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29)화 (129/264)

연인에게 하는 작별처럼 상냥하게 밤 인사를 건넨 그가 순식간에 인기척을 지웠다.

휴대폰 화면에 보이던 그의 초상화가 깨끗이 사라졌다. 순간 이동으로 돌아간 것이다.

애리얼은 수전을 잠그지도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힘이 풀린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것을 겪었다. 처음으로 구금 중에 산책하러 나갔고, 산책 때 나눈 대화로 렉시우스에게서 휴대폰을 돌려받았으며, 휴대폰에 온 수없이 많은 알림을 확인했고, 또 갑작스럽게 레이신이 찾아오더니, 그 레이신 탓에 무섭게 분노한 렉시우스를 봤고, 유례없던 경고 창에…… 심지어 마지막에는 경고 창이 알리던 오버히트에 가장 가까운 위험인물, 데본시아와 만났다.

잠깐의 산책을 제외하면 줄곧 방 안에만 있었는데도 그녀는 기진맥진 지쳐 있었다. 일련의 상황들로 초래된 긴장감에 내내 시달려 정신적인 피로가 몰려왔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너무 많은 정보에 과부하가 걸린 머리가 휴식을 요구했다.

이대로 욕실 바닥에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콸콸, 쏟아지는 수전이 시끄러웠다. 욕조의 물은 이제 넘쳐흐르고 있었다. 욕실 바닥을 적시고 그녀의 치맛자락을 축축하게 물들였다.

발목에 닿는 냉수의 차가움에 애리얼은 비척비척 일어나 수전을 잠갔다. 소매를 걷고 욕조 깊숙이 몸을 집어넣어 마개를 제거했다. 어깨 아래로 길게 흘러내린 흑발이 찰랑거리는 수면에 젖어 들었다.

지이이잉-

살짝 위태로운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마침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아직도 끝나지 않고 남은 게 있단 말인가. 종일 놀라고도 또 놀란 애리얼이 움찔거리다 미끄러져 욕조의 물에 고개를 박았다. 첨벙거리며 물이 튀어 올라 그녀의 얼굴과 가슴께를 순식간에 적셨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리다 욕조를 짚었다. 넘친 물에 기껏 걷어 올렸던 소매도 흠뻑 젖었다.

어푸푸, 물을 뱉어 내며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새 기도로 넘어갔는지, 콜록콜록, 기침이 났다.

애리얼은 젖은 머리칼을 넘기고 축축한 눈가를 닦아 냈다. 거울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인 제 모습이 비쳤다.

“…….”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거울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우지끈, 부서지는 것 같은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너, 뭐 하는 거야!”

렉시우스가 식겁한 얼굴로 애리얼에게 달려왔다.

아까 울린 진동음은 렉시우스의 접근 알림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힘에 억지로 잡아 뜯긴 문고리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렉스 선배…….”

애리얼이 현실감이 없는 듯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의 손이 애리얼의 어깨를 붙들었다. 강한 악력이 느껴지자 그제야 그가 현실로 느껴졌다. 흐릿하던 인영이 선명하게 눈으로 들어왔다. 코피를 흘리고 있는 렉시우스의 핏기 없는 얼굴이…….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내가 다치지 말라고 그렇게……!”

렉시우스가 호되게 호령했다. 떨리는 금빛 눈이 걱정과 불안으로 일렁이며 애리얼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제 코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난 괜찮아, 선배. 그냥 욕조의 물을 빼다가 살짝 미끄러져서 젖은 것뿐이야.”

“미끄러졌다고? 물고문이라도 당한 꼴인데…….”

“진짜야. 그보다 선배는…… 괜찮아?”

애리얼이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제 상태를 염려하기엔 그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뭐가 괜찮아?”

“이거.”

그녀는 젖은 소매를 들어 그의 얼굴에 흐르는 코피를 닦아 냈다. 척척한 천이 그의 입술과 턱을 부드럽게 훔쳐 냈다. 하얀 옷소매가 붉게 물들었다.

