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그녀가 입을 벌리고 멍하게 물었다.
“공자 서하께서 왜 여기에?”
그러자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검은 천으로 감싼 근원 소멸기였다.
“이거 돌려주려고.”
“아…….”
“잘 썼어.”
그는 근처 테이블에다 근원 소멸기를 아무렇게나 올려놓고는 애리얼에게 다가왔다. 금세 반걸음 거리로 다가온 그가 황색의 눈동자로 애리얼을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왜인지 평소와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언제나 차갑게 얼어붙은 벽 같았는데, 오늘은 녹은 얼음처럼 미적지근한 것이, 말투부터가 달랐다.
‘아, 그러고 보니 호감도가 올랐었지.’
그답지 않게 누그러진 분위기의 이유를 깨닫자 애리얼은 조금 난감해졌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하트 두 개부터는 꽤 강한 호감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물며 그는 단번에 세 개를 채우지 않았던가. 어떤 태도로 나올지 긴장되어 그녀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약간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알아채고서 시선을 던졌다. 애리얼은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결계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근원 소멸기를 썼어.”
그게 그런 기능이 있는 물건이었나. 애리얼은 흘금 테이블을 훑었다. 검은 천에 감싸인 것이 냉기를 뿜고 있다. 이름으로 유추해 뭔가를 없애는 용도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결계까지 없앨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마수를 죽이는 데도 썼고.”
그가 추가로 용도를 이야기했다. 애리얼은 그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서 크게 뜬 눈을 깜박였다.
“마수라면…… 제가 시험 칠 때 보았던 그 생명체들요? 그걸 죽이셨다고요?”
레이신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리얼의 눈동자가 파르르 움직였다. 그녀는 충격에 떨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레이신은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던 거다.
불멸에 가까운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서, 솔렘이 가진 무력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것을 멸절시키기 위해서, 그는 근원 소멸기를 요구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솔렘의 차기 가주인 그가 스스로 제 가문을 약화시켰다.
“지긋지긋했거든.”
이유를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대뜸 말했다. 그러더니 근처 소파에 가 앉았다.
“마수는 내 마력을 먹고 살아. 기생충이나 다름없어. 그것 때문에 나는 일 년에 두 달 이상을 반드시 잠들어야 했어.”
그는 묻지도 않은 사정을 술술 뱉어 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애리얼을 살폈다. 은연중에 의사를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애리얼은 근처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의사를 표했다.
레이신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학기 초마다 내가 비실대면서 별관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늘 졸리고, 무기력하지. 아무리 자도 개운해지질 않고, 늘 피가 빠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기분이 아주 별로야.”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그의 무심함에는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다. 애리얼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마력을 먹인 건 내가 세 살 때부터였고, 그때부터 손위 형제를 다 누르고 가문의 후계자로 낙점이 됐어. 하필이면 초대 솔렘 공작의 마력과 가장 유사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이 나이 될 때까지 계속 잠자는 데 필요 이상의 시간을 소모하며 반쪽짜리 삶을 살았어.”
과거를 더듬는 그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가문을 위한 일이라고, 희생할 수 있는 게 영광이라고. 전부 개소리지.”
그는 제 가문을 매도했다. 제 가문에서 기른 강력한 패를 제 손으로 부수고서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패들은 모두 그의 마력을 빨아 나온 기생물이었으니, 그의 행동은 정당한 자기 보호로 느껴졌다.
다만 그로 인해 죽기 직전까지 갔던 애리얼은 미묘한 감상이 들었다. 분명 안타까운 일이긴 한데, 왜 자신까지 휘말렸어야 했나. 근원 소멸기까지 빌려 와서 그의 도움이 되었던 자신이 이런 일까지 당했어야 했나. 왜 그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다쳤어야 했나. 어차피 죽일 마수들을 왜 진작 죽이지 않고 사고를 방치했나.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득 산재했다.
