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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32)화 (132/264)

상냥하게 대해 주면 오버히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에게는 한순간의 서운함일지 몰라도, 애리얼에겐 원세계의 기억과 탈출이 달린 중대사였다. 당장 눈치가 보인다고 그의 요구에 응했다간 극단적인 엔딩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애리얼은 입을 닫고서 묵례만 했다.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모습에 데본시아는 피식 웃음을 지으려다 말았다.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불쾌했다. 알량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괘씸하여 괴롭혀 주고 싶었다. 감히 저를 밀어낼 생각 따윈 못 하도록.

‘아직은…… 아니야.’

데본시아는 무심코 그녀를 향해 뻗으려던 손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손이 거둬지고, 뒤늦게 애리얼이 고개를 들었다. 위협적인 기색을 감쪽같이 지운 데본시아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많이 걱정했어.”

“무슨, 아…….”

애리얼은 한발 늦게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탄식하듯 길게 말을 늘였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가 예상한 말을 순리처럼 꺼냈다.

“뒷수습을 전하께서 하셨다고 들었어요. 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너는 정말 한 치도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네.”

그가 말했다. 예측 못 한 대답이었는지 애리얼의 검은색 눈에 경계심이 가득 들어찼다. 어깨를 움츠린다. 그것도 그의 예상 안이었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반응을 속속들이 알았다. 자신에게 조금도 끌리지 않는 듯한, 몸서리치게 거부감을 느끼는 듯한 그녀의 저 냉혹한 반응. 정말 신기한 반응.

“그래서 예상 밖이야.”

그는 미려하게 웃었다. 뭇사람들을 홀리던 그 미소에 그녀가 조금도 홀리지 않을 것을 알고서도, 혹시나 해서.

하지만 역시나, 애리얼은 그의 미소보다 그의 말에 더 반응했다.

그녀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데본시아는 종종 애리얼을 매우 잘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건 매우 이상한 행동이었다.

애리얼은 이 세계에 오고서 그와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 많지 않은 시간에서마저도 그녀는 제대로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의심과 불안에 싸여 웅크린 채 그를 대했다. 항상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런데 대체 그가 자신의 무엇을 알고 저런 말을 하는가.

뒷조사를 했다고 해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늘 집 안에 틀어박혀 은둔 생활을 한 유령 같은 과거뿐일 텐데. 그는 애리얼이 과거와 어울리지 않게 꽤 유창한 말투로 예를 갖추는 것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어떻게 알고 있을까.

왜 하트가 다섯 개일까…….

의문으로 점철된 위험한 인간. 그 의중을 헤아릴 수 없어 대하기 힘든 인간. 믿을 수 없는 인간.

“그게 그렇게 소중해?”

애리얼은 돌연히 뇌리를 스치고 간 목소리에 얼굴을 굳혔다.

백지나 다름없는 기억에도 선명하게 떠오른 과거의 음성. 분명 아는 사람의 음성인데 그 음성으로 하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 기억은 대체 뭘까.

“안색이 나쁘네.”

기억과 같은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켰다. 데본시아가 나른하게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억지로 태연한 척을 했다. 자신이 모종의 기억을 떠올린 걸 그에게 들켜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살짝 어지러워서요.”

“그럼 조금 쉬다 가.”

“아뇨, 괜찮아요.”

애리얼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애리얼, 앉아.”

여느 때처럼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애리얼을, 그가 말로써 저지했다.

애리얼은 숙였던 몸을 세우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조금의 반항심도 없는 그녀의 반응에 데본시아는 기이한 표정을 했다. 웃고 있는데 묘하게 싸늘한,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분명한 얼굴.

제가 함부로 자리를 비우려 해서일까. 하지만 그는 이런 일에 늘 관대했었다. 떠나겠다고 하는 애리얼을 억지로 붙잡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행동한 것뿐인데.

“함부로 자리를 비우려 해서 죄송합니다.”

애리얼은 눈치 빠르게 사과부터 건넸다. 이어서 묵례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손을 내밀어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애리얼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차갑게 빛나는 오드 아이가 눈웃음을 지었다.

“다른 할 말은 없어?”

“없습니다.”

“왜 없어? 스카이라, 만나게 해 달라고 말해야지.”

매우 유려한 어투였으나, 애리얼은 그 안에 담긴 가시를 느꼈다.

오늘의 데본시아는 기분이 상당히 저조한 모양이었다. 까딱하면 사고라도 크게 터트릴 것만 같았다.

‘질투라도 하는 건가?’

대강 짐작한 애리얼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괜찮습니다. 궁금했던 건 전하께 모두 들었으니, 황자 저하를 만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스카이라는 백작저에 따로 불러들여 시험에서의 일에 대한 감사만 전하면 된다. 스카이라도 데본시아의 눈길이 시시각각 닿는 황성보다는 백작저를 편하게 여길 것 같았다.

“필요 없다……. 그러면 나는 필요해?”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답변을 곱씹어 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여기서 필요하다고 답하면 하트가 올라갈까? 애리얼은 자신이 위험한 순간에 직면했음을 느꼈다.

