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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31)화 (131/264)

전날 밤.

렉시우스는 솔렘 공작저를 방문했다. 정식 방문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은근슬쩍 후원에 발을 들인 그 행위는 따지고 보면 잠입에 가까웠다.

마수가 몰살당해 어수선한 공작저는 그의 능숙한 잠입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공작마저 황성에 출타한 상황. 오로지 레이신만이 그의 존재를 예민하게 느꼈다.

복도를 걷던 레이신은 인기척을 죽이며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마수의 피가 착색되어 얼룩덜룩해진 벽돌 길을 지나, 쥐 죽은 듯 고요한 정원을 가로질렀다. 후원의 가장자리, 숲이 시작되는 경계. 삼나무로 만든 퍼걸러의 안,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렉시우스가 보였다.

같은 빛을 띠는 황금색의 눈동자가 동시에 서로를 발견했다.

레이신은 망설임 없이 퍼걸러로 들어가 렉시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렉시우스는 검은 천에 싸인 길쭉한 물건을 의자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두며 레이신의 시선을 끌었다. 레이신은 근원 소멸기임이 확실한 그 물건을 쓱 훑더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르젠을 칠 거야.”

렉시우스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뱉었다. 군에서도 극소수 인원을 제외하면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보를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상대가 레이신이었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인간관계의 끝을 보여 주는 레이신은 이런 정보를 알려 준들 누설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 희한한 상황이긴 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다짜고짜 의자를 집어 던졌을 정도로 싫어하는 상대에게 이런 정보를 태연히 내뱉다니.

레이신은 렉시우스와 근원 소멸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근원 소멸기를 들고 와서 르젠을 언급하는 게 무슨 의도인지는 뻔했다.

“르젠……. 결계를 깨겠다는 거?”

“그래.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마수를 죽일 때 대가를 얼마나 치렀지?”

렉시우스가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레이신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지난 한 달을 회상했다. 이걸 어디부터 어디까지 얼마나 설명해야 할 것인가, 고민했다.

근원 소멸기는 명칭 그대로 물체의 근원을 파괴하여 완전히 소멸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냉기가 흐르는 날을 물체의 중앙에 찔러 넣는 것으로 발동시킨다. 그러면 물체는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줌의 재로 부스러졌다.

이렇듯 사용법이 간단했음에도 레이신은 근원 소멸기의 활용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그가 유체 몇 마리를 제외한 마수의 완전 말살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이었다. 사실 마수의 말살은 하루 안에도 가능은 했다. 그런데도 그가 마수를 한 달이나 걸려 처리한 것은 근원 소멸기가 지닌 부작용 때문이었다.

근원 소멸기는 사용한 만큼 사용자의 마력을 빨아들인다. 여기까지는 흔한 소모성 마도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요소에서 근원 소멸기는 다른 마도구와 큰 차이점을 보였다.

일반적인 마도구들은 먼저 마력을 부여받고, 마력을 부여받은 만큼 효과를 냈다. 반면 근원 소멸기는 먼저 효과를 발휘한 다음, 그 효과만큼의 마력을 사용자에게서 빨아 갔다. 채무자에게서 돈을 상환받듯이.

근원 소멸기는 제한 없이 무조건 발동해 효과를 냈고, 사용자는 효과를 본 만큼 무조건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랬기에 근원 소멸기는 위험했다.

만일 본인이 가진 마력 이상의 것을 부수었을 경우, 근원 소멸기는 모자란 마력만큼 피와 살을 빨아 갔다. 강하고 거대한 것을 부술수록 치러야 할 피의 대가가 커졌다.

여기까지는 렉시우스도 이미 아는 정보일 터. 렉시우스가 궁금한 것은 르젠의 결계를 부수고서 얻게 될 대가가 얼마나 될지 하는 거였다.

레이신은 잠깐의 회상을 끝내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한 달 동안 나눠 사용했기 때문에, 내가 치른 대가는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적은 피를 뽑히는 데 불과했어. 하루에 한 이백 밀리리터 정도? 심할 때도 깊지 않은 자상을 서너 차례 입는 수준이었고.”

“그럼 난 네가 한 달 동안 치른 대가를 한 번에 뽑히게 되려나?”

렉시우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확실하게 죽음에 이를 양이었다.

마수는 불멸이었고, 르젠의 결계도 지금까지 무너진 적 없었으니 불멸에 가깝다.

