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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25)화 (125/264)

황제의 긴급 소집은 끝나지 않는 남부의 전쟁 때문이었다. 제국과 제국에 반역을 일으킨 삼 왕국 연합 간에 발발한 전쟁. 이 짜증 나는 소모전을 빨리 종결짓고자 하는 게 제국 정점의 뜻이었다.

원래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 왕국 연합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자 장기전을 계획했었으나, 황제는 판단을 바꾸었다. 그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장기간의 소모전을 이끌 여력이 없었다. 최근 들어 부쩍 쇠약해지면서 신경이 몹시도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그는 신경에 거슬리는 요소란 요소는 모조리 치워 버리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결정된 것이 렉시우스의 재출정이었다.

대공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회의장을 나왔다. 아카데미 졸업 후로 미뤄 두었던 아들의 출정이 황명으로 당겨졌다. 황명인지라 아무리 대쪽 같은 성미의 그녀라도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굴렀을 뿐.

“이 일을 어찌합니까! 어떻게 시간을 늘릴 방도가…….”

“황명을 거부할 방도는 없습니다, 어머니.”

사색을 한 대공비와 달리 그 아들인 대공자는 예상했다는 듯 무표정했다. 대공비는 울 것처럼 새빨개진 눈으로 인상을 쓰고 아들을 보았다.

무정한 아들은 그 시선에 오히려 자리를 피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대공자, 가기는 어디를…….”

“다소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공비 전하께선 괘념치 마시고 먼저 귀환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그리 무정합니까! 렉시우스……!”

대공비가 애타게 소리쳤으나 렉시우스는 대공비를 두고 떠나가 버렸다. 그녀의 말대로 무정한 행동이었다. 다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렉시우스가 황태자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던 기사들은 그를 막지 않았다. 미리 지령이 내려진 듯했다.

문을 열자 책상 앞에 앉은 데본시아가 보였다. 서류를 처리하던 데본시아는 렉시우스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올 줄 알았어.”

“…….”

“출정 건은 나도 유감이야.”

데본시아는 뻔뻔하게도 저런 소리를 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렉시우스는 입을 열었다.

“가증스러운 자식.”

혐오스러워하며 뱉은 말에 데본시아는 피식 웃었다.

“할 말이 많은 거 같은데, 어디든 앉지 그래?”

“애리얼이 신성 마법사라며.”

렉시우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솔렘의 시험에서 그녀가 일으켰던 폭발의 규모를 토대로 추측하고 황성에 심어둔 정보책을 이용해 상황을 파악했다. 그렇게 겨우 얻은 정보로 답을 끼워 맞췄다.

데본시아의 시선이 가만히 그를 향했다가 다시 서류로 되돌아갔다.

“응. 신성 마법사 맞아.”

“그걸 네가 제국 법까지 어겨 가며 직접 조작했고.”

“응, 그랬지.”

“거기다 브레이슬릿으로 마력의 불균형을 초래해서 발전을 저해하고.”

“그것도 맞아.”

“근원 소멸기를 빌려줘서 걔를 다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것도 너고.”

“응.”

데본시아는 낯빛 하나 안 바뀌고 태연하게 긍정했다. 그걸 일부 묵과한 공범이 렉시우스이기에, 그의 태연한 긍정은 렉시우스의 가책을 부추겼다.

렉시우스는 이 일을 황제에게 고하거나 외부에 공표하지 않을 것이다. 데본시아는 자신과 닮은 그의 심리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시험을 모른 척한 건 나도 후회해. 가만히만 있었으면 그렇게 다치지는 않았을 텐데, 애리얼의 도덕성을 간과했어. 브레이슬릿만으론 대비책이 못 됐지.”

“근원 소멸기를 빌려준 건 후회하지 않나 보네.”

“누구한테 줄지, 어떻게 사용될지 알았으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애리얼이 중상을 당할 거라곤 예측하지 못했어. 내 불찰이야.”

렉시우스는 딱딱한 얼굴로 그의 설명을 들었다. 데본시아가 건넨 근원 소멸기는 레이신의 손에 들어갔고, 레이신은 그걸로 제 마력을 먹여 기른 마수들을 모조리 죽였다. 솔렘의 위세는 약화되었고, 학살과 같았던 올해의 시험 방식 때문에 평판도 나빠졌다.

그리고 그 결과 중립을 고수하며 황실의 걸림돌 아닌 걸림돌이 되었던 솔렘이 고개를 숙이고 황태자의 밑으로 들어왔다.

이번의 일로 데본시아는 철저하게 이득만 봤다. 아마도 그는 여기까지 계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계산대로 훌륭한 결괏값이 도출되었다. 쾌재를 불러야 마땅할 상황이다.

그런데도 데본시아는 그답지 않게 후회가 비치는 얼굴을 했다.

“나 같은 인간 말종도 상대하는 애니까…… 거기 있는 인간들을 지나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상정했어야 했는데.”

데본시아의 눈동자는 차갑지만 묘하게 다정하기도 했다. 애리얼을 생각할 때는 냉정한 황태자도 저런 눈을 한다. 렉시우스는 그 눈빛을 보며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역겨웠고, 불안했다.

“내 출정일이 당겨지도록 손을 썼어?”

“아니. 하지만 내가 한 일에 영향을 받아 당겨진 걸 수는 있지. 그러니까 어쩌면 맞는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네.”

“또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답이 그 모양이야?”

“글쎄. 나 좋은 일?”

데본시아가 무감정한 얼굴로 가볍게 대꾸했다.