그제야 렉시우스는 제 상태를 깨닫고 손등으로 코 아래를 거칠게 훔쳤다. 손등에 묻어난 피를 보고 그는 낮게 욕설을 뱉었다. 코피는 마력에 과부하가 걸렸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장거리 순간 이동을 횟수 제한을 넘어 남발한 데다 오늘 하루에만 수 번 결계를 부수고 수복한 결과였다.

애리얼도 알고 있을 증상이라 생각하니 얼굴에 피가 확 몰렸다. 창백하던 낯이 티가 나게 붉어졌다.

“신경 쓰지 마.”

대충 피를 닦은 렉시우스가 상기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에게 유약한 모습을 보인 게 못내 부끄러운지, 시선까지 피했다. 전장에서 공격술을 남발할 때도 과부하가 걸리지는 않았는데.

그는 미간을 구겼다. 5회로 정해진 횟수 제한을 넘어서 순간 이동을 한 건, 마법을 익힌 이래 오늘이 최초였다.

“선배, 우선 지혈을…….”

애리얼의 걱정 어린 시선이 집요할 정도로 그를 주목했다. 렉시우스는 창피함에 목까지 다 화끈거렸다. 흑색의 두 눈이 자신을 신경 쓰는 게 기껍다. 하지만 이런 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는 근처의 의자에 걸린 수건을 집어 들어 애리얼의 정수리를 덮었다. 흘러내린 수건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그 전에 네 상태나 신경 써.”

툭 쏘아붙인 그가 성큼성큼 욕실을 나갔다.

애리얼은 제 눈앞을 가리는 수건을 걷어 냈다.

욕실 문이 끼익 소리를 냈다. 문고리가 부서져 너덜거리는 문은 완전히 닫혔다가도 다시 틈을 보이며 벌어졌다. 그 사이로 보이는 렉시우스는 아예 방을 나가고 있었다. 더블 도어가 탁 닫혔다.

애리얼은 젖은 머리칼을 닦고, 겨울용 새 잠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포근한 천이 닿으니 몽롱해졌다. 그녀는 나른해져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비며 더블 도어로 향했다.

“선배…… 아직 있어?”

짧은 노크와 함께 그를 부르자, 더블 도어가 벌컥 열렸다.

핏자국은 보이지도 않게 멀끔해진 렉시우스가 보였다. 적발을 쓸어 넘겨 이마를 드러낸 그는 그새 옷까지 갈아입어 빳빳한 옷깃이 돋보이는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른쪽 귀에 걸린 은색 십자 이어링이 선명하게 강조되는 차림이었다. 어디 정찬에라도 참여하는 듯…….

“바로 잘 거야?”

그가 못마땅해하는 눈빛으로 애리얼의 차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애리얼은 은근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시간도 늦었으니까, 그러려고.”

“저녁은?”

“피곤해서……. 오늘은 거를 생각이야.”

“거르긴 뭘 걸러. 점심도 못 먹은 주제에.”

“내일 아침을 많이 먹으면 되니까, 괜찮아.”

“만찬이 귀찮은 거 같으니 방 안에다 차려 줄게.”

“……만찬이라고? 선배…….”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물음을 무시하고서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익숙하게 호출 벨을 누르고 하녀장을 부른 그가 만찬의 장소를 옮기겠다고 말했다. 고개를 숙인 하녀장이 신속하게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방 안의 가장 큰 테이블에 하얀 테이블보가 씌워지고 은식기가 놓였다.

그때까지도 애리얼은 문 앞만 지키고 있었다. 어리둥절, 얼이 빠진 그녀를 보며 렉시우스가 삐딱하게 섰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자세만큼 삐딱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애리얼은 멈칫거리다 이윽고 테이블보를 씌운 테이블 앞으로 갔다. 렉시우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 주었다. 거절할 수 없어 애리얼이 착석하자 곧장 요리 접시가 올라왔다.

오늘따라 렉시우스는 아주 귀족적이고 깔끔하게 테이블 매너를 지켰다. 지금까지 대충대충 한 것은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하지 않은 것뿐임을 과시하듯. 나이프를 쥔 기다란 손가락이 유려하게 생선 살을 발랐다.

어쩐지 생소한 그 광경이었다. 애리얼은 그를 신기하다는 듯 응시했다.

깨끗하게 발라진 뽀얀 생선 살이 애리얼의 접시 위로 올라왔다.