그러나 따지고 들 만큼 열의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의 사고방식이 몹시 무정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였다. 그만큼 애리얼은 그에게 딱히 기대하는 게 없었다. 렉시우스로부터 그때 봤던 이들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도 하고. 왠지 모든 게 다 오래 지난 일처럼 아련했다.
정적이 흘렀다.
레이신은 개소리라는 말을 하고는 입을 닫았다.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뭔지. 애리얼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나지막이 위로를 건넸다.
“……힘드셨겠네요.”
그의 금색 눈이 애리얼을 향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날 위로해?”
그가 물었다. 애리얼은 당황하기보단 그저 멍해졌다.
“서하의 사연이…… 안타까워서요?”
“하지만 넌 그것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
“그거랑은 별개로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어서…….”
“…….”
“일부분 원망스럽기는 해요. 왜 조금 더 빨리 나와 주지 않으셨을까. 귀띔이라도 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었고……. 하지만 그런 거래기도 했으니…….”
그렇게 말하다 보니 애리얼은 조금 울적해졌다. 잔여물처럼 남은 그날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날 피와 함께 분노와 억울함을 몽땅 토해 냈기에, 격정적으로 고조되지는 않았다.
“학살이나 다름없는 시험 내용에, 문까지 잠가 버리고…… 대놓고 죽으라고 기만하는 것만 아니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런 생각은 들어요.”
그렇게 말하고 끝인 걸로 갈무리될 만큼 그녀의 감정은 희석되어 있었다. 애초에 격정적으로 분노를 쏟고 따지는 것은 그녀의 체질이 아니기도 하고.
그녀가 말을 마쳤을 때, 레이신은 고요히 침잠한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수를 죽인 것도 나를 위한 일이라, 너에게 하는 속죄는 되지 못해.”
고해 성사 같은 그의 중얼거림에 애리얼은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굳이 속죄를 바라지는 않는데요.”
그러자 이번에는 레이신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어째서?”
“어째서냐니…….”
애리얼은 당황스러워서 말끝을 흐렸다. 하트 세 개를 채워 목표치를 달성한 그에게 더 바라는 것은 없었다. 속죄 같은 건 별로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그가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실망을 표현했다.
그 낯선 모습이 애리얼을 당혹스럽게 했다. 조각상을 얼린 것처럼 딱딱하고 경직된 얼굴만 고수하던 이가 저런 유순한 표정이라니. 그녀는 제가 뭔가 잘못이라도 한 줄 알고 조바심을 냈다.
“서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나한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
말이 겹쳤다. 둘 다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레이신이었다.
“아니, 잘못은 내가 했지. 넌 잘못한 거 없어.”
명확히 단언한 그는 애리얼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한테 속죄……. 아무튼 너한테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왔어.”
그는 간절하게 보일 만큼 진심이었고, 진지했다.
왜, 갑자기, 빙벽을 두르고서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던 인간이, 이토록 태도를 바꾸었는가.
호감도 하트가 올라 호의를 보이는 것이라 치부하기엔, 애리얼은 이미 데본시아를 겪었다. 하트를 다섯 개나 채우고도 애리얼에게 위험을 초래하고 그녀를 휘두르려던 인간. 레이신도 그와 같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호감도 하트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감정 자각에 따른 반응이었다. 하트가 오르면 애리얼을 대하는 언행에 변화가 있을지언정 그들의 인간성이나 성격에까지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애리얼은 그가 보이는 온정적인 태도 변화에 의구심부터 가졌다.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괜찮은데도요?”
애리얼이 조심스럽게 답을 내놓았다.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늘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던 눈이 조금 커졌다.
“나, 집이라도 사 줄 수 있어. 땅도 줄 수 있고, 금, 은, 보석도 줄 수 있는데.”
“아뇨, 그런 건 정말 괜찮은데…….”
“희귀한 동물이나 식물 같은 생명체도 구해다 줄 수 있어. 마도구나 금서…… 무기도 되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그녀의 말뜻을 뭐라 알아들었는지, 레이신은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뭘 원하는지 말만 해 주면 돼.”
“전 정말 괜찮습니다, 서하.”
