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 그녀의 안의 무언가가 탁 풀리며 스러졌다. 상실감인지, 허탈함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이 파랑(波浪)처럼 불어닥쳤다.
이제 또다시 일 년을 더 있어야 한다. 공략에 쫓기면서, 공략 대상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렇게 또 일 년을…….
“피하지 마. 눈 떠.”
렉시우스의 차가운 음성에 애리얼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서늘한 눈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빛의 눈동자가 분노로 술렁거렸다. 불안에 내몰려 걱정을 거듭하다가 끝내 비틀려 버린 감정이었다.
“아직 물을 거 많은데, 벌써 그러면 안 되지.”
“물을 거…….”
“너도 더 있을 거 아냐. 질문해.”
그는 꽤 강압적인 태도로 질문을 요구했다. 대화를 하고 싶은 건지 시비를 걸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애리얼은 그의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서 물었다.
“그 사람들……. 숲에 있던 시험의 도전자들은?”
“결계 속에 있었던 녀석들은 살아 있어.”
스카이라가 무사히 지켜 준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크게 안도하고는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솔렘 공작저는? 난장판이 되었을 텐데…….”
“그것도 수습했어.”
“선배가 수습해 준 거야?”
“안타깝게도 아니야.”
“그럼 누가 했어?”
“황태자.”
역시.
애리얼은 예상한 답변을 듣고서 무표정하게 눈만 씀벅거렸다.
브레이슬릿 때문에 데본시아가 아니면 그녀에게 치료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날의 연회에 데본시아가 없었다면 지금 그녀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을 거다.
“잘나신 능력으로 아주 이성적으로 대처하셨지. 널 치료한 것도, 공작저의 일을 수습한 것도 전부 그놈 작품이야.”
렉시우스는 무척 분해 보였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그에게 빼앗겼다는 듯. 마치 데본시아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표현했다.
실제로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브레이슬릿만 아니었어도 애리얼을 치료하는 건 렉시우스였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 마도구만 없었어도 그가 부작용 없는 방어술을 애리얼에게 걸어 줬을 테니까. 아니면 아예 시험을 못 치게 막을 수도 있었고.
하지만 현실은 끔찍했다.
렉시우스는 악몽과도 같았던 그날을 떠올리자 가슴이 갑갑해졌다.
피투성이인 애리얼을 보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그런데 두 번이나 겪었다. 그토록 심하게 다친 그녀를 발견한 그는 차라리 죽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타인에게 그녀를 맡겨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증오스러웠다.
낯설게도 자기혐오에 빠진 렉시우스가 이를 깨물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애리얼은 조용히 그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 처분은 어떻게 되는 거야?”
“무모하게 날뛰었다는 자각은 있나 보지?”
모를 리가 있나. 애리얼은 그에게 동의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삼 대 공작가의 대문을 부수고 결계를 날리는 짓을 저질렀는데. 중형이 내려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날 거기서 죽었을 테니까.
렉시우스는 고개를 떨구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무척 답답해 보였다. 속에 고인 것을 토해 내는 듯한 호흡이 이어졌다. 성이 나는 걸 참는 것도 같았다.
다소 격해졌던 숨결이 잔잔히 가라앉았을 때 그가 물었다.
“왜 솔렘의 시험에 도전한 거야.”
이유가 궁금하다기보단 원망스럽다는 투였다.
애리얼은 무슨 대답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뭐라고 말해야 그가 납득할까.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늘 그럴듯한 해명과 변명을 생각하는 것도 참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애리얼은 괜찮은 변명거리를 찾지 못해 사과로 둘러댔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렉시우스가 인상을 구겼다.
“미안하면 좀 하지 말지.”
“…….”
“날 장애물처럼 여기고 피하더니, 죽으려고 공작저에 갔어? 싫은 새끼가 자꾸 들이대니까 차라리 죽고 싶었어?”
“아니야, 선배…….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왜! 지켜 달랄 땐 언제고 왜 피하다가 혼자 그따위로 다쳐서 와!”
겨우 진정했던 그가 도로 격해져 목소리를 높였다. 격앙된 호흡에 가슴팍이 들썩거렸다.