“먹어.”

그가 툭 뱉었다. 기품 있는 동작과 달리 시건방진 말투였다. 명령은 아닌데 상냥하지도 않은…….

애리얼은 이미 제 접시 위에 올라온 걸 거절할 수 없어서 포크를 들었다. 잔가시 하나 남기지 않고 매끈하게 발라진 생선 살은 입 안에서 크림처럼 녹았다.

식사는 아주 간단한 대화만 오가며 진행되었다.

렉시우스는 극진하게도 애리얼을 살폈으나 말은 짧았다. 분명 용건이 있는 듯한데,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데본시아의 일이겠지?’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내심을 조심스레 짐작했다. 고위 마법을 쓰느라 무리를 해서 코피까지 흘렸던 그였다. 누굴 의식해서 왔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레이신, 그 다음은 데본시아.

레이신의 방문에 대해선 이미 추궁을 끝냈으니, 남은 건 데본시아다.

“저기, 선배. 아까는…….”

“나중에 얘기해.”

그가 말을 잘라 냈다. 차분하게 내리깐 금색 눈은 복잡한 메추라기 요리를 발라내는 데만 집중했다. 섬세하게 발라진 살코기가 애리얼의 접시 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오늘은 이름으로 불러 줘. 선배 말고.”

이례적인 요구였다. 애리얼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렉시우스.”

무표정하던 그가 짧게 미소를 지었다. 피식, 올라간 입꼬리가 찰나 부드러운 인상을 자아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그는 서늘한 얼굴로 돌아왔다.

왜 저럴까. 애리얼은 그의 모습에서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묻지 못했다. 물으려 들면 아까처럼 그가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한 시간 남짓한 긴 식사가 단조롭게 흘러갔다.

후식도 지나가고 식후 차가 테이블에 올려질 때까지 렉시우스는 중요한 이야기는 꺼내 놓지 않았다.

뭐 때문에 저렇게 뜸을 들일까.

애리얼이 먼저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렉시우스.”

그가 또 미끈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금세 감추지 않았다.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싱긋 미소를 유지한 채 애리얼과 눈을 맞췄다.

“듣기 좋네.”

식사 내내 질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무심하던 얼굴이었는데, 그녀의 부름 한 번에 만족스러운 포만함을 내비쳤다.

그 극적인 변화가 애리얼은 왠지 낯간지러웠다. 괜스레 찻잔을 내려다보며 그의 눈을 피했다.

“앞으로는 서로 이름으로 부를까? 선배 소리는 집어치우고.”

렉시우스의 저음이 꽤 달큼한 어투로 말을 걸었다. 정적에 가깝던 식사의 끝에 나온 가장 긴 문장이었다. 좀 더 친밀해지자는 제안.

애리얼은 난색을 표했다. 그의 호감도는 네 개. 가능하면 더 친근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 거리를 유지해야 예의 오버히트에서도 멀어질 수 있으니…….

그녀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선배라는 호칭이 싫었어?”

애리얼에게서 거절의 기색을 읽은 렉시우스가 불쾌해진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더니 긴 한숨을 쉬며 표정을 갈무리한다. 평소답지 않은 짙은 인내가 새겨진 얼굴이었다.

이윽고 자리를 비울 듯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걸음을 옮겼다. 문으로 향할 것 같던 그는 테이블의 맞은편으로 가 애리얼을 내려다보고 섰다.

윤기 나는 앞머리 사이로 흑회색의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렉시우스는 홀린 듯이 상체를 숙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애리얼이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자,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당겼다. 당겨진 애리얼의 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가 박혔다.

렉시우스의 품에서는 꾸밈없이 산뜻한 비누 향이 났다.

팔을 교차해 단단히 그녀를 감싸 안은 그가 끓듯이 애절해진 음성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이름으로 불러 줘, 지금 당장.”

그 단호하고도 애타는 듯한 부탁이자 명령에, 애리얼은 굳은 혀를 움직여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렉…… 시우스.”

“한 번만 더.”

“……렉시우스…….”

“떨거나 끌지 말고, 제대로.”

“렉시우스.”

세 번 만에야 만족한 듯, 그가 나른한 웃음을 터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