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23)화 (123/264)

그가 애리얼의 눈앞에다 대고 휴대폰을 흔들었다. 약 올리는 듯, 그녀를 도발하는 동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리얼은 화가 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나올 걸 알았다. 그래서 카논에게도 휴대폰을 숨기지 말고 가져오라 한 것이었다. 어차피 숨겨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차라리 대놓고 그에게 넘긴 다음 그의 비위를 맞춰서 가져오는 게 나았다.

“어떻게 하면 돌려줄 거야?”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구네.”

“선배가 그걸 압수해 갔다는 거, 아까 내 전담 하녀한테서 들었거든. 그때부터 왠지 선배가 이렇게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예상했어.”

“내가 그냥 돌려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별로 그런 생각은 안 들었어. 그게 날 다루는 데 좋은 패라는 걸, 선배도 알았을 거 같아서.”

“다루다니……. 애리얼, 말 좀 가려서 해. 괜히 이상한 걸 시키고 싶어지니까.”

묘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애리얼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밀폐된 공간 안에 그와 단둘이 있었다. 구금이라는 특수한 상황인 데다 황궁에서 보낸 감시관도 있으니 큰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다.

“뭘 겁먹고 있어. 그냥 그런 마음이 든다는 거지, 실제로 할 생각은 없어.”

렉시우스가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은 까만 눈동자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경계심이 어린 시선이 그에게 낭패감을 선사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렉시우스는 고민에 빠진 듯 손가락 사이에 끼운 휴대폰을 톡톡 두드렸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내가 묻고 선배가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애리얼이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렉시우스는 잠시 침묵하다 그녀의 반문에 대답했다.

“난 뭐든 너랑 하면 그럭저럭 다 좋을 거 같거든. 그래서 너한테 선택권을 주는 거야.”

“…….”

“그러니까 뭐 할래.”

“……산책.”

“그거면 돼?”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의 비위를 맞춰 휴대폰을 받아 내는 게 목적이니, 할 거라면 단순한 게 좋았다. 너무 집 안에만 있었더니 나가고 싶기도 하고.

“그럼 준비하고 나와.”

그는 휴대폰을 들고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먼저 방을 나갔다.

애리얼은 두꺼운 겨울용 원피스를 꺼내 입고 양털 카디건을 걸친 후 방문을 열었다. 렉시우스는 벽면에 기대서 있다가 애리얼을 보고 다가왔다. 그는 얇은 셔츠 위에 코트만 하나 걸친 차림이었다. 눈까지 내린 한겨울에 외출하기에는 다소 가벼운 복장이었다.

“선배, 그…… 춥지 않을까?”

애리얼이 넌지시 묻자 그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뭐 얼마나 오래 있을 거라고.”

“한 이십 분?”

“그래. 나가자.”

“선배, 옷 입고 가.”

“귀찮아. 나 추울 거 같으면 네가 손이라도 잡아주든가.”

렉시우스는 이십 분이라는 시간을 별거 아닌 듯 취급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애리얼이 따라오자 자연스레 걷는 속도를 줄였다. 어느새 나란해진 두 사람은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는 생각보다 눈이 많이 쌓였다. 장화를 신어야 할 깊이였다.

출입문의 앞에서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슬리퍼를 벗기고 손수 장화를 신겼다. 보통 하녀가 하는 일인데. 애리얼이 난감해하며 사양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바깥의 날씨를 확인하더니 이내 두꺼운 모피 숄도 가져오게 해 그녀에게 둘러 주었다. 본인은 가벼운 차림인데 애리얼은 둘둘 감싸 보호했다. 그녀가 마치 유리 세공품이라도 되는 듯 지극정성이었다.

“미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잡아.”

계단에 선 그가 애리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애리얼은 그의 손을 잡고서 조심스럽게 후원으로 들어섰다. 뽀드득, 눈이 밟혔다. 하얗게 입김이 서리는 한겨울의 추위가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이토록 추운데 맞잡은 그의 손은 따뜻했다. 오히려 잔뜩 껴입은 애리얼의 손이 차가웠다.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찬 손을 살살 문질러 주며 걸음을 옮겼다.

눈 내린 정원은 고요했다.

애리얼은 오랜만에 마시는 바깥 공기를 음미하며 하얀 풍경을 감상했다. 추위와 어울리지 않는 포근한 경치였다.

“만족해?”

그가 물었다. 애리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좋아.”

“……진심이야?”

“너만 있으면 뭘 하든 그럭저럭 좋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다행인데……. 선배는 정말 하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 많아. 근데 네가 안 해 줄 거잖아.”

렉시우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뭘 하고 싶길래 저러는 걸까. 애리얼은 궁금했지만 굳이 그것에 관해 묻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둘은 잠시 대화를 멈춘 채 후원만 돌았다.

후원 중간의 하얀 퍼걸러를 지날 때쯤, 나란히 걷는 둘의 머리 위로 눈송이가 떨어졌다.

애리얼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백색 하늘이 흰 눈을 뿌렸다. 뺨에 닿은 눈송이가 금세 물이 되어 맺혔다.

렉시우스가 언제 챙겨 왔는지 모를 우산을 펴며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떨어지던 눈송이가 멎었다. 대신 우산 아래 그의 시선이 애리얼에게로 떨어졌다.

