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신은 동요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감정한 얼굴로 침착하고 재빠르게, 미리 부숴 두었던 결계의 틈새를 향해 물러났다.
그가 임시로 덧대 놓은 제 결계를 지웠다. 휘이잉, 강풍이 몰아치며 커튼이 들렸다. 환히 뚫린 도주로가 그를 반겼다. 렉시우스가 빠르게 그를 쫓았다.
“또 보자, 애리얼.”
이 와중에도 레이신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렉시우스가 으득 이를 깨물며 근처의 의자를 집어 던졌다. 애리얼이 말릴 새도 없이. 휘잉, 무거운 원목 의자가 빠른 속도로 레이신을 향해 날아갔다.
레이신이 재빨리 몸을 낮춘 탓에 날아간 의자는 벽을 맞히고 떨어졌다. 쿵,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열이 뻗친 렉시우스가 또 다른 의자를 집어 드는 사이 레이신은 빠르게 뚫린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뒤늦게 날아간 의자가 커튼에 휘감겨 휑한 창밖으로 넘어갔다. 우지직, 커튼이 찢어지며 의자가 땅으로 추락했다.
휘오오오.
뻥 뚫린 창으로 겨울의 찬 바람이 몰아쳤다. 칙칙한 하늘을 배경으로 눈발이 매섭게 날리고 있었다. 눈보라를 막아 줄 유리가 없는 창틀에는 빠르게 눈이 쌓이고, 카펫 위로도 하얀 눈덩이가 날아들었다.
위협적인 날씨에 애리얼은 오들오들 떨며 바깥을 보았다.
렉시우스가 구멍이 뚫린 결계를 다급히 수복했다.
투명한 막이 생성되어 뚫린 창을 덮었다. 그 즉시 위협적이던 바람 소리가 멎었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창문 주변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렉시우스가 눈에 엉망이 된 카펫을 밟으며 애리얼에게 다가왔다. 그 짧은 새에 눈송이가 묻은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히 쓸어 주었다.
“무슨 일 없었지?”
그의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레이신이 제게 해코지라도 할 줄 안 걸까. 솔렘의 시험과 관련된 일에서 레이신의 지분이 컸으니, 무리는 아니다.
애리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이 검은 천에 싸인 근원 소멸기를 향했다.
“저걸 돌려주려고 오셨어.”
“다른 말은 없었어?”
렉시우스는 애리얼이 가리킨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레이신과 비슷한 황금색의 눈동자가 이글대며 그녀만을 담았다. 애리얼이 또다시 레이신과 위험한 거래를 주고받은 것은 아닌지, 그의 얼굴에는 강렬한 의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기껏해야 생일 선물 같은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공자 서하께서 시험에서의 기만을 보상하고 싶다고 하시기에, 괜찮다고 거절했어.”
애리얼은 레이신과의 대화를 간단히 축약해 말했다. 레이신이 본인의 과거사를 털어놓긴 했으나, 그건 그의 개인사이기에 함구해야 할 내용이었다.
렉시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애리얼을 응시하다가 머리칼을 쓸어 주던 손을 거뒀다.
“정말 그것뿐이야?”
“그것뿐이야.”
“보상은 왜 안 받기로 한 건데?”
“너무 과한 걸 해 주시려고 하기에, 부담스러워서 거절했어. 어차피 솔렘의 후원을 받게 될 테니까 그걸로 충분했거든.”
거절했다는 그녀의 답에 렉시우스는 안도감이 인 얼굴을 쓸어내렸다.
“또 다치기만 해. 그때는 구금으로 안 끝날 거야.”
협박인지 걱정인지 모를 고저 없는 말투였다.
애리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한없이 고조되었던 렉시우스의 감정이 차츰 차분해졌다. 경직되었던 표정을 스르르 풀어 무심히 눈을 내리깐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솔렘의 후원 따위는 왜 받고 싶었던 거야. 귀족 가문의 후원이 필요한 거면 차라리 나한테 말하지. 솔렘 공작가 같은 건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잘해 줬을 텐데.”
그의 말에 애리얼은 씁쓸한 미소를 걸쳤다.
그녀는 솔렘의 후원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공략만 아니었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험 같은 덴 절대 발을 들이지 않았을 거다. 심지어 기만까지 당할 줄 알았다면, 더욱더.
쓴 것을 삼키며 억지로 지은 듯한 애리얼의 웃음을 보며 렉시우스는 착잡함을 느꼈다. 뭔가 중요한 사정이 있어서 솔렘의 시험에 간 것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사정인지, 그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애리얼이 그에게 알려 줄 일도 없을 것이다.
다시금 무거워진 눈빛을 한 그가 눈발에 축축이 젖은 카펫과 깨진 창을 바라보았다.
“던져 버린 의자랑 엉망이 된 방은 금방 복구해 줄게. 배상도 따로 할 거야.”
애리얼은 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렉시우스는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잠깐 해 보였으나 금세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그러고는 그녀가 가리켰던 테이블로 향했다. 검은 천에 감싼 근원 소멸기가 보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서 말했다.
“이건 내가 대신 돌려주고 올게.”
그 말은 통보였다. 그는 애리얼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방을 나갔다. 물러갔던 호위가 돌아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무어라 간단한 지시 사항을 전하곤 복도를 떠나 버렸다.
그가 떠난 후 몰려온 대공가의 사용인들이 눈보라에 노출된 방을 쓸고 치웠다.
애리얼은 방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그들이 방을 치우고 이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이 닫히고 적막해진 방 안에 애리얼만 홀로 남았다.
