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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22)화 (122/264)

애리얼은 자신의 방 안에 구금되었다. 그런 그녀를 렉시우스가 종일 감시하고 지켰다.

황태자의 대리인으로 애리얼의 처분을 결정한 그는 애리얼의 전용 간수가 되었다. 심지어 그는 그 사실을 매우 기꺼워하는 듯 보였다. 일정까지 모두 미루고 백작저에 머물렀다.

이제 애리얼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그를 거쳐야 했다. 공녀의 방으로 출입하는 건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의 검사를 받았다. 애리얼의 직속 하녀인 카논조차 그의 허락이 없이는 애리얼을 만날 수 없었다.

아직은 고작 일주일째지만, 과연 이 고립이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구금은 막연한 불안을 불러왔다.

“바깥은 어때?”

침대에 앉아 책을 보던 애리얼이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녀를 감시하며 소파에 앉아 있던 렉시우스가 창문으로 걸어가 커튼을 걷었다.

창밖으로 하얗게 눈이 쌓인 백작저의 정원이 보였다.

애리얼의 까만 눈동자가 희게 변한 조경수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렉시우스가 다시 커튼을 쳐 버렸다.

그 순간 반투명한 결계가 제 존재를 과시하듯 한 번 깜빡여 나타나더니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를 가두는 투명한 철창이었다.

애리얼은 아쉬움에 길게 한숨을 쉬었다.

“커튼은 계속 걷어 두면 안 돼? 어차피 창문으로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안 돼. 바깥 시선이 들어오잖아.”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러든가 말든가, 그는 막무가내였다.

밤낮의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바깥과 차단된 방 안에 조명만 밝다.

애리얼은 이제 렉시우스가 아니면 바깥 날씨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감시와 통제가 수반된 생활은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바깥과 유리된 그녀는 휴대폰조차 없어 최소한의 정보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말도 안 하고 멋대로 무모한 짓을 벌인 건 반성하고 있어. 함부로 솔렘 공작가의 결계를 부순 것도 크게 반성해.”

“그래. 그래서 뭐?”

“바로 자유를 달라고는 안 해. 잠시 산책만 하면 안 될까?”

이렇게 부탁하면 그는 늘 같은 말만 꺼냈다.

“이제 솔렘 공자와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러지 않으면 이 구금을 끝내지 않겠다는 듯.

그러면 애리얼은 늘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레이신의 하트가 세 개 이상이라면 그가 요구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하지만 휴대폰이 없어서 레이신의 하트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거짓으로 답하자니, 그런 건 귀신같이 알아채는 인간이 아니던가.

애리얼이 여느 때처럼 대답이 없자 렉시우스는 잔뜩 신경질이 나서 중얼거렸다.

“그놈이랑 도대체 무슨 거래를 주고받은 거야.”

“가문의…….”

“가문의, 뭐? 약혼이라도 했어?”

“아니.”

“그런데 왜 걔를 만나야겠다는 거야. 넌 그 지경으로 다치고도 그놈 얼굴을 볼 생각이 들어? 그놈을 좋아하기라도 해?”

“아니.”

단호히 부정하자 그는 한결 마음이 풀린 듯 누그러졌다. 그러다가도 이윽고 미간을 좁히며 혼잣말을 했다.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걔를 안 만나겠다고는 못 하는 거야.”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지만, 애리얼은 못 들은 체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렉시우스는 이불을 말고 웅크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불을 껐다.

“잘 자라.”

그는 상냥한 말투는 아니어도 늘 잘 자라며 인사를 해 줬다. 그러고는 언제나 자신만이 풀 수 있는 잠금 마법으로 문을 봉하고 나갔다.

철컥.

문이 잠기고, 혼자가 된 애리얼은 정보를 얻기 위한 방도를 궁리했다.

‘뭘 하든 일단 휴대폰이 있어야 해.’

***

“선배, 나 목욕하고 싶어.”

애리얼은 아침을 먹고 늘 소화하던 일과를 요구했다. 평소처럼 말했을 뿐인데, 렉시우스는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지 눈을 가늘게 떴다.

애리얼은 기죽지 않고 그와 눈을 맞췄다.

“이상한 짓 안 해. 어차피 선배가 다 검사하잖아. 누가 오는지, 뭘 들고 오는지.”

“…….”

“의심 그만하고 그냥 좀 들어줘.”

“널 믿었다가 당한 전례가 있어서, 신뢰가 안 가는데.”

그는 호출 벨이 놓인 탁자를 짚고서 애리얼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추궁하는 눈빛이 매서웠다. 정말 질릴 정도로 눈치가 좋은 인간이다.

애리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선배가 나 목욕시켜 줄 것도 아니잖아.”

“혼자 해.”

“혼자 하는 거 힘들어. 난 체력도 없고 현기증도 자주 나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평소에도 카논이 도와줬기에 애리얼은 괜히 더 엄살을 피우며 당당히 요구했다. 그러자 렉시우스가 싱긋 웃으며 받아쳤다.

“내가 해 줘?”

말이 끝나자마자 애리얼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굳혔다. 설마하니 진심일까 싶어 창백한 안색으로 시선까지 피했다.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반응을 비치자 그는 은근히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농담도 못 하겠네.”

렉시우스는 못마땅한 듯 툴툴거리더니 긴 손가락을 뻗어 호출 벨을 꾹 눌렀다. 그 즉시 그의 보좌관이 와 문을 두드렸다.

“부르셨습니까, 저하.”

“공녀가 입욕할 예정이다. 전담 하녀를 올려 보내.”

“예.”

그러고 나서 몇 분 후, 카논이 목욕용품이 든 바구니를 들고서 렉시우스의 보좌관과 함께 나타났다. 렉시우스는 방문 앞에서 둘을 맞았다.

