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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20)화 (120/264)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렉시우스가 욕설을 내뱉으며 고함을 질렀다.

폭발한 잔해를 헤치고 무너진 바닥을 헤집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애리얼은 없었다.

대신에 역겹기만 한 마수가 달려들고 있었다.

렉시우스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참지 않고 마수를 향해 분출했다. 검을 뽑아 든 그는 돌진하는 마수의 앞다리부터 잘라 냈다. 중심이 무너진 마수가 앞으로 고꾸라지자 그대로 목을 베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단 두 번 만에 마수를 무력화시켰다.

과연 전장의 영웅다웠다.

하지만 이 마수들은 전쟁터의 적군과 달리 솔렘 공작령에 있는 한 죽지 않았다.

슬금슬금 재생되는 마수를 향해 그는 화풀이하듯 마력을 담은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마수의 재생력이 현격히 떨어졌다. 그래 봐야 결국 회복하는 걸 막을 수는 없고, 또 이것의 방해를 받겠지.

“이따위 것 때문에!”

그는 말의 끝에 또 욕설을 내질렀다.

솔렘의 문지기가 끼운 같잖은 반지 때문에 애리얼의 추적이 불가능했다. 이 넓은 땅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찾아 봐야 마주칠 가능성은 적었다. 달려드는 마수들을 처리하느라 찾는 속도는 점점 더뎌지기만 했다. 어디로 가야 이 개같은 짓을 한시라도 빨리 끝낼 수 있을까.

콰앙!

방향을 잃은 그에게 이정표와 같은 굉음이 울렸다.

솔렘의 공작저 쪽이었다.

렉시우스는 곧장 땅을 박차고 뛰었다. 폭발음에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이 불안감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검푸른 마력이 뿜어낸 분노의 불길에 철창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어진 담까지도 무너져 내렸다. 솔렘을 방어하던 결계마저도 불길이 내뿜은 여파에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그 파괴력만큼이나 강한 반동에 애리얼은 뒤로 수 미터나 날아갔다. 그녀의 손에서 튕겨 나간 총이 저 멀리 떨어졌다.

“커헉, 컥!”

진흙으로 된 땅이었으나 충격이 컸다. 힘없이 나가떨어진 애리얼은 핏방울을 토해 냈다.

달구어진 공기 속 산산이 부서진 철창의 파편과 잔해가 후드득 쏟아졌다.

겨우겨우 눈을 뜨고 정신을 유지한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력을 방사하자 코피가 터져 나왔다. 큰 부상으로 신체에 과부하가 온 것이다.

파지직, 파직.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마력의 방사를 멈추지 않았다. 위협적인 파편들이 모두 타서 재로 화했다. 매캐한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폭발의 여파로 생긴 부산물들이 모두 추락해 잠잠해지자, 애리얼은 땅을 짚고 엎드렸다. 일어나야 했다. 일어나서 솔렘 공작저로 들어가야 했다. 팔에 힘을 주며 오른쪽 무릎부터 세웠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기절할 것 같았다.

그녀는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손톱 아래로 진흙이 파고들었다.

사지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흐릿해지길 반복했다. 그런 와중에도 환히 열린 솔렘의 입구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애리얼은 절뚝거리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강한 마력의 충격에 작은 마수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흩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당당히 나아갔다. 넓게 펼쳐진 정원, 웅장하기 그지없는 솔렘의 붉은 저택을 향해서 걸어갔다. 무너진 담을 넘어 들어섰다.

지이이잉-

애리얼이 공작저에 입성한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저벅저벅,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애리얼의 앞에 멀끔하게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매끈하게 땋은 금발이 밤하늘 아래 휘날렸다.

그녀는 길거리의 부랑자만도 못한 몰골로 그에게 다가갔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흐르는 코피도 닦지 못해 처참한 외견으로, 그의 앞에 섰다.

애리얼은 목에 걸린 휴대폰을 켜서 아이템 창을 눌렀다. 이 순간을 위해 아껴 놓은 것을 기계적으로 사용했다.

『‘호감도 피버 타임’을 ‘레이신 디 솔렘’에게 사용했습니다.