방 안은 태풍처럼 많은 것들을 쓸고 지나갔던 레이신의 방문이 없었던 일인 양 깨끗해졌다. 렉시우스가 창밖으로 던져 사라진 의자 하나와 찢어진 커튼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금이 갔던 결계마저 온전해졌다.
애리얼은 또 보자던 레이신과 그런 레이신을 보며 발작하듯 화를 내던 렉시우스를 차례로 떠올렸다. 서로 크게 나쁘지 않은 관계였을 텐데. 애리얼이 크게 다쳤던 일로 렉시우스는 레이신에게 적의를 불태우게 되었다.
심각한 얼굴이 된 애리얼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둘의 사이가 갈라진 원인은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 있었다. 공략을 위해 행한 행동들이 이곳의 관계를 어그러뜨렸다는 게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앞으로 둘이 만나는 자리는 최대한 만들지 않고, 렉시우스의 앞에서 레이신을 언급하는 것도 최대한 피하고…….’
그러면 아까와 같은 상황을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애리얼은 방도를 고심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해 낸 것들이 잘 먹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둘은 이미 하트가 세 개 이상이라 꽤 노골적으로 그녀를 따라다닐 텐데, 심지어 같은 기숙사 동에 머물고 있으니. 어떻게든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까와 같은 과격한 분위기가 다시 재현될 것은 기정사실. 중간에 낀 애리얼만 고래 싸움을 말리려다 새우 등이 터질지도 몰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녀는 벌써 다음 학기가 걱정돼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차라리 내 쪽에서 최대한 둘을 피해 다니는 게 나을까?’
애리얼은 레이신의 등장으로 확인하지 못했던 휴대폰을 뒤늦게 꺼냈다. 접근 알림을 설정해 두기 위해서였다. 화면을 켜고 프로필 창을 띄웠다.
그렇게 렉시우스와 레이신의 프로필 창을 터치하려던 그녀는 의외의 것을 마주하고 얼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다른 알림에 정신이 팔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데본시아의 호감도 창. 그의 호감도를 가리던 오류가 해제되어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의문이 불안감과 함께 뇌리를 잠식하자, 어떠한 선고처럼 진동음이 들려왔다.
지이이잉-
[!경고]
화면에 새로운 알림이 표시되었다.
새로운 알림은 무려 경고.
애리얼은 경직된 얼굴로 갑작스레 떠오른 경고 창을 눌렀다.
『※경고!
공략 대상에게 할당된 호감도는 5개까지입니다.
6개부터는 ‘오버히트(overheat: 과열)’ 상태로, 극단적인 엔딩을 마주할 확률이 매우 높아집니다.』
“극단적인 엔딩이라고……?”
생소한 경고문을 읽는 애리얼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안색은 시체처럼 희멀겋게 질렸다.
‘레이신이 세 개, 렉시우스가 네 개, 스카이라도 네 개, 데본시아는 다섯 개…….’
데본시아는 다섯 개. 할당된 호감도도 다섯 개. 여섯 개부터는 극단적인 엔딩.
간담이 서늘해지고 등골이 오싹했다.
시스템 창은 데본시아의 굿 엔딩이 전부 사라졌을 때도 경고 창을 띄우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의 루트를 탔을 경우 맞게 될 통상적인 엔딩이나 배드 엔딩보다도, 극단적인 엔딩의 질이 더 나쁘다는 의미였다.
도움말에서는 원하지 않는 엔딩은 넘길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지만, 그게 극단적인 엔딩에도 적용되는 사안인지는 몰랐다. 아마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게 가능했다면 시스템이 경고 창까지 띄우며 오버히트와 극단적인 엔딩이라는 걸 알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극단적인 엔딩은 아마도 넘길 수 없는 엔딩…….’
이런 와중에 하필이면 데본시아의 호감도가 다섯 개다. 애리얼은 데본시아로 인해 유발될 극단적인 엔딩의 지척에 서 있는 셈이었다. 하필이면 가장 상대하기 어렵고 그 의도를 읽을 수 없는 그의 엔딩에…….
무조건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라고?”
답이 없을 화면을 향해 애리얼이 물었다. 억울함이 서린 음성에도 늘 묵묵부답인 시스템 창은 그녀에게 잔인한 사실만 알렸다.
집으로 가려면 공략 대상 전원의 호감도가 세 개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한 명이라도 여섯 개를 넘어 오버히트 상태에 도달하면 집으로 갈 수 없다. 세 개 이상, 다섯 개 이하를 유지해야만 한다. 내년 1월 1일, 그녀의 생일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애리얼은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다음 생일까지는 일 년 가까이 남았다. 그동안 데본시아의 호감도는 단 한 개도 오르지 않아야 했고, 다른 대상의 호감도도 올라선 안 된다. 하지만 함부로 그들의 호감도를 떨어트려서도 안 된다. 세 개 이상은 되어야 하니까.
숨이 턱턱 막혔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머리까지 어질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이걸…….”
타개할 수 있을까. 하트가 한계까지 꽉 차오른 데본시아의 프로필 창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눈앞이 캄캄해졌다.
호감도 상승은 공략 대상의 자각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우친 참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호감도가 제자리걸음이길 바라며 그들을 피하는 것뿐이다.
애리얼은 홀린 듯이 경고 창을 닫고서 프로필 창을 띄웠다. 수전증이라도 있는 듯 손이 떨렸다. 안색처럼 희게 질린 손가락으로 공략 대상 전원에게 접근 알림을 설정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지이이잉-
손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애리얼은 경기를 일으키듯 소스라치며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이 아찔한 문구를 띄웠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