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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30)화 (130/264)

그의 숨결이 닿은 피부가 후끈거렸다. 애리얼은 긴장감에 손을 말아 쥐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쿵쿵거리는 적나라한 소리가 울렸다. 그녀를 향한 진한 감정의 증거. 애리얼은 숨이 막혔다. 그의 가쁜 심장 박동에 덩달아 자신의 심장도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렉시우스는 팔에 힘을 주어 애리얼을 끌어안았다. 애리얼은 반쯤 일으켜진 상태가 되었다. 그러길 몇 분, 애리얼이 반항하지 못하는 간절한 포옹이 겨우 끝났다.

단단히 지탱하던 그의 팔이 풀리자, 매달릴 곳이 없던 애리얼은 다리에서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렉시우스의 눈이 먹잇감을 보듯 애리얼을 향했다. 황금색 눈동자가 열기에 차 이글거렸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아쉬운 것도 같고, 다그치는 것도 같았다. 여러 가지 충동이 섞여 휘몰아치는 눈이다.

데본시아가 거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해 오던 그때처럼.

애리얼이 겁을 먹어 경직되자 그는 눈꺼풀을 꽉 닫아 제 감정을 감췄다. 그녀를 피해 애써 몸을 돌린 그가 근처의 호출 벨을 눌렀다.

보좌관이 바쁘게 뛰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저하.”

“오늘로써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의 구금을 끝내겠다. 추후 보고는 카스트로, 네가 알아서 해라.”

그의 발언에 애리얼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보좌관은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예.”

“아, 그리고 여기 창문도 고쳐 두고.”

“예. 오늘은 공녀님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내일 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뭐. 그런 세세한 건 알아서 하고.”

렉시우스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대충 보좌관을 물렸다.

그제야 그는 다시 애리얼을 보고 섰다.

애리얼이 놀란 동시에 의심이 서린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구금을 끝낸다는 거…… 정말이야?”

“그럼 보좌관까지 불러서 가짜로 말하겠어?”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더니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와는 몹시도 어울리지 않게.

“안녕, 애리얼.”

난데없는 마무리 인사였다. 여느 때와 달리 오늘의 그는 잘 자라고 하지 않았다.

그에 약간의 불안감을 느낀 애리얼이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매정한 뒷모습은 이미 문을 닫고 빠져나간 뒤였다. 뒤늦게 문고리를 쥐고 따라가려고 했으나 결계에 막혔다.

구금을 끝낸다고 해 놓고서 남겨 둔 결계에 애리얼은 놀라 물러났다.

“그냥 빈말이었나?”

애리얼이 중얼거렸다. 안녕이라는 인사가 불안했으나 남아 있는 결계를 보고서 내심 안심했다.

그제야 척척 쌓여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애리얼은 불을 끄고서 침대에 누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수많은 일들이 휩쓸고 간 끝에 찾아온 조용한 밤이었다.

많은 일을 겪어 무척 피곤했던 애리얼은 꿈을 꾸지 않았다.

까무룩 잠이 든 그녀는 다음 날 맑은 햇살과 선선한 바람에 눈을 떴다. 휑하니 빈 창문에서 바깥 공기가 기분 좋게 밀려왔다. 차가운 겨울의 향기.

애리얼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은 화창했다. 눈보라가 그친 하늘은 선명한 푸른색이었다.

그녀는 몽롱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그렇게 맑은 바깥을 주시하다가 번뜩 깨닫는다. 흑색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결계가 없잖아?”

홀연히 내뱉은 애리얼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문으로 향했다. 바람이 부는 바깥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창틀 밖으로 휙 손을 내밀었다. 손은 어디에도 막히지 않고 뚫린 창을 지나 바깥으로 뻗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로 스몄다. 크게 호흡을 내쉬니 새하얀 입김이 일었다.

정말로 결계가 없다.

애리얼은 곧장 문을 열고서 방을 나갔다. 역시나 그녀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렉시우스는 어젯밤 곧장 백작저를 떠났고, 그가 쳐 둔 결계도 오늘 오전 여섯 시경에 사라졌다. 구금이 정말 끝난 것이다.

황성에서도 공식적으로 허클리 백작 공녀의 구금이 종료되었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이로써 애리얼은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 마무리가 어쩐지 찜찜하고 의구심이 들어, 애리얼은 개운치 않았다. 백작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그녀도 이 이상은 아는 것이 없었다. 함구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애리얼에게 줄 정보는 없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한 달은 더 갇힐 줄 알았는데…….”

침대에 앉은 애리얼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밀크티를 타던 카논이 희한하다는 눈빛으로 애리얼을 보았다.

“설마, 더 갇히고 싶으셨어요?”

그녀의 물음에 애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구금이 일찍 끝난 게 이상해서.”

“그건 그러네요. 대공자 저하께서 심상치 않으셨는데 말이에요.”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거 같은데…….”

애리얼은 휴대폰을 켜서 그 행방의 실마리라도 찾아보려고 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아내려 합니다.)

▷현재 위치: -(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렉시우스는 지난밤 새 대략적인 위치 표시도 없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

도대체 어디를 간 걸까. 다른 공략 대상들이 멀쩡히 황성과 공작저에 있는 걸 보면, 그 혼자만 어딘가 간 듯한데. 대체 무슨 사정으로.

“안녕, 애리얼.”

어젯밤 심상치 않았던 그 작별 인사가 떠올랐다. 애리얼은 조바심이 나서 손톱을 세우고 휴대폰 모서리를 갉작거렸다. 카논이 따뜻한 밀크티 잔을 건넬 즈음에야 겨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복잡한 표정의 애리얼을 향해 카논이 슬그머니 정보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황자 저하께서 오셨어요.”