“궁금한 게 있어. 여러 개 물을 건데, 대답 못 하겠으면 하지 마. 할 수 있는 것만 해.”

“뭔데 그래?”

애리얼이 불안하다는 듯 되물었다.

렉시우스는 질문을 고르는 듯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지켜 달라고 한 거야?”

“……선배가 가장 여건이 되는 사람이어서.”

“뭐 때문에 지켜 달라고 한 거야?”

“…….”

“이 악물고 공격술을 익히던 건 솔렘의 시험 때문이었어?”

“그런 이유도 있는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스스로 보호할 능력을 갖추고 싶은 게 컸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건데? 누가 널 위협하기라도 하는 거야?”

“……아니.”

“거짓말할 거면 그냥 대답하지 마.”

그가 귀신같은 눈치를 뽐내며 무심히 말하자 애리얼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널 위협하는 건 누구야?”

“…….”

“솔렘의 시험은 레이신과 접점을 만들고 싶어서 간 거야?”

“응.”

“왜 레이신과 접점을 만들고 싶은 건데?”

“…….”

“가문의 일이야?”

“……아니.”

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렉시우스는 눈을 꾹 감았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 위를 심란함이 훑고 지나갔다. 더 예민하게 파고들 것인지, 아니면 여기에서 그만둘 것인지. 고뇌와 망설임으로 우산을 쥔 손이 떨렸다.

가문의 일이 아니면 사심인가. 레이신이 좋은 건가. 그 질문을 하지 않으려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런 질문의 종착점은 뻔했다. 현재의 상황 파악과는 하등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정의 소모로 끝날 것이다. 질투에 미쳐서 왜 자신을 봐 주지 않느냐고, 왜 레이신을 찾아갔냐고, 그런 구질구질한 질문이나 늘어놓으며 애리얼을 다그치게 되겠지.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 그녀를 살폈다. 긴장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무구한 눈동자를 보았다.

‘몰아세울 필요는 없어.’

겨우 감정을 다스린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서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이거 뭐에 쓰는 거야?”

“…….”

애리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질문에 침묵을 선택했다.

그랬음에도 렉시우스는 그녀에게 어떤 채근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손.”

그가 말했다.

애리얼이 얌전히 손을 내밀자 렉시우스는 그 위에다 휴대폰을 놓아 주었다. 애리얼이 몹시 의외라는 듯 놀라 입을 벌렸다.

“이거…….”

“들어가자. 춥다.”

그가 애리얼의 말을 잘라 내곤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선 천천히 단호하게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하던 것을 얻은 애리얼은 군말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먼저 방으로 올려 보낸 뒤 빈 응접실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지켜 달라고 했던 일, 레이신에게 접근한 일, 솔렘의 시험에 도전한 일…….’

애리얼은 그 물음에 나란히 대답을 못 했다. 그 세 가지 일의 원인이 겹치거나, 적어도 공통분모가 있다는 뜻일 거다.

‘그래야만 했던 건 가문 때문이 아닌 사적인 이유. 아마도 개인적인 위협을 받아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하나하나 곱씹어 보자 어느 정도 상황의 윤곽이 잡혔다.

애리얼은 일종의 지령을 받아 외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아마 레이신을 만나고 솔렘의 시험을 치른 것도 그 일환이겠지. 지령은 늘 가지고 다닌다던 그 하얀 마도구를 통해 받을 테고. 렉시우스는 이번 산책에서 나눈 대화로 여기까지 추론해 냈다.

“어떤 미친 새끼가 감히…….”

렉시우스가 나직이 욕설을 뱉었다. 누군가 그가 모르는 곳에서 애리얼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다. 열이 받아 소파 팔걸이를 부술 듯이 쥐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 인기척만으로도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한 그가 이름을 불렀다.

“카스트로.”

“대공자 저하, 급히 저택 정문으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황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그걸 지금……!”

그가 늑장 보고에 분노해 목소리를 높인 순간, 위층에서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스카이라임이 틀림없었다. 애리얼을 가둬 둔 방의 결계를 확인하고 열이 받아 있을 것이다.

렉시우스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대기하고 있던 그의 보좌관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

“넌 황성 쪽 분위기나 알아 와.”

“예.”

고개 숙인 보좌관을 휙 지나친 렉시우스가 성큼성큼 위층으로 향했다. 이윽고, 백작을 포함한 백작저의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며 황자를 막아선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황자가 내뿜는 마력의 기운은 살벌했다. 애리얼의 방 문과 그 결계를 당장이라도 부술 듯하다.

렉시우스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다. 결계를 부수려던 스카이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하’라 불리는 두 계급의 시선이 마주쳤다.

“잘도 가둬 놨네.”

스카이라가 비아냥댔다.

렉시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부터 물렸다.

“백작, 자리 좀 비켜 줘.”

그의 명령에 백작이 짧게 묵례를 했다. 금세 복도가 비워졌다.

스카이라는 백작저를 제집처럼 다루는 렉시우스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렉시우스는 그의 적대감을 코웃음 치며 받아넘겼다.

“평소처럼 모르는 척이나 하지, 왜 왔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