애리얼은 조용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공략 때문에 그런 거라고, 페널티 때문에 그 지경까지 다친 거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말주변도 그리 좋지 못한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안해, 선배.”
“제발 그 미안하다는 소리 좀 그만해!”
그가 발작하듯 고함을 쳤다. 도무지 감정이 진정되지 않는지, 마른세수하듯 연거푸 얼굴을 쓸어내리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다가 하, 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숙였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이마로 내려앉았다.
“나는, 너 죽는 줄 알았어.”
그는 한차례 소리를 지르더니 잔뜩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피투성이로 눈도 못 뜨는 널 보는데, 내가 죽을 거 같더라.”
그러더니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길게 한숨을 쉬고, 다시 격해지는 감정을 차분히 억누른다. 그렇게 해서 겨우 감정의 토로를 이어 갔다.
“전쟁에 나가서 시체고 뭐고 별걸 다 보고 살았는데. 그딴 거 이제 너무 익숙해서 아무 감흥도 없었는데. 네가 그 꼴로 다쳐 온 걸 보니까…….”
그의 입에서 나지막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애리얼은 아무 말도 더 얹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 떠오르는 말은 그것뿐인데, 렉시우스를 분노로 졸도시킬 게 아니라면 그걸 말하느니 입을 닫는 게 현명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천천히 숨을 고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렉시우스는 제 감정을 갈무리해야 했다. 안 그러면 애리얼을 다그치고 다그치다 아무 의미도 없이 혼자 폭발할 테니까.
“내가 뭐라고 떠들든 넌 결국 네 멋대로 굴겠지. 나 따위는 다 잊고, 또 죽을 것처럼 다치고……. 네가 또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생각으로 며칠을 지새웠어.”
흥분을 간신히 억누른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애리얼을 바라보는 두 눈은 맹렬하게 타올랐다.
애리얼은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가 끝내 아무 위로도 전하지 못한 채 다시 천장을 보았다.
그녀의 옆얼굴을 노려보던 렉시우스가 탁자에 놓인 호출 벨을 눌렀다.
바깥의 인기척이 방문 앞으로 다가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부르셨습니까, 저하.”
“카스트로, 대기 중인 황성 법관을 불러와라.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의 처분을 정했다.”
렉시우스는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그녀를 주시한 채 말했다.
처분이라는 말에 애리얼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냉랭한 표정의 그가 보였다.
“선배가 내 처분을 정하는 거였어?”
물어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불길한 낌새를 느낀 애리얼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다시 울렸다. 똑똑똑.
“솔렘 공작저의 일을 담당하여 백작저로 파견된 황성 법관, 알렉산드로 매드슨입니다. 솔렘 공작저의 북문을 파손하고 결계를 깨어 연회를 혼란케 하고 내빈을 위협한 혐의에 대하여,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에 대한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애리얼의 신원을 보장하는 추천인인 황태자의 대리인으로서 공녀의 처분을 선고한다. 어디까지나 예고된 시험이기에 공작령에서 무력을 휘두른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다만 공작저에서 벌인 일까지 눈감을 수는 없다. 솔렘 공작이 문을 봉쇄하는 실수를 했다고는 하나 공작저의 출입문을 파손하고 연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죄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렉시우스는 한껏 당황한 애리얼의 눈을 똑바로 보며 선고를 내렸다.
“따라서 공녀가 죄를 제대로 반성할 때까지 이곳에 구금한다.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을 것이다.”
***
“그 백작 공녀는?”
솔렘 공작이 창 앞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며 보좌관에게 물었다.
“구금 처분이라 합니다. 기간은 미정. 감시 역은 대공자 저하께서 직접 하신다고 합니다.”
“어지간히도 아끼시는군.”
공작은 고개를 숙이며 미간을 문질렀다. 골치가 아팠다. 대공자가 공녀를 이토록 싸고돌 줄이야. 아직 이쪽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요? 백작저에 시종 셋을 보내 두기는 했습니다만, 아직 출입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사나흘 정도 추이를 지켜보다가 귀환시켜라. 너무 빨리 돌아와도 보기 안 좋을 것이고 또 너무 오래 있어도 의도를 의심받기 좋으니 성의를 보이는 정도로만 해.”
