현장에 뛰어든 가련한 도전자들. 마수의 악취에 섞여 짙은 피비린내가 풍기는 현장에 남은 생존자들이 원형으로 뭉쳐 있었다. 저마다 죽음을 직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절하며 절망적이다.

극심하게 부상한 남자가 뒤에서 꺽꺽 피를 토했다. 그러나 그를 돌봐 줄 사람은 없었다. 앞줄에 있는 이들은 마수를 상대하느라 바빴고, 뒷줄에 있는 이들은 그와 같이 대부분 치명상을 입고 물러난 이들이었다.

애리얼은 쉴 새 없이 마력탄을 날렸다.

마수들은 그녀가 쏘는 기관총의 위력에 조각나며 밀려났다가 재생하며 다시 달려들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한 명씩 공격대가 쓰러졌다. 그때마다 애리얼의 정신력도 조금씩 깎여 나갔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엄마, 보고 싶어. 엄마아…….”

심하게 다친 이들, 특히나 애리얼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흐느껴 울었다. 우는 소리에도 힘이 없어 처량했다. 가슴을 할퀴는 울음에 애리얼은 슬쩍 뒷줄을 돌아보았다. 언뜻 보이는 헝클어진 갈색 곱슬머리. 카렌이 심한 출혈로 기절해 있었다. 응급 처치를 해 주지 못하면 곧 죽을 것이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 몰랐다. 보고 싶지 않았다.

희망을 찾아 발을 내디딘 사람들이 마수의 덫에 걸려 하나둘 스러지는 걸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지경까지 온 것인가. 분명 이전 시험은 이렇게까지 가혹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산지옥 같은 건……!’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나아갔다.

솔렘 공작의 후원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이렇게 사람들을 온통 사지로 모는가. 이러고서도 뻔뻔하게 내년에도 시험을 치르겠지.

애리얼은 격한 분노를 느꼈다.

소문을 듣기만 하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달랐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해.’

끔찍한 상황에 정신이 무너지기 전에, 뭔가 방도를…….

애리얼의 눈에 총구에 달린 네모난 물체, 마력 조절 장치가 보였다. 이걸 제거하면 몸에 무리는 오겠지만, 마수를 쓸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일한 가능성이다.

애리얼은 떨리는 손으로 마력 조절 장치를 쥐었다.

“애리얼!”

그녀의 행동을 막듯 우렁찬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삼나무가 무너져 장벽이 된 뒤쪽에서 환한 금발을 가진 이가 나타났다. 나무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완벽한 타이밍의 구세주처럼, 밤이 내린 숲에서 태양과도 같은 존재감을 빛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이 벅차 떨렸다. 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이토록 반가울 수가!

애리얼은 글썽이는 눈으로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그를 불렀다.

“스카이라!”

지이이잉-

휴대폰이 진동했다. 무엇 때문에 울린 건지, 애리얼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를 보며 지었던 미소 그대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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