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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24)화 (124/264)

그의 도발에 스카이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 기세를 몰아 렉시우스는 그가 껄끄러워하는 주제를 하나 더 꺼내 놓았다.

“왕녀는 어쩌고, 응?”

“…….”

“이제 정식으로 약혼할 때도 되지 않았어?”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왜 없어. 친우의 약혼인데. 애리얼이랑 같이 축하하러 갈게.”

“닥쳐. 감금까지 한 주제에 친근하게 불러 대지 마.”

“감금이 아니라 구금이야.”

“다를 바 없잖아.”

싸늘하게 쏘아붙인 스카이라가 굳게 잠긴 더블 도어를 향해 다가갔다. 기어코 결계를 깨 버릴 모양이다.

그 낌새를 눈치챈 렉시우스가 한달음에 달려가 문 앞을 막고 섰다.

“황성 법관의 참관하에 정식으로 집행된 구금 처분이야. 결계를 깨면 애리얼만 곤란해져.”

“내가 책임질 거니까 상관없어.”

“안 된다고 말했어!”

렉시우스는 험악한 얼굴을 하고서 스카이라의 팔목을 잡아챘다. 강한 악력에 발동되던 공격술이 멈췄다. 스카이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팔목에 가해지는 악력을 뿌리쳤다.

“책임진다고 했잖아!”

스카이라의 목소리가 복도를 크게 울렸다.

격앙된 목소리가 한차례 오가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가릴 수 없는 적개심이 묻어났다.

그중에서도 더 화가 난 쪽은 스카이라였다. 그날 이후, 그는 아직 한 번도 애리얼을 보지 못했다. 크게 다쳤다는 말을 듣고 급히 갔을 때는 이미 그녀가 데본시아의 손에 옮겨진 후였다.

그날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던 후회가 그를 좀먹었다. 그녀가 괜찮아졌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의 시간은 여전히 솔렘의 시험이 있던 그날에 멈춰 있었다.

그러니 제 두 눈으로 그녀의 무사를 확인해야 했다. 확인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잠시면 돼. 나와.”

스카이라가 인내를 끌어모아 가까스로 차분한 어투를 취했다. 그럼에도 렉시우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삐딱하게 눈썹을 치켜올리기나 했다.

“애리얼은 널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네가 뭔데 판단해. 며칠 독점하니까 걔가 네 거라도 되는 거 같아?”

“적어도 너보다는 내 거에 가깝지.”

“중요할 때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스카이라의 일침에 렉시우스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턱 근육이 팽팽히 긴장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날, 애리얼에게 도움이 되었던 건 렉시우스가 아닌 스카이라였다.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렉시우스는 크게 동요했고, 분노보다는 비참함을 느꼈다.

애리얼도 아마 스카이라를 만나고 싶을 것이다. 그날의 일을 묻고, 스카이라에게 감사와 사과를 전하겠지. 자신에게는 미안하다고만 말하던 그녀가 스카이라에게는 고맙다며 웃을 거다.

렉시우스는 그게 죽도록 싫었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험하게 싸우더라도 여기서 둘의 만남을 막는 게 나았다. 배알이 뒤틀리는 질투 끝에 남은 생각이었다.

“넌 못 들여보내 줘. 그러니까 그냥 가.”

그러나 그 말을 스카이라가 들을 리 없었다.

그가 애리얼에게 온종일 들러붙어 다니는 렉시우스를 억지로 참은 이유는 애리얼의 안전 때문이었다. 보호하려고, 다치지 말라고, 생살을 씹는 기분으로 멀리한 거였다. 그런데 그게 무너진 지금, 구태여 애리얼과 거리를 둘 이유가 어디 있는가.

“네가 뭔데…….”

스카이라가 서느런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때였다. 복도 한편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로를 노려보던 둘이 소음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황자와 대공자의 보좌관이 동시에 층계를 뛰어 올라왔다. 경직된 얼굴이 용건의 무게를 알렸다.

“황제 폐하께서 긴급 소집을 명령하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긴급 소집을 명령하셨습니다.”

두 보좌관이 동시에 같은 말을 전했다.

거부가 불가능한 절대 권력의 호출에 황자와 대공자는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

렉시우스가 쳐 둔 결계는 구금용으로 더없이 완벽했다. 내외부를 완벽히 가르는 투명한 막은 몹시 견고할 뿐만 아니라 소리와 진동 등 감각을 흩트리는 대부분의 요소를 차단했다.

그 덕분에 밖에서 벌어진 실랑이를 알지 못하는 애리얼은 휴대폰에만 골몰해 있었다.

오래 확인하지 못한 만큼 알림이 잔뜩 쌓인 화면이 두려움을 일으켰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솔렘 공작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아내려 합니다.)

▷현재 위치: 허클리 백작저 정문』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아내려 합니다.)

▷현재 위치: 허클리 백작저 본관 - 1층 응접실』

무시무시하게 오른 호감도 창.

특히나 ‘호감도 피버 타임’의 효과를 톡톡히 본 레이신의 호감도 상승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전무하던 호감도가 단박에 세 개까지 차올랐다. 처음과 비교해 급격히 불어난 호감도 하트가 다소 무섭기까지 했다.

‘어쨌건, 이제 목표 수치는 전부 달성했어. 더 이상 공략에 열을 올릴 필요는 없어.’

애리얼은 느긋하게 풀린 얼굴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큰 산을 넘은 듯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개고생한 결괏값이 그래도 작진 않아 다행일까.