“예.”
보좌관이 물러갔다.
공작은 떨리는 손으로 탁자에 놓인 술을 잔에 따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는 여전히 그날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하얀 벽돌 길에 남은 마수의 피 얼룩이 그의 속을 심란하게 했다. 공작은 유리잔에 담긴 독한 술을 망설임 없이 삼켰다. 취기가 훅 오르면서 살 떨리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험은 가문의 전통입니다. 저하께서 참견하실 일이…….”
솔렘 공작은 눈이 뒤집힌 대공자에 의해 강제로 멱살을 잡혀 끌어 올려졌다. 그 탓에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핏줄이 터진 대공자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공작을 노려보았다.
“학살하는 것이 솔렘의 전통이었나? 솔렘이 이 정도의 살인귀 집안인 줄은 내가 미처 몰랐군.”
“작년보다 올해 시험의 난도가 높았을 뿐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난도 같은 개소리를 지껄이지! 네놈은 도전자를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대공자가 소리를 질렀다. 솔렘 공작은 제 목을 죄어 오는 그의 악력에 기함하며 입을 벌렸다. 대공자는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체 솔렘의 무엇이 그를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피 맛에 이리 환장한 것들이 남부 차출은 거부하고, 집에서는 약자를 모아다가 마수를 풀어 쫓게 하고. 인간 사냥이 그리 재밌던가? 제 목숨은 아깝고?”
“…….”
“개국 공신이라는 가문이 이렇게 역겹고 추할 수가 있나!”
대공자의 폄하에 공작은 억울해졌다.
솔렘은 가문의 직계를 차출하지 않는 대신 남부 전쟁의 자금을 대고 있었다. 대공자를 차출한 대공가가 특이한 것일 뿐, 고위직은 대부분 자신의 직계를 전쟁에 내보내지 않았기에 크게 비난받을 일도 아니었다.
대공자는 솔렘이 피 맛에 환장했다고 표현했지만, 제국의 역사를 두고 따져도 솔렘은 온건한 쪽이었다.
솔렘은 이유 없이 희생을 내는 가문이 아니다. 사망자가 나올 만큼 시험이 어렵고 위험한 건, 보상이 크기에 합격자를 많이 내지 않으려고 한 데 불과했다. 아무렴 솔렘의 후원인데,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할 보상이 아니던가.
올해 시험이 예년보다 가혹했던 것도 증표를 가진 사람이 있어 그만큼 난도가 올라간 것뿐이었다. 그런데 인간 사냥이라니, 당치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한마디도 항의할 수 없었다. 기도가 짓눌려 컥컥 기침만 뱉었다.
“오늘 단 한 명이라도 죽는 자가 나오면 공작도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대공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공비께선 물러나 계십시오. 위험합니다.”
“이 무슨……. 당장 그만두세요!”
“물러나 계시라 했습니다.”
대공자의 발언에 기함한 대공비가 급히 달려와 그를 말렸으나 역부족이었다. 한 손에는 마수의 피로 칠갑이 된 검을 들고서 공작의 멱을 틀어쥔 대공자는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급히 마수를 몰아내고 부서진 결계를 다시 씌우느라 마력이 부족해진 공작은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난장판인 홀 안으로 황태자가 돌아왔다. 전장의 시체처럼 그을음과 피로 얼룩덜룩한 몰골의 소녀를 안고서.
방금까지 솔렘 공작의 멱살을 쥐고 흔들던 대공자가 일순 뻣뻣하게 굳었다. 핏기가 사라진 그는 공작을 패대기치고서 황태자에게 달려갔다. 대공자는 황태자의 품 안에서 기절해 있는 피투성이의 소녀를 보고서 손을 벌벌 떨었다.
전장의 수없는 총칼 앞에서도 태연하던 대공자가 겁에 질려 있다. 믿을 수 없게도, 저 소녀로 인해.
“살아 있는 거지?”
창백한 낯의 대공자가 황태자에게 물었다.
“안심해. 만약 애리얼이 죽었다면 공작이 여태 살아 있을 리는 없으니까.”