“왜?”
“왜냐고 물으셔도…….”
“정말 바라는 게 없어? 나 뭐든지 해.”
그를 증명하듯 그는 갑자기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걸음으로 애리얼에게 다가왔다. 솔렘의 차기 가주라는 이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애리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그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사납게도 생긴 주제에, 눈빛은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무구하고, 간절하다.
“물건이 아니라 나한테 바라는 건 없어? 내 마력은 어때? 가질래?”
그는 마치 떼를 쓰는 것처럼 굴었다. 뭐라도 시켜 달라고, 안달을 냈다. 정말 이상했다. 하물며 마력까지 내주겠다니. 마수에게 마력을 빨리는 것이 진절머리가 나 제 가문까지 해했으면서.
그랬던 그가 지금 찬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서 마력을 주겠다 안달이다.
애리얼은 당장 그의 몸부터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서하, 제게 무릎을 꿇으시면 안 됩니다.”
“왜 안 돼?”
“……계, 계급과 제국의 법도에 따라 서하께서는 백작 공녀인 제게 저자세를 취하셔선 안 되니까요.”
이런 당연한 것을 솔렘의 공자에게 설명하게 되다니. 애리얼은 이 상황이 너무나 어색해 말을 버벅거렸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기엔 너랑 나밖에 없잖아.”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그가 애리얼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간청하는 듯, 높은 이를 우러르는 듯이.
너무나 부담스럽게 격변한 그의 태도에 애리얼은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레이신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그녀는 그를 피해 열 걸음을 물러났다.
“어디 가?”
레이신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물었다. 그래서 애리얼도 털썩 무릎을 꿇고서 푹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당황하였다.
“바닥은 차. 의자에 앉아.”
“서하께서 먼저 앉으세요. 바닥은 차갑습니다.”
애리얼은 그의 말을 똑같이 인용하여 대답했다. 그는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몸을 일으키더니 소파로 되돌아가 앉았다. 그제야 애리얼도 다시 의자에 돌아가 앉았다.
레이신의 집요한 눈길이 곧장 그녀와 눈을 마주쳐 왔다.
“죄인으로 여기고 하대해도 돼. 난 그런 취급을 받기 위해 온 거야.”
그는 연달아 황당한 언행을 펼쳤다. 시험 날 있었던 일에 부채감…… 아니,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속죄의 의미라면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솔렘에서 약속했던 후원만 해 주신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그날의 기만을 따로 보상하고 싶어.”
무뚝뚝한 얼굴이 고집스러운 빛을 띠었다.
레이신은 벽창호 같았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끊임없이 보상을 해 주겠다며 강요에 가까운 부탁을 해 대니, 먼저 지치는 건 애리얼이었다.
차라리 적당한 보상을 받고 물러나는 게 나을까.
난감한 고뇌에 빠진 그녀의 뇌리로 번쩍 한 문장이 스쳤다.
『*공략 대상 전원(히든 캐릭터 제외)에게서 직접 생일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생일 선물…….”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레이신의 눈이 번뜩였다.
“생일을 챙겨 달라는 거야?”
“거창하게는 아니고, 그냥…… 선물 교환을 하고 싶어요. 가문을 이름을 달고 선물만 보내거나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주고받고 싶어요.”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
“아무거나…… 서하께서 골라 주셨으면 해요.”
“알았어.”
“너무 크거나 거창하지는 않은 거로!”
애리얼이 황급히 덧붙였다. 혹시라도 그가 땅문서 같은 걸 대령할까 봐.
그녀의 말을 잘 알아들은 건지 뭔지, 레이신은 평소와 같이 감정이 옅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대답이 없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면…….”
무슨 말이 나올까. 불안한 궁금증이 차올라 애리얼은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콰앙!
갑작스럽게 커다란 충격음이 난입하며 더블 도어가 거칠게 개방되었다.
“레이, 이 개자식!”
비속어가 섞인 거친 저음에 애리얼이 소스라치며 물러났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난 렉시우스가 레이신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