지금부터 세 시간 동안 그의 호감도가 오르기 쉬워집니다.』

발동 문구를 보고선 화면을 껐다. 그러고는 휴대폰 케이스 뒤에 끼워 놓은 솔렘의 증표를 꺼냈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이런 꼴을 당하고도 웃으며, 시험에 통과하게 되어 기쁘다는 대답을 해야 할까?

아니다.

애리얼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죽을 뻔한 위협을 당하고도 그런 말을 꺼낼 만큼 그녀는 이성적이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웃어 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알랑거릴 생각을 하자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애리얼은 가만히 침묵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신의 면상에다 증표를 던졌다. 그는 아무런 방어도 없이 날아온 증표에 그대로 맞았다.

“어떻게……. 어떻게! 욱, 웨엑…….”

애리얼은 분노해 외치다 역류한 피를 토했다. 시뻘건 핏물이 새하얀 정원 길을 적셨다.

마수에게 물린 상처가 벌어져 피가 쉼 없이 흘렀다. 그럼에도 그녀가 여태 서 있는 게 가능한 건 무척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공지도 없이 멋대로 난도를 올리고 문까지 잠가 도전자를 기만한 솔렘을 향한 분노, 노리개 취급하며 자신을 죽이려던 그 비열함을 향한 분노, 도전자를 향한 최소한의 존중을 보이기는커녕 잔혹하게 몰살하려던 작태에 대한 분노.

“네가! 너희들이! 감히 무슨 권리로!”

토혈이 잦아들자마자 애리얼은 사납게 소리쳤다.

“이렇게 비열하고 치졸하게 사람을 죽이고……! 네가 뭔데! 솔렘이 뭔데! 이까짓 시험이 뭔데!”

비명을 지르듯이 말하며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그녀의 씨근거리는 호흡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이런 건 사라져야 해. 사람의 목숨을 이토록 경시하고 기만하는 추잡한 짓은 한시라도 빨리 없어져야 해.”

“수백 년을 이어 온 전통이라고 해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레이신이 입을 열어 물었다.

그에 애리얼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답했다.

“전통? 이따위로 카드 뒤집듯 방식을 바꾸고 입맛대로 뜯어고칠 수 있는 게, 어떻게 전통일 수 있어?”

“우리 가문에선 이 시험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전쟁 영웅, 황실의 기사단장, 왕국의 대마법사. 황립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자에 버금가는 실력자를 배출하는 유일한 곳은 우리뿐이다. 그렇기에 매년 사망자가 있더라도 제국은 눈을 감는다.”

레이신은 제 아비를 모방하여 평소보다 근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심지어 노예, 구제가 절실한 평민, 귀족 중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생아나 몰락 가문의 자제, 어떤 사정을 가졌든 시험을 칠 수 있고, 통과만 하면 실력자로 인정해 후원하고 키워 준다. 마법사만 편식하는 무하나 신분제에 집착하여 호위조차 일정 신분 이상만 두는 샤펠은 보이지 않는 대단한 포용력이지.”

타 가문보다도 우월하다며 오만하게 내세우는 그 태도. 솔렘 공작이 그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던 그 말들.

“다만 그러려면 거름망이 되는 시험이 조금 가혹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이런…… 이따위 방식으로 매년 사람들을 죽여 왔다고?”

“그래야 가문의 위신이 선다. 전설 속의 보물처럼 얻기 힘들어야 그 값어치가 빛나는 것이니…….”

“위신이라고? 이 같잖은 시험으로 겨우 얻은 위신이라면 모래성보다도 못한 것일 게 분명하잖아! 이따위 것을 전통이라 내세우며 위신이 서느니 마느니 하는 가문은 한시라도 빨리 망하는 게 더 위신을 지키는 일일 거야!”

지이이잉-

휴대폰이 울렸다.

그러든 말든 애리얼은 계속 외쳤다.

“타인의 피를 빨아 세운 위신이 무슨 소용이 있어!”

지이이잉-

“남을 희생하여 얻은 위신 따위는 뿌리부터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풍길 뿐이야! 허상보다 못한 쓰레기 같은 거라고!”

지이이잉-

“다른 이를 희생이나 죽음에 내몬 건 명예가 되지 않아! 치욕이고 수치이고, 잔악성을 나타내는 증거일 뿐이야!”