애리얼은 여유롭게 화면을 보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그녀는 나른해져 있던 얼굴을 조금 굳혔다. 미처 못 본 알림 창을 뒤늦게 발견했다.

『호감도의 동시 상승으로 다중 루트에 진입하였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다중 루트’라는 이질적인 단어.

그 탓에 애리얼은 백작저에 진입한 스카이라의 위치 정보를 대충 넘겨버렸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다중 루트라는 글자만 커다랗게 보였다. 대체 저게 뭘까.

애리얼은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새로운 알림을 터치했다. 그러자 조금 익숙한 알림이 떴다.

[!도움말]

아주 오랜만에 보는, 도움말이 추가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정말 도움이 되는 정보일지, 아니면 정보를 빙자한 경고일지. 애리얼은 긴장된 얼굴로 도움말 창을 열었다.

『기본 도움말이 추가되었습니다.』

『특별 엔딩에 관한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특별 엔딩이라는 단어가 숨을 멎게 했다. 그럼에도 짐짓 차분함을 유지한 애리얼은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우선은 기본 도움말부터.

『▽기본 도움말

*각 캐릭터의 프로필을 통해 호감도와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공략 대상의 호감도를 올리면 스토리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엔딩을 보기 위해선 호감도 ♥♥♥ 이상의 공략 대상이 최소 한 명은 존재해야 합니다.

*한 캐릭터의 호감도가 ♥♥♥♥ 이상이 되면 해당 캐릭터의 개별 루트에 진입합니다.

*개별 루트에 진입하면 타 캐릭터의 호감도를 올리기 어려워집니다.

*다중 루트에 진입하면 동시에 여러 개의 엔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엔딩은 넘기고 진행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 진행에 따라 도움말이 추가됩니다.)』

오랜만에 보는 도움말 창은 새로운 정보의 추가로 길어져 있었다. 애리얼은 그중에서도 추가된 두 줄을 유심히 보았다.

‘다중 루트에 진입하면 동시에 여러 개의 엔딩…….’

여러 개의 개별 루트가 동시에 진행된다는 의미로 보였다. 당연히 개별 루트보다 훨씬 성가신 루트인 게 분명했다. 한 명만 신경 쓰면 되는 개별 루트와 달리 여럿을 신경 써야 하는 상황.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라면 엔딩을 맞더라도 넘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애리얼은 마지막으로 추가된 줄을 보며 크게 안심했다.

개별 루트를 극구 피하려 했던 건, 루트 대상을 제외한 다른 대상들의 호감도 정체와 엔딩을 맞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호감도도 모두 달성했고 원치 않는 엔딩은 제쳐 두고 진행할 수 있다는 걸 안 지금, 다중 루트에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었다.

귀환을 위한 퍼즐이 거의 맞춰졌다. 남은 조각은 특별 엔딩뿐.

그녀의 검지가 두 번째 알림을 터치했다.

『▽특별 엔딩에 관하여

*공략 대상 전원의 호감도가 ♥♥♥ 이상일 때에만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생일(1월/1일)에 일어납니다.

*그 어떤 공략 대상과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은 상태여야 합니다.

*공략 대상 전원(히든 캐릭터 제외)에게서 직접 생일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잠금]

(스토리 진행에 따라 잠금이 해제됩니다.)』

특별 엔딩의 정보 창에서 대부분의 조건이 열렸다. 이제 잠긴 정보는 하나.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남은 2년 내에는 무조건 탈출할 것이다.

의지를 불태우며 하나하나 곱씹어 읽어 나가던 애리얼의 눈이 한 군데에서 멈췄다.

“생일 선물?”

다소 생뚱맞게 느껴지는 단어에 입이 벌어졌다.

어쩐지 생일날에 일어난다는 조건부터 심상치 않더니, 생일 선물이라는 조건이다. 그나마 히든 캐릭터는 제외라는 게 위안인지…….

‘생일 선물을 받으려면 나도 생일 선물을 줘야겠지?’

그런 결론에 도달한 애리얼은 심각한 얼굴로 손끝을 깨물었다.

공략 대상들은 하나같이 신분이 높으니, 그들의 생일이야 대부분의 귀족들이 챙기고 있었다. 그녀가 속한 허클리 백작가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에도 백작은 황성과 대공저, 공작저에 각각 선물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백작의 생일에 선물을 보내오지는 않았다. 고위 계급이 아래 계급을 챙기는 일은 어지간히 긴밀한 게 아니고서야 드물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공략 대상들이 애리얼에게 가진 호감도가 큰 편이니, 예의상이라도 선물을 보내올 확률이 높았다. 올해야 생일날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물을 받는 게 여의치 않았지만, 내년에는 선물이 올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 선물을 그들에게서 직접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려면 관계를 친구 정도로 못 박아 둬야 하는데……. 어떻게?’

렉시우스만 해도 당장 보이는 애정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 사이를 유지하는 게 과연 가능할 것인지. 하물며 데본시아와는 친구라기에도 뭣한 상태가 아닌가. 왕녀와의 혼담 때문에 데면데면해진 스카이라도 난제였다. 레이신과는 이제 겨우 첫발을 뗀 상태였고.

애리얼은 제 무릎을 끌어안고서 그 위에 이마를 대었다. 한숨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호감도가 오른 대상들과 선을 긋는 동시에 또 직접 선물을 받을 정도로는 친밀해야 한다니.

“너무 어려워……. 진짜 너무…….”

애리얼이 입술 새로 한탄을 중얼거렸다.

특별 엔딩이 남아 있는 이상, 공략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큰 산을 넘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첩첩산중이다.

이놈의 게임이 도무지 쉬워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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