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덜덜 떨면서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 허클리 백작저 본관 - 2층 복도』
백작저, 그것도 그녀의 방 근처에 있는 황태자의 초상화가 보였다. 황성에서 이곳까지, 순간 이동을 했음이 분명한 속도였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애리얼은 뼈마디가 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
왜 여기에 있지? 하는 단순한 의문조차 가질 수 없었다. 방금 보았던 경고 창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비상 사이렌처럼 점멸하며 시끄럽게 소리를 냈다.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설마하니 고상하신 황태자 전하가 입욕 중인 공녀를 만나겠다고 욕실 문까지 열지는 않겠지. 그런 계산으로 욕조의 수전을 틀었을 때였다.
휴대폰 속 데본시아의 초상화가 애리얼의 방 문 앞에 섰다.
세찬 물소리 사이로 지지직거리는 마력의 소음이 들렸다. 애리얼의 안색은 창백했고, 식은땀까지 흘렸다. 휴대폰을 쥔 손은 냉증을 앓는 듯 핏기 없이 차가웠다.
데본시아는 신성 마법사다. 아무리 렉시우스가 심혈을 기울여 결계를 폈어도 그라면 부수고 들어올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결계가 쩌적 금 가는 소리를 냈다.
휘오오오, 희미하게 눈보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신이 부수는 바람에 뚫려 버린 창 너머에서 바깥바람이 몰아치는 소리였다.
그렇다는 건, 이 방을 두르고 있던 렉시우스의 결계가 깨졌다는 것.
문밖에 서 있던 데본시아의 초상화가 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보라로 인해 생성된 강풍의 소음이 멎었다.
대신 욕조에 담기는 물소리가 커다랗게 퍼져 나갔다.
예민해진 그녀의 귀에 구두 굽이 바닥에 닿으며 내는 일정한 발소리가 들렸다. 제 존재를 과시하듯 뚜벅뚜벅, 욕실을 향해 다가왔다.
애리얼은 숨을 죽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의 초상화가 이제 욕실 문 바로 앞에 있다.
설마하니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애리얼은 태연한 척 대답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입욕 중이에요.”
다행히 버벅대지 않고 말이 나갔다.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기는 했어도 물소리에 묻혀 티가 나지는 않았을 터.
“왜 존댓말을 할까?”
데본시아가 이상한 질문을 했다. 애리얼은 그에게 항상 존댓말을 해 왔을 텐데, 그는 그녀의 존댓말이 의외라는 듯이 묻는다.
그 순간 애리얼은 제 실수를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귀에 익은 우아한 목소리가 짧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그녀의 실수를 지적했다.
“애리얼은 렉스랑 반말로 대화하지 않아? 타인의 눈이 없을 땐 그러잖아.”
애리얼은 경악하여 호흡이 흐트러졌다. 저런 부분까지 그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줄이야. 그녀는 충격에 대답조차 못 하고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렉스는 분명 외출할 때 널 혼자 가둬 두니까 지금은 옆에 하녀가 있지도 않을 텐데, 이상하네.”
데본시아는 침묵하는 애리얼에게 계속 압박을 가해 왔다.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보고를 받았다는 듯, 그는 그녀의 구금 상황에 대해 속속들이 알았다.
“왜 존댓말을 썼어?”
모르는 척 은근하게, 그러면서도 직설적으로 떠보는 질문이 애리얼을 관통했다.
그녀는 남아 있는 침착함을 억지로 끌어모았다. 적당히 변명해야 한다.
“혹시 나라는 걸 알았어?”
“화, 황태자 전하…….”
애리얼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렸다.
“알았나 보네.”
그의 음성은 그의 기분을 알 수 없게 잔잔하고 차분했다.
“하긴 내가 결계를 깨 버리긴 했지. 렉시우스라면 그런 짓 안 했을 테니까.”
그는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애리얼에게 이렇게 해명하라는 듯 예를 들어 주는 어투로 말했다. 잡은 먹잇감을 일부러 놔주는 것처럼, 그는 잔뜩 움츠린 애리얼에게서 한발 물러났다.
그제야 애리얼은 천천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왜…… 여기에 오셨어요?”
“난 오면 안 돼?”
그가 조금 씁쓸한 듯이 되물었다. 일부러 그런 척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데본시아의 의중은 애리얼로선 늘 알기 힘들었다. 손에 들린 휴대폰 화면에 그의 하트가 다섯 개 보이는데도, 애리얼은 그를 휘두를 수 없었다. 그가 마냥 휘둘려 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오신 이유가 궁금해서요.”
“보고 싶어서 왔어.”
“……네?”
그녀가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데본시아는 유쾌하게 웃었다. 슬그머니 문에 기대서는 인기척이 들렸다. 대화를 길게 할 모양인지.
“여기 온 이유, 라…….”
그는 한숨을 쉬는 듯한 나른한 어조였다.
“별 거창한 건 아니고, 좀 거슬렸거든. 렉스가 근원 소멸기를 가져온다길래, 왜 네가 안 오고 걔가 오나 싶어서.”
“……제가 구금 중이라…….”
“그럼 끝나고 와도 됐는데.”
“……죄송합니다.”