“검사 결과 이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의심스러운 물건은 없었습니다.”

보좌관은 ‘이것’이라고 지칭한 것을 대공자에게 내밀며 보고를 마쳤다.

렉시우스는 보좌관이 내민 희고 네모난 물체를 받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애리얼이 들고 다니며 종종 들여다보던 물건이었다. 그녀는 늘 무언가를 읽듯이 검은 부분에다 시선을 고정하고 눈동자를 굴렸었다.

도대체 뭘까. 그는 미지의 물건을 이곳저곳 건드려 보았다. 그러나 물건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도구 같긴 한데 용도를 알 수 없었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부분에 뭔가 떠올라 정보를 보여 줄 것 같다는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이게 뭐지?”

렉시우스가 카논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가씨가 가지고 다니시는 부적 같은 물건입니다. 저도 정확한 기능은 모릅니다. 다만 이게 없으면 아가씨께서 매우 불안해하십니다. 그래서 부디 이것만은 아가씨께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불안해한다고?”

“네.”

카논의 설명을 들은 그는 휴대폰을 들고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다가 문을 열었다.

“들어가.”

카논은 짧게 묵례한 뒤 바구니를 안은 채 곧장 욕실로 향했다. 대공자에게서 휴대폰을 돌려받지 못했으나 감히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목욕의 준비만 했다.

욕조에 물이 반쯤 찼을 때 애리얼이 욕실로 들어왔다.

“아직 입욕하시려면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하는데…….”

“그래도 카논이랑 있고 싶어서.”

욕실의 의자에 앉은 애리얼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에 카논은 빼앗긴 휴대폰이 생각나 마음이 울적해졌다.

저번 입욕 때, 애리얼은 카논에게 자신이 늘 소지하던 흰 마도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구금 중 그녀가 한 유일한 부탁이었다. 그런데 하필 대공자에게 그 물건을 빼앗겨 부탁을 지키지 못하다니.

카논은 나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애리얼에게 다가갔다. 바깥의 대공자가 듣지 못하도록 욕조의 물을 크게 틀고 귓속말을 전했다.

“아가씨께서 부탁하셨던 흰색의 네모난 물건 말이에요.”

“응. 그거, 어머니께서 가지고 계신다며?”

“네. 솔렘의 연회에 계셨던 무하 공작 서하께서 총과 함께 회수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후 공작 서하께서 아가씨의 개인 물건이라며 백작님께 보내셨는데, 두 분을 제외하면 그 물건을 본 이는 없는 것으로 알아요.”

“그랬구나. 자세한 사정을 알아 와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저는…… 아가씨의 부탁을 지키지 못했어요. 감사를 받아선 안 됩니다.”

카논은 흔치 않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애리얼은 걱정스럽게 그녀를 살피다 조심히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백작님께 아가씨의 말씀을 전해 드렸더니 흔쾌히 물건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뒤 저는 아가씨의 입욕 시간에 맞추어 그 물건을 목욕용품과 함께 챙겨 가지고 왔습니다. 제대로 검사를 거친 다음 위험 물건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아 내 통과가 허락되었습니다. 하지만…….”

“대공자 저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구나.”

“네. 심지어 대공자 저하께서 직접 압수해 가셨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냐. 내가 숨기지 말고 가져오라고 했는걸. 수고 많았어. 고마워, 카논.”

“아녜요…….”

카논은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운 빠진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 애리얼은 괜스레 더 밝게 굴었다. 안 하던 농담까지 던지며 목욕하는 내내 쾌활한 언행을 보였다.

소심한 주인의 눈물 나는 노력을 읽었는지, 카논은 금세 기운을 차려 원래의 무심한 성격으로 돌아왔다. 애리얼의 농담이 재미없다는 칼같은 평가도 내렸다.

그렇게 짧은 휴식과도 같은 입욕 시간이 끝나고, 카논이 떠나자 애리얼은 다시 무표정해졌다.

노곤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녀를 렉시우스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좋다고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던데.”

“응. 목욕하는 거 좋았어.”

“근데 지금은 왜 이래?”

“뭐가?”

애리얼은 모로 누운 채 무심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상체를 낮추며 접근했다. 애리얼의 머리 위를 짚고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울상이냐고.”

“울상까지는 안 했어.”

갑자기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애리얼은 소심하게 목소리를 줄였다.

렉시우스는 언짢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아까 욕실에선 웃음소리가 아주 끊이질 않던데.”

“그냥 좀 재밌는 일이 있어서 그래.”

“근데 지금은 아주 울적하네. 나랑 있는 건 재미없나 봐?”

“…….”

“내가 그렇게 불편하냐?”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는…….”

애리얼은 말끝을 흐림으로써 그의 물음을 에둘러 긍정했다.

렉시우스는 이미 좋지 않았던 표정을 더 험악하게 구겼다. 그녀에게서 그런 답변이 돌아올 줄 예상했음에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렉시우스는 그녀의 감시자가 된 지금의 제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오직 그녀만 바라보고 신경 쓸 수 있어서. 구금이라는 사실만 제하면 꽤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그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애리얼도 자신과 같이 이 상황을 조금은 기꺼워하길 바랐다. 오로지 서로만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구금당한 입장. 좋게 느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에게로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우고서 물러났다. 그제야 애리얼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옅어졌다.

그걸 또 귀신같이 읽고서 서운해진 렉시우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뭘 해야 애리얼이 그 하녀와 있을 때처럼 웃고 떠들어 줄까. 그는 고민하다가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을 비장의 무기처럼 꺼냈다.

그 하녀가 애리얼에게 주고 싶다며 챙겨 온 것. 없으면 불안해한다던 그녀의 부적.

휴대폰을 눈에 담은 애리얼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즉각적인 반응에 렉시우스는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이거, 돌려받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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