“저하께서? 왜?”

애리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반응했다. 카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 아가씨를 보러 오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병문안이라든가……. 아무튼 그렇게 오셔서는 무슨 연락을 받으셨는지 대공자 저하와 함께 나가시더라고요. 아가씨는 방문하지도 않고 가신 걸 보니 급한 일이었나 봐요.”

카논의 말에서 의외의 정보를 얻은 애리얼은 깊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숙였다. 분홍빛이 옅게 도는 연갈색 밀크티를 바라보며, 톡톡 잔을 두드렸다.

스카이라가 백작저까지 와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발길을 돌렸다니. 얼마나 어지간한 일이었기에 그랬을까. 렉시우스도 동행했다고 하니 고위 계급이 모이는 제국적인 중요사 때문일 게 분명했다. 아마도 황제의 호출, 혹은 그에 준하는 중대사.

‘그러고서는 렉시우스만 먼 곳으로 떠났다?’

애리얼의 검은색 눈동자가 첨예하게 빛났다. 남은 세 공략 대상과 다른 렉시우스만의 차별점이 뭘까. 이윽고 정답에 도달한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국 영웅…….’

렉시우스는 그렇게 불렸다. 그가 아카데미에 왔을 때, 사람들은 오랜만에 귀환한 영웅이라며 시선을 모았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전쟁 영웅이기에 불려 갔다. 아카데미 학년을 꼬박꼬박 채우며 순위표에 이름을 올리던 다른 귀족들과 달리 렉시우스의 이름은 한 학기씩 거르며 드문드문 등장한 것만 봐도 그렇다. 아카데미에서 그와 마주치자 종종 놀라는 교수들도 있었다.

그런 전쟁 영웅이 또 학기를 빠지고서 불려 갈 곳은 뻔하디뻔하다. 전장.

아직 끝나지 않은 남부 전쟁.

그의 행선지를 확신한 애리얼은 찻잔을 놓고서 일어났다.

“황성으로 가야겠어.”

***

데본시아는 긴 조회를 마치고 곧장 제 집무실로 향했다. 제라온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당분간 전쟁 건으로 소란스러울 테니 미리 조회 일정을 조율할까요?”

“괜찮아. 견딜 만해.”

“하지만 남부 전쟁이 쉬이 끝나지는 않을 테니 미리 업무를 안배해 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전쟁은 금방 끝나.”

“그래도 이 년은 더 가지 않겠습니까?”

“아니. 올해 안에 끝나.”

남부 전쟁은 올해로 7년째에 접어드는 전쟁이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무슨 연유로 그게 올해 안에 끝난다고 단언하는가. 제라온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전쟁 영웅인 대공자의 출정이 앞당겨졌다고는 하지만, 대공자가 최전선에 있을 때도 질질 끌렸던 전쟁이다. 그가 합류한다고 바로 끝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대공자 저하께선 이번에도 최전선에 서시는 겁니까?”

“그러겠지. 그래야 빨리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공자신데, 조금 더 후방에 서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제라온이 말끝을 흐리자 데본시아가 픽 웃었다.

“대공자가 죽을까 봐 그러는 거야?”

“제국의 일원으로서 가장 염려하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대공자 저하께선 전하의 측근이 아니십니까.”

제라온의 말에 데본시아는 묘한 미소를 흘렸다.

“대공자는 안 죽어.”

“……그렇습니까.”

“죽을 거였으면 진작 죽었지. 죽으라고 보내도 절대 안 죽을 텐데.”

데본시아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튀어나오자 제라온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복도엔 아무도 없었고, 둘의 걸음은 어느새 집무실에 다다랐다. 황태자가 보이자 문 앞을 지키던 호위들이 익숙하게 더블 도어를 열며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가 집무실로 들어가고, 제라온이 뒤따랐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집무실은 방음이 철저한 공간이었다.

제라온은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대공자께선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글쎄? 하나씩 칠 테니까 일 년을 통째로 비우진 않을 거고, 중간중간 오겠지.”

“어디부터 치신답니까?”

제라온이 한껏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황태자의 보좌관으로서 대공자의 행선지 정도는 파악해 두는 게 만약의 일을 처리하기에 좋았다. 혹시 모를 첩자나 배신자에게 가짜 정보를 흘릴 수도 있고, 작전에 지원할 수도 있을 테니까.

데본시아는 서류가 쌓인 책상을 나른하게 쓸어 내다가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진 말을 쥐고서 지도 위에 툭 올려 두었다.

“일단은 삼 왕국 중에 르젠부터.”

“르젠……. 가장 견고한 쪽부터 치는 겁니까?”

“그래야 빨리 무너질 테니까. 렉스라면 그렇게 하겠지.”

데본시아는 그를 잘 안다는 듯이 말했다. 실제로도 둘의 사고는 비슷하니까, 아마도 맞을 것이다.

제라온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르젠은 현재 삼 왕국 연합의 믿는 구석이었다.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뽐내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철의 요새라 불렸다. 여신의 가호라 일컫는 르젠의 결계는 르젠의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거기부터 친다고…….

“그렇다면 적어도 반년 이상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난 아직 근원 소멸기를 돌려받지 못했거든.”

데본시아의 말에 제라온은 머리칼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근원 소멸기를 돌려받지 못했다……. 그렇다는 말은, 대공자의 손에 근원 소멸기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 부하(負荷)가 어마어마한 물건을 쓸 생각이라는 거겠지.

서늘한 미소를 지은 데본시아가 남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길어도 두 달 안에 멸망시키고, 다시 아카데미로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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