“아냐, 사과를 듣자는 건 아니었어. 네가 직접 주려고 했어도 어차피 렉스 때문에 막혔을 일이니까. 그냥 조금 아쉬운 것뿐이야.”
고작 그런 이유로 이곳 백작저까지 순간 이동을 했다고. 대공자가 백작저를 나왔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구금을 위해 펼친 대공자의 결계마저 깨고. 단지 조금 아쉬운 것 때문에.
‘설마…… 그 정도로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구금도 무시하고, 결계도 깨서, 렉시우스를 적대할 만큼?’
애리얼은 욕조 옆에 선 그대로 얼어 버렸다. 경고 창을 본 직후 그 경고 창이 알리던 최대의 난적을 만난 바람에 그녀는 일종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경직된 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대화를 이어 가지도 못했다. 혹시라도 그의 호감도가 오를까 봐.
꽤 오래 대화가 중단되었으나, 데본시아는 여전히 욕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금방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어느새 욕조에도 물이 반이나 차오른 것을 보며 애리얼은 초조해졌다. 렉시우스가 돌아오면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어떻게든 데본시아를 돌려보내 두어야 했다.
“황태자 전하, 이렇게 입욕 중이라 미처 나가 뵙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아무쪼록 다른 날을 잡아 예를 갖춘 상태에서 오늘의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결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라며, 시각도 늦었으니 오늘은…….”
“나한테도 반말할래?”
한참을 말없이 듣기만 하던 그가 문득 요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을 줄줄 쏟아 내던 애리얼의 입이 딱 다물렸다.
“데본시아라고 부르고, 뭣하면 별명으로 불러도 되고.”
데본시아가 나긋하게 제 이름을 허락했다. 여름, 거울 호수의 별장에서처럼.
애리얼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 데본시아와의 거리감이 정해질 것이다. 그러니 절대 말을 놓아선 안 된다. 그녀의 눈앞에 경고 창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공략 대상에게 할당된 호감도는 5개까지입니다.
6개부터는 ‘오버히트(overheat: 과열)’ 상태로, 극단적인 엔딩을 마주할 확률이 매우 높아집니다.』
호감도 하트 다섯 개의 데본시아. 그와 친밀해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제가 어떻게 감히…… 황태자 전하께…….”
“괜찮아. 단둘이 있을 때만 불러.”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아무리 보는 눈이 없어도 감히 전하께는…….”
“렉시우스는 대공자고 스카이라는 황자인데도 반말하면서, 나는 안 돼?”
그가 넌지시 그녀의 맹점을 파고들어 물었다. 마찬가지로 고위 계급인 그들에게는 반말을 하면서, 왜 자신에게는 반말하지 않는지.
“저, 전하께선 차기 제국의 정점에 서실 분이니…… 언젠가 제국 최고가 되실 분의 존함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제가 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애리얼은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가 점차 명확하고 확신에 찬 어조를 띠며 대답했다. 고귀하고 오만하며 그 누구보다 제 지위의 우월함을 잘 아는 게 그다. 이렇게 답하면 그도 더 강요하지 못하리라.
“그래? 그러면 황태자의 지위를 버릴까?”
“……예?”
애리얼이 바보처럼 되물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순간 그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리 장난이고 농이라도 지나친 소리였다.
“저, 전하…… 지금 무슨 말씀을…….”
“그걸 버리면 네가 날 선택해 줄까?”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목소리가 안개처럼 아련하게 흩어졌다.
그게 어째선지 애리얼의 가슴속을 선득하게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늘 들던 기시감이 온몸을 에워쌌다. 애리얼은 어깨를 움츠리고서 바들거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데본시아는 어째서인지 가끔 애리얼을 오래 알고 겪은 것처럼 말을 꺼낸다.
애리얼은 그게 두려웠다.
그녀가 침묵을 지켜 대화가 끊기자 물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가만히 물소리를 듣고 있던 데본시아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입욕 중인 척 위장할 때는 수전을 잠가 두는 게 더 좋아.”
그의 발언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애리얼이 충격으로 더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설마 처음부터 다 알고서 일부러 속아 준 거였나…….
“물을 틀어 놨다는 건 아직 욕조에 들어가진 않았다는 거잖아? 그러면 급조한 상황이라고 의심받기 좋거든. 다시 옷을 입고 나오라고 할 수도 있고.”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허술함을 하나하나 짚어 줬다. 이렇게 할 수도 있었다고, 예시까지 들어 준다. 욕실은 습한데 애리얼의 입 안은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그러니까 입욕 중이라는 핑계로 피하고 싶으면, 세면대에 물을 받아 놓고 가끔 찰랑거리는 물결 소리만 들려주는 게 더 효율적이야. 정말로 욕조에 들어가 있는 것 같으니까.”
그는 애리얼이 거짓말로 자신을 피했다는 것에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잘 속여 먹을 수 있는지 조언까지 해 줬다. 그랬기에 더, 애리얼은 그에게 압도되었다.
머리를 굴려 봐야 그의 손바닥 안일 뿐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무력감이 무섭게 그녀를 덮쳐 왔다.
데본시아는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갈게.”
여전히 욕조를 향해 쏟아지는 물소리 사이로 그가 말했다.
“잘 자, 애리얼.”
달콤하고 사근사근한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