지이이잉-

“남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하면서 위신이나 명예를 빛내려 해 봤자 추잡하기만…… 욱, 우웨엑.”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던 그녀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애리얼은 휘청거리며 사지를 떨었다. 정신이 끊겨 가고 있었다.

무너지려는 그녀를 레이신이 잡아 주었다.

애리얼은 고개를 떨군 채 못다 한 말을 가까스로 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가문의 전통이니 위신 때문에…… 타인을 희생시키지 마.”

지이이잉-

또 한 번 더 휴대폰이 울렸다.

“……동의한다.”

그녀의 긴 토로를 듣기만 하던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 순간에 애리얼의 시야는 완전히 암전되었다. 분노로 유지되던 정신력마저 꺼져 버렸다.

***

결계가 무너지며 마수가 침입했다.

공작저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솔렘 공작이 다시 결계를 쳤지만, 그 전에 침입한 괴수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저택의 외벽이 붕괴하고, 정원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황자와 솔렘 공자는 어딜 간 건지 자취를 감췄고, 노발대발 화가 난 대공자가 솔렘 공작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대공비조차 이성을 잃은 대공자를 말리지 못했다.

연회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처참히 풍비박산 났다.

몇 분이 지난 후 사라졌던 황태자가 피투성이의 공녀를 안고 왔을 때, 솔렘 공작은 상황이 일단락되었다고 멋대로 판단했다. 공녀를 보고서 창백해진 대공자의 낯과 황태자의 유례없는 분노를 겪기 전까지는.

***

쓰러진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느껴지는 감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찰나가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눈을 뜬 애리얼은 자신이 아주 빠르게 깨어났다고 생각했다.

애리얼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폭신한 촉감으로 보건대 죽지 않고 침대에 눕혀진 모양이었다. 아프지도 않은 걸 보아 하니, 마법으로 치료도 이미 끝낸 듯했다.

‘어떻게 된 거지? 솔렘 공작저로 옮겨졌나?’

가늘게 뜬 눈으로 살핀 주변은 어두웠다. 수면 등 하나를 제외하곤 불빛이 없었다. 그래도 사물을 분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가며 관찰한 공간은 왜인지 그녀에게 익숙했다.

백작저에 있는 그녀의 방이다.

“일어났냐?”

익숙한 음성이 시비를 걸듯 물었다. 그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 있는 것을, 애리얼은 느꼈다.

그녀는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의자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음영이 짙게 깔린 얼굴,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칼, 피로가 쌓인 듯 빛이 바랜 금색 눈. 그는 어딘지 굉장히 지쳐 보였다.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며칠 밤을 지새운 사람처럼, 걱정에 깎이고 마모된 행색이다.

“렉스 선배.”

애리얼이 그를 부르자, 그는 한숨을 쉬듯 길게 호흡했다.

“궁금한 게 많지? 나도 그래. 그러니까 우리 한번 느긋하게 대화해 볼까?”

느릿한 그 말투는 분명 비꼬는 투였다. 그녀가 일어나기를 벼르고 별렀다는 듯.

“질문해.”

“……내가 얼마 만에 일어난 거야?”

“네 생각엔 얼마나 걸린 거 같은데.”

“한…… 이틀?”

그가 코웃음을 쳤다.

“한 달 걸렸어.”

“한 달?”

“그래도 생일이 지나기 전에는 일어났네.”

그가 테이블의 탁상시계를 들어서 보더니 애리얼에게도 확인하라는 듯 내밀었다.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시각은 11시 45분. 반원 모양의 밤낮 표시기에는 초승달이 걸린 밤하늘이 떠 있었다.

“생일 축하해, 애리얼.”

렉시우스의 냉랭한 음성이 무미건조하게 그녀를 축하했다.

어떠한 선고처럼.

애리얼은 머리가 멍해졌다. 한 달이나 걸려서 깨어났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다른 게 더 신경 쓰였다.

생일. 그리고 특별 엔딩.

『*당신의 생일(1월/1일)에 일어납니다.』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똑딱똑딱.

시간이 흐른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그녀는 첫 번째 기회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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