렉시우스는 꺼림칙함에 눈썹을 구겼다.

오늘의 데본시아는 유달리 솔직했다. 말만 아니라 얼굴도 그랬다. 가장을 집어치운 얼굴은 조용하고 냉정했다. 어차피 전장으로 보내질 경쟁자라 숨기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렉시우스가 그까짓 남부 전쟁에서 죽지 않을 걸, 데본시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렉시우스도 자신이 전장에서 죽지 않을 걸 알았다. 그는 적군과 비교해 격이 다른 인간이었다. 죽으려 해도 죽기가 힘들 정도다. 그의 어머니인 대공비만이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표정을 숨기질 않지?’

데본시아의 속을 제대로 파헤치지 못한 렉시우스가 잠시 멈칫한 사이였다.

“그거 알아?”

데본시아의 목소리가 유려하게 운을 띄웠다. 렉시우스는 이다음에 이어질 말이 몹시 불쾌할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가 너한테 애리얼과 관련된 일들을 맡기고 구금을 주관하도록 한 건, 네가 이번 일에서 애리얼과 가장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야.”

“……질투가 가장 덜 날 상대를 골랐다는 소리네.”

“내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황성은 지금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정도거든.”

쇠약해진 황제 때문이다. 황태자는 후계자로서 황제가 수행하지 못하는 업무들을 떠안고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걸 제게 유리하도록 입맛대로 바꾸어 진행했다. 차츰차츰 황성을 장악해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의 위주로 돌아간다. 그가 원했던 대로. 그런데 그는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너한테 맡긴 거였는데, 그랬는데…….”

렉시우스는 흐려진 그의 말끝에서 그의 속내를 읽었다. 왜 그가 애리얼의 처분을 판결할 대상으로 자신을 꼽았는지.

그녀와 하등 상관없는 행정관이나 법관을 감시용으로 보내면 애리얼을 만나러 올 스카이라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카이라에게 건네질 그녀의 감사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둘 사이가 깊어질 수도 있는 여지를 아무도 막지 못했겠지. 애초에 황자가 만나겠다는데 막을 이유도 없었고.

그와 같은 질투심을 느껴 스카이라의 방문을 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렉시우스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구금을 주관하도록 했다.

철저하게 계산하여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결국 렉시우스에게마저도 질투가 났다는 의미였다. 천하의 황태자가.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이.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

렉시우스는 웬일로 그를 높여 불렀다. 대개 비아냥거릴 때 그랬고,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 편찮으신 것도 네 짓입니까?”

그렇게 묻자 데본시아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웃었다. 대답은 없었다.

***

렉시우스가 없을 때의 애리얼은 방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만날 수도 없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크레시앙 대공가에서 직접 고용한 기사들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긴 했으나, 어차피 감시 역이었다.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이와 같은 그녀의 완전 고립이 오래가는 일은 없었다.

렉시우스는 대개 급한 일만 잠깐 처리하고 금방 귀환했다. 부재가 한 시간을 넘은 적이 없었다.

애리얼은 오늘도 그러겠거니 여기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렇게 렉시우스가 나간 지 세 시간이 넘어갔다.

애리얼은 폭풍처럼 화면을 휩쓸고 간 알림을 들여다보고 고뇌에 빠졌었으나, 그것도 이십 분 정도까지였다. 명확하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오래 붙들고 있어 봐야 머리만 아팠으니까.

“선배는 대체 언제 오려는 거지…….”

지루함에 지친 애리얼이 침대에 드러누워 중얼거렸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니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 텐데,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걸까. 그녀가 돌려받은 핸드폰을 켜서 그의 위치를 확인하려던 차였다.

끽, 끼긱.

유리창을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려왔다. 방의 오른쪽 끝에 있는 창문 쪽이었다.

끼기긱, 끼익.

커튼에 가려진 창에서 자꾸만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나뭇가지가 창문을 긁기라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결계 탓에 그 소음이 그녀의 귀에까지 들릴 리는 없을 터.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고서 창문을 주시했다.

“……렉스 선배?”

혹시나 하여 렉시우스를 부른 순간.

콰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애리얼은 창이 부서진 걸 눈치채고 황급히 물러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파편은 날아오지 않았다. 멀쩡한 커튼 아래로 유리 조각 대신 재 가루가 부스스 떨어졌다. 금빛이 도는 마력이 지지직거리며 재 가루와 함께 흘러들어 왔다.

침입자다. 그것도 순도 높은 마력을 쓰는.

‘아리앨라?’

애리얼은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떠올렸다. 렉시우스의 결계를 뚫고 들어올 실력자라면 그녀 정도뿐이었다.

매끈했던 커튼이 불룩하게 솟았다. 휘이잉, 휘잉.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침입자가 창문을 넘어오고 있었다. 거대한 장골의 윤곽으로 보아 아리앨라는 아니다.

경계심이 삽시에 치솟았다.

침입자가 결계를 덧씌운 것인지, 휘이잉, 울리던 바람 소리가 멎는다.

애리얼은 숨죽이고서 창 쪽을 주시한 채 호출 벨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든 부르기 위해 손가락을 뻗었다.

“누르지 마.”

묵직한 저음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애리얼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라보는 가운데 커튼을 걷으며 레이신이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헝클어져 삐죽한 금발을 대충 땋아 정리하고서, 별로 단정치 못한 차림을 했다. 그는 머리와 셔츠에 묻은 눈을 대충 털어 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레이신이 어안이 벙벙한 애리얼을 향해 무심히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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