“……필요한 정보를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적당히 둘러대자 데본시아가 소리 내 웃었다. 기분이 풀린 건가. 애리얼은 눈동자를 굴리며 그를 살폈다. 그리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듯한 표정이 보였다.

“너도 꽤 말재주가 늘었네.”

그가 기특하다는 듯 칭찬했다. 어쩐지 비꼬는 것도 같았다.

“네……. 감사합니다.”

애리얼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사이 데본시아는 능청스럽게 애리얼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맞은편 소파는 그의 부재로 휑하니 비어 버렸다.

애리얼은 괜히 의식하며 몸을 물렸다. 그녀가 느끼는 불편함이 티가 날 정도로 거리가 벌어졌으나 데본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더없이 불편해할 소리를 툭 던졌다.

“날이 늦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자고 가.”

이게 무슨 소린가.

애리얼은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날이 늦지도 않았는데, 자고 가라니? 황성에서? 아직 오전인데?’

황당함에 물든 눈동자로 옆에 앉은 데본시아를 뚫어지게 보았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에도 그는 웃기만 했다. 말을 정정할 생각도, 그녀를 이해시킬 생각도 없어 보였다.

황성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애리얼은 거절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돌아가겠습…….”

“하루 있다가 가. 부탁이야.”

“하지만…….”

“거절하면 명령이 될 거고.”

“…….”

결국 선택지는 없다는 소리였다. 할 말이 없어진 애리얼은 침묵하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울며 겨자 먹기나 다름없는 수락에도 그는 기꺼운지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흔쾌히 머물러 줘서 고마워. 기쁘다.”

“아, 아니에요…….”

그의 뻔뻔함에 애리얼은 말을 버벅거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강요해 놓고서 받는 승낙이 기쁠까. 그녀는 제 옆얼굴을 뚫어지게 보는 그의 시선에 슬그머니 눈을 맞추며 마지못해 예를 갖췄다.

“……영광입니다.”

“응. 자주 놀러 와.”

데본시아는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모르는 체 능청을 떨며 호출 벨을 눌렀다. 이윽고 그의 직속 시녀가 응접실 문을 세 번 두드리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귀빈께서 머무실 객실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오늘 하루 내 귀빈을 잘 모시렴.”

“예.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시녀가 머리를 조아리며 애리얼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방도 내가 안내해 주고 싶지만, 일을 미루고 온 거라……. 아쉽지만 난 이만 가 볼게.”

아쉬운 듯 느릿하게 소파에서 일어난 그가 애리얼에게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배웅한답시고 덩달아 일어난 애리얼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벽을 치듯 구는 애리얼의 모습에 데본시아는 순간적으로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산뜻하게 인상을 펴고서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이따 봐, 애리얼.”

***

애리얼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구경하기가 겁날 정도로 고가의 물품들로 가득 채워진 장소였다.

창밖으로는 황성의 자랑인 화려한 정원의 전경이 보였다. 원한다면 창밖으로 발을 내디뎌 곧장 정원을 거닐 수도 있었다.

‘왕족에게 내주는 귀빈실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얼마나 특별 취급을 해 주는지 속이 다 켕겼다.

애리얼은 하릴없이 발끝만 까딱이다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 관리된 중앙관의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겨울인데도 여전히 푸릇함을 자랑하는 조경수 위로 얇게 눈이 덮여 있었다. 슈가 파우더를 뿌린 것 같은 매력적인 풍경에 애리얼은 멍하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지이이잉-

휴대폰의 진동음과 함께 문득 소란스러운 광경이 그녀의 시야를 침범했다.

누군가가 거친 걸음으로 정원에 들어섰다. 윤기 나는 금발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검은색 정복이 하얀 정원에서 도드라졌다. 스카이라다. 성큼성큼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의 뒤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보였다. 왕녀인 헬레나였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를 다급히 쫓은 헬레나가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스카이라가 그 손길을 세게 뿌리치며 몸을 틀었다.

둘은 실랑이를 벌이는 듯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창밖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장면에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살짝 열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공녀를 좋아하시잖아요!”

헬레나가 어깨까지 바들바들 떨며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래서 뭐?”

그에 응답하는 스카이라의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라니……. 저하! 저한테 너무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하…….”

스카이라는 갑갑한 듯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만 이야기하고 싶은데.”

“싫어요! 전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어요! 서운했던 것도, 치욕스러웠던 것도 다 참고 있었는데!”

“얘기하기 싫다고 했어.”

“아니, 안 돼요! 이렇게는 못 끝내요. 오늘에야말로 확실히 약속해 주셔야겠어요.”

“뭘 확실히 약속하라는 거야? 스토킹도 모자라 음식에 이상한 걸 섞고, 내 물건에 기괴한 마법을 걸어 놓는 걸 못 본 체 덮어 준 거로는 만족이 안 돼?”

스카이라의 입에서 충격적인 내용이 흘러나왔다.

설마 저런 짓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애리얼은 얼굴을 굳혔다. 들어선 안 될 걸 들은 기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창문 너머로 해명할 생각도 없이 당당한 얼굴을 치켜든 헬레나가 보였다.

“그래서요? 제가 그런 짓을 벌일 만큼 확신을 주지 않은 건 바로 황자 저하시잖아요!”

비명처럼 높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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