불멸인 것을 소멸시키는 데 드는 대가는 비슷할 것이다. 다만 르젠의 결계는 무척 거대하기 때문에 근원 소멸기가 요구하는 대가가 더 클 수는 있다. 그래도 마수 전체로 따지면 르젠의 결계에 비해 떨어지는 가치는 아니리라.

그렇다면, 르젠의 결계를 부술 때 요구될 대가는 레이신이 한 달 동안 치른 대가와 얼추 비슷하게 나올 것이었다.

그리고 렉시우스의 총마력량은 레이신과 비슷했다. 그러니 렉시우스에게서 저런 계산이 나오는 거겠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는 계산법이었다.

렉시우스는 죽음이 확실할 대가를 대략 가늠하고서도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 참 대단한 평정이었다. 열넷부터 전장을 구른 인간이기에 보일 수 있는 냉정함은 확실히 남다르긴 했다.

레이신은 두려운 기색 따윈 조금도 없는 제 친우를 보며, 마찬가지로 냉정한 견해를 내놨다.

“넌 체질이 있으니까 조금 더 버티겠지.”

“죽지 않을 거란 장담은 안 하네?”

“근원 소멸기의 대가 정산은 정확하고 가혹한 편이거든.”

“그 말은, 내가 뒤질 거라는 거?”

“아니. 대공가 특유의 체질 덕분에 죽지는 않겠지만 거기까지라는 거야. 결계를 부수면 체력이 다할 테니까, 넌 그걸로 끝. 적진에서 행동 불능 상태. 회복에는 적어도 일주일이 넘게 걸릴 거고, 거기다 특수 부대를 꾸려서 이동할 테니 인원수가 많지도 않을 테고. 수적으로 밀리기 시작할 텐데, 열세를 뒤엎을 네가 행동 불능 상태면 결계는 깨도 돌파는 불가능해.”

“웬일로 말이 기네.”

렉시우스가 언짢은 듯이 툭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레이신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레이신의 예측에 딱히 틀린 부분은 없었다. 냉철한 평가였다. 알았으니 그만큼 대비를 더 하면 된다.

한껏 부정적인 예측을 전한 레이신은 그 어떤 조언도 없이 입을 다물었다. 위험한 일에 나서는 렉시우스를 말릴 생각도 없었다. 가까운 관계이기에 무시하지 않고 대화를 나눴을 뿐.

레이신에게 익숙한 렉시우스 역시 그 점을 섭섭해하는 일은 없었다. 원하는 정보를 얻었으니 용건은 끝났다.

렉시우스는 의자 옆에 세워 둔 근원 소멸기를 집어 들고서 일어났다. 이제 곧장 르젠으로 갈 것이다. 다만 그러기 전에 한 가지.

“내가 없는 동안 애리얼을…….”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언급했다. 그녀의 이름에 레이신이 드물게 흥미를 느껴 시선을 마주한 순간에 뒷말을 내뱉었다.

“……건드리면 죽는다.”

“그러든가.”

꽤 살벌한 협박을 레이신은 태연히 받아쳤다.

렉시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나 싶더니, 금세 표정을 지우고 퍼걸러를 빠져나갔다.

***

황성 중앙관 응접실.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찻잔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초조해하는 얼굴로 차가워진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녀는 지금 데본시아를 기다리는 처지였다. 황성에 발을 들이자마자 황태자의 직속 시녀에게 안내받아 이 응접실로 밀어 넣어졌다.

‘분명히 황자 저하를 만나러 왔다고 말했는데…….’

아무리 방문 의도를 전해도 시녀는 듣지 않았다. 시녀뿐만이 아니었다. 황성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모르는 체 고개를 숙이고 데본시아의 곁으로 인도하기만 했다. 이미 데본시아의 명을 받은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애리얼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황성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데본시아와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나.

‘언제 이렇게 황성을 장악한 거지?’

애리얼은 뒤늦게 의문이 들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성이 이렇지는 않았다. 황성에도 절차가 있고, 철칙이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가 강대한 권력자라 한들, 이런 식으로 귀빈의 방문 이유마저 무시하고서 멋대로 고립시켜 두지는 않는다. 황제의 특명이라면 몰라도…….

서늘한 예감이 지나갔다. 애리얼은 소름이 돋으려는 목덜미를 느리게 문질렀다.

‘설마……. 아니겠지. 황제 폐하는 아직 젊으신 편인데…….’

황제가 위독하거나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 터다. 그녀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멀쩡히 공식행사에 다닌다고 신문에도 났으니 말이다.