황태자의 서늘한 눈이 솔렘 공작을 향했다. 마침 추스르고 일어나던 공작은 그 눈빛을 마주하고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살의가 짙은 눈빛이었다.
저 소녀가 대체 누구이길래 대공자가 겁을 먹게 하고, 황태자가 진노하게 하며, 솔렘의 차기 후계자가 솔렘의 증표를 건네도록 만드는가.
‘내가 저들의 총애를 몰라보고 저 공녀를 죽여 처리하려고 했다니…….’
솔렘 공작은 아찔한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대로 고개까지 숙였다.
“허클리 백작 공녀는 증표를 지니고 솔렘의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솔렘은 앞으로 허클리 백작 공녀에게 영구적인 후원과 비호를 약속하는 바입니다.”
공작은 오래 굴러먹은 정계 인사답게 빠른 판단으로 말을 꺼냈다. 공녀에게 앞으로 충분한 보상을 할 터이니 황태자와 대공자가 솔렘을 적대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부탁이었다. 황태자의 위협에 굴종한 것이기도 했다. 굴욕적인 행태였다.
공녀를 향한 후원은 증표를 지니고서 공작저를 밟은 이에게 해 주어야 할 당연한 대우이기도 했으나, 그 과정이 황태자의 위협으로 이루어졌으니…….
오늘의 일은 두고두고 약점으로 쓰일 치부가 되리라. 공작은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솔렘은 이제 황태자의 편에 서야했다. 오늘의 굴종은 자존심과 같던 중립을 포기한, 일종의 아군 선언이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하하 웃었다.
“공작은 참으로 눈치가 좋군. 가증스럽고 비열하지만 아주 멍청하지는 않아.”
한 번 봐주겠다는 의미였다. 공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굴욕적이었으나 유례없이 적대적인 황태자의 태도로 보아, 더한 굴욕이 있더라도 그는 굽혀야 했다.
심각한 얼굴로 그날의 일을 되새기던 공작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작은 그 인기척을 느끼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버지.”
인기척의 주인이 공작을 불렀다.
썩은 물에서나 풍길 법한 악취가 나서 공작은 잠시 호흡을 참았다.
“어렵게 기른 것을 기어코 다 죽였느냐.”
“예.”
레이신이 긍정했다. 그의 손에 들린 근원 소멸기는 검은 피로 칠갑이 되어 있었다. 뚝뚝 핏물 떨어지는 소리가 공작의 집무실을 채웠다.
“기르는 데 자그마치 백 년이 걸렸는데, 죽이는 데는 고작 한 달이라니.”
공작이 한탄했다.
“제 마력만 있으면 다시 키우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러운 전통이라더니. 위신은 희생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더니……. 마력을 먹이는 것에 염증이 나 죽인 것이 아니냐? 남은 것도 없을진대 어찌 다시 키운단 말이냐?”
“유체(幼體)는 남겼습니다.”
“남겼다고……. 아직도 나와 거래할 것이 있는가 보군.”
“허클리 백작 공녀와 저를 이어 주십시오.”
당돌한 요구에 공작은 그제야 제 아들을 돌아보았다.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레이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공자가 종일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황태자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기도 하지.”
“상관없습니다.”
그는 단호했다.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허클리 공녀의 마력은 이번 시험으로 충분히 증명됐다. 숲을 날리고 마수 무리를 격퇴한 데다 공작저의 결계까지 날렸으니 어마어마한 인재이지. 어차피 솔렘의 영구적인 비호를 약속한 상태이기도 하고, 공녀를 미래의 공작 부인으로 맞는 것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그 정도의 마법사는 몹시 귀하니까.”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하지만 내가 허락한들, 될 일이 아니다.”
“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공작을 닮아 금빛을 띤 레이신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 눈이 공작의 속을 후벼 팠다. 평생 보아 왔던 아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이렇게 되면 말려도 소용없다. 레이신은 성체 마수를 절멸시킨 것처럼 제멋대로 할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있으면 한번 해 보거라. 대공자도 황태자도 제치고.”
‘……황자도 제치고.’
공작의 말끝에 레이신은 조용히 덧붙여 생각했다.
친구라고 있는 인연을 전부 적으로 돌릴 각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