구금으로 황성의 일은커녕 세간의 소식에도 무지한 그녀는 제 예감을 부정했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데본시아가 황위 찬탈을 꿈꾸지는 않으리라. 가만히만 있어도 어차피 그의 것이 될 자리인데. 설마, 설마…….

우우우웅-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어서, 똑똑, 짧게 두 번. 문 두드리는 소리에 애리얼은 고개를 들었다.

데본시아가 들어오고 있었다.

애리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차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깍듯한 애리얼의 태도에 데본시아는 씁쓸한 듯 미묘한 웃음을 흘리고는 소파에 앉았다.

“앉아도 돼.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도 없고.”

“네, 감사합니다.”

애리얼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응접실에는 시녀도 호위도 없었다. 오직 애리얼과 그, 둘뿐이다.

불편한 긴장감과 어색함이 감돌았다. 애리얼은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당장 어제, 욕실로까지 도망치며 피한 상대와 마주해 있다. 하트 다섯 개의, 오버히트 직전에 놓인 데본시아.

‘알아보려고 했던 것만 짧게 묻고 얼른 떠나자.’

원래 부담이 조금이라도 덜한 스카이라를 찾아 물으려 했는데, 일이 틀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 애리얼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서 왔습니다.”

“응.”

데본시아는 다정한 얼굴로 가볍게 대답했다. 그게 애리얼의 긴장감을 크게 부추겼다. 그는 공적인 관계로 대화를 진행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애리얼의 쪽에서 더욱 예의를 차려야 한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지 않게.

“대공자 저하께서 남부 전쟁에 출정하셨나요?”

“어떻게 알았어? 극비 사항인데.”

“그건…….”

휴대폰의 위치 정보를 보고 유추해 낸 거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어제, 대공자 저하께서 제 구금을 해제하시면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작별 인사…… 같은 말을 남기셨어요. 그것에 의구심이 들어 추측을 해 보다가 남부 전쟁에까지 생각이 닿았습니다.”

“그래?”

“혹시 억측이라면…….”

“사실이야.”

그는 태연히 인정했다.

애리얼은 아찔한 생각이 들어 순간 호흡을 멈췄다. 혹시 그가 렉시우스를 전장으로 보낸 인물은 아닐까. 달라진 황성의 분위기와 더불어 위험한 상상이 그녀를 자극했다. 황성 내 장악력이 강해진 데본시아가 혹여나 렉시우스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닐지.

“그러면 대공자 저하께서는 지금 전장에 가 계신 건가요?”

“아직은 아니고, 나흘 후에는 도착하겠지.”

“……최전선에 가실까요?”

“걱정 안 해도 돼. 렉스는 그 정도론 안 죽어.”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걱정을 알아채고서 렉시우스가 죽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다만 최전선에 선다는 물음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처럼 신분이 무척 높은 이가 최전선에 서는 게 흔치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았다. 실제로 데본시아와 스카이라를 비롯해 공작가의 자제들은 전장에 차출되지 않았다.

심지어 렉시우스 본인조차도 이 시기에 자신이 차출되리란 것을 몰랐던 듯했다. 황성의 명으로 애리얼의 구금을 주관하던 그였으니까. 설마하니 황성이 말을 번복하고 구금까지 중단시키며 전장에 던져 넣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렉시우스의 출정은 갑작스러웠다.

마치 누군가의 입김이라도 들어간 듯.

“혹시 전하께서는…….”

“아니. 내가 아니야.”

데본시아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애리얼을 향한 그의 두 눈동자에서는 서운함이 짙게 묻어 나왔다.

그가 렉시우스의 출정에 손을 쓰지는 않았는지, 애리얼이 의심한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애리얼은 당황하여 고개부터 숙였다. 의심에 불과한 것을 실제로 물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의심한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눈썰미 좋은 그가 알아챘다면 어정쩡하게 얼버무릴 바에는 사과하는 게 나았다.

“죄송합니다.”

애리얼이 저자세로 고개부터 숙이자, 데본시아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애리얼.”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데본시아가 이러는 건 잘 없는 일이라, 애리얼은 바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네.”

“날 너무 의심하지는 마. 나도 생각보다 꽤 상처를 받아.”

그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타이르듯 말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내 생각도 좀 해 달라고. 여유로운 척해도 속은 멀쩡하지 않다고.

“그러니까…… 나한테도 상냥히 대해 줘.”

그가 상당히 애절하게 들리는 부탁으로 말을 끝맺었다.

애리얼은 차마 그러겠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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