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경악했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할 수가 있을까. 왕녀는 스카이라가 한 이야기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탓에 이럴 수밖에 없었다고 책임을 전가했다. 경악을 넘어 오싹해지는 발언이었다. 왕녀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정당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 저런 행동들이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사라지지는 않을 거란 소리다.
애리얼은 저런 사람과 약혼해야 하는 스카이라의 처지가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나서서 개입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애리얼은 이번 일에서 철저하게 외부인이었다. 나설만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스카이라와 만나는 건 오히려 스카이라에게 안 좋겠지?’
당연한 말이다. 애리얼은 애써 시선을 돌리고 창문을 닫았다. 그녀의 힘없는 걸음이 소파로 돌아갔다.
이왕이면 얼굴을 보고 감사를 전하는 게 도리겠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설령 공식적인 일정을 잡아 감사를 전하기만 하는 자리라도 왕녀는 자극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왕녀는 또다시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고, 그 뒷감당은 오롯이 스카이라의 몫으로 넘겨질 게 뻔했다.
‘감사는 선물과 서신만으로도 할 수 있어.’
다소 성의 없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는 편이 스카이라의 입장에서도 문제가 덜 생겨서 편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러니 이게 옳다…….
수없이 생각하면서 애리얼은 걸음을 옮겼다. 닫혔던 창을 환히 열고서 창틀을 넘어갔다. 하얀 정원 길을 디디며 한창 대거리 중인 두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몸이 움직였다.
왕녀의 고성이 귓전을 때렸다.
“최소한 저를 사랑해 보려는 노력이라도 하셨……!”
애리얼은 스카이라에게 삿대질하는 헬레나의 손가락을 조심히 막았다. 한창 열이 올라 소리치던 헬레나가 얼이 빠진 채 입을 다물었다.
“왕녀님, 중앙관에는 늘 감시가 있습니다.”
애리얼로부터 중요한 사실을 들은 헬레나의 눈이 뒤늦게 날카로워졌다. 잔뜩 긴장한 연녹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이 일이 흘러 나가면 그녀는 평판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태연한 척, 연기해야 했다.
“공녀……. 황성에는 언제?”
“오늘 왔습니다.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황성에 온 걸 보니 중요한 용무가 있는 것 같은데, 여긴 왜 끼어들었을까?”
“근처 객실에 머물다가 왕녀님의 음성이 들리기에…….”
“오지랖이 넓네.”
평소와 같이 유약한 얼굴을 꾸며 낸 헬레나가 목소리를 낮추곤 적대적으로 쏘아붙였다. 바짝 숙이던 이전과 다르게 애리얼을 하대하는 말투였다.
애리얼은 그녀의 태도 변화를 특별히 놀라워하지 않았다.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네, 무례했어요.”
헬레나가 까칠하게 단언했다. 그 순간 스카이라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야, 지금…….”
그는 왕족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말아 먹고서 으르렁대며 끼어들었다. 당장 욕이라도 뱉을 듯한 말투였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그 손의 덕택인지, 그의 거친 언사는 다행히 튀어나오기 전에 멈췄다.
애리얼은 일부러 스카이라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를 비스듬히 등지고서 헬레나만 주시했다. 자신을 훑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모른 체했다.
헬레나는 그 광경을 불쾌해하며 보다가 표정을 가라앉혔다. 의외로 냉정한 반응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어 온 거겠죠, 공녀.”
“네.”
“좋아요. 한번 말해 봐요.”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뭐죠?”
“황자 저하와 왕녀님께서 나누시던 대화를, 본의는 아니나 엿듣게 된 점 사과드리며 여쭙습니다. 저하의 음식에 이상한 걸 넣고, 저하의 개인 물건에 무단으로 마법을 걸고, 저하를 스토킹했다는 게 정말인가요?”
“이상한 오해를 하시네요, 공녀. 무례합니다.”
당당하던 기세는 어디 가고 헬레나는 시치미를 뗐다.
“그렇다면 황성에다 확실히 해명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감시들이 방금 왕녀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전부 기록했을 것입니다.”
“뭐라고요?”
헬레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바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그녀의 불안을 말해 줬다.
애리얼은 지금이 기회임을 느꼈다. 앞으로 왕녀가 극단적인 행동을 못 하도록 불안감을 증폭시켜 둬야 했다.
“왕녀님께서는 기품 있는 분이시니 감시들도 과장이라 치부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조사를 하긴 할 거예요.”
“그런……. 어떻게 확신하죠? 당신이 뭘 안다고?”
“저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해 봐서 알아요.”
의심하는 헬레나를 향해 애리얼은 덤덤하게 사실을 전했다. 황실은 이미 헬레나의 행태를 다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당장이라도 황성에서 도려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 쓸 만한 대상이기에 눈감아 주고 있는 거겠지.
잘은 몰라도 플라넬 왕국은 제국의 중요한 충신이자 동맹이고, 헬레나는 그런 나라의 왕녀다. 그녀는 황실에서 함부로 내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런 이에게 감시를 붙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헬레나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감시라니? 황성의 감시를 말하는 거예요?”
“네. 황성의, 그것도 중앙 권력에 가까운 인물의 감시를 받았어요. 그러니 제 조언은 도움이 되실 거예요.”
“그걸 어떻게 믿…….”
기세 좋게 쏘아붙이려던 헬레나가 돌연히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백작 공녀는 최근 황성에서 내린 구금 처분을 받았다고 했었다. 정확히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백작 공녀가 황실의 처분 아래 구금을 당한 것은 확실했다.
그런 황성의 감시를 온몸으로 받아 본 경험자가 하는 이야기라 생각하니, 아까의 이야기도 신빙성이 있었다. 오히려 경험담 같아서 두렵기까지 했다. 헬레나는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무슨 조언을……. 지금부터라도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는 건가요?”
“왕녀님께서는 이제 황실에 반쯤 발을 들인 분이시니, 조심하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아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렸습니다.”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단호히 말했다. 헬레나는 현재 스카이라가 하는 말을 냉정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다른 관계자들은 왕녀의 지위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상황으로 보였다.
그러니 그나마 애리얼이 말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왕녀가 견제하는 대상이며 무시하기 힘든 대상이기에.
헬레나는 차마 반박하진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몸을 홱 돌렸다.
“저하. 저는 저하를 사랑해요. 하지만 가끔은…… 지쳐요.”
떠나기 전, 왕녀는 마치 자신이 스카이라와의 관계에서 우위라도 점한 듯이 말했다. 스카이라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한 귀로 흘려 넘겼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헬레나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로 직진해 정원을 빠져나갔다.
애리얼은 왕녀의 태도를 의아하게 여겼다. 자신을 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카이라에게도 묘하게 뻔뻔스러운 것이,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생긴 듯하다.
‘황자인 스카이라에게 저렇게 굴 정도면…… 황제 폐하의 비호라도 받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스카이라는 여전히 헬레나를 냉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헬레나에게 거친 욕도 서슴없이 뱉으려 했다. 왕녀가 실제로 황제의 비호를 받고 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언행이었다.
그러니 왕녀의 믿는 구석은 적어도 황제는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잠시 움직임이 멈춘 애리얼을 스카이라가 돌려세웠다. 줄곧 외면하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애리얼은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스카이라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어디 아픈 덴 없지?”
대체 언제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스카이라는 거의 한 달도 전의 시험과 그때 입었던 부상을 걱정하는 듯했다. 애리얼은 그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한 건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이젠 아무렇지 않아요.”
“……응.”
“그날은 감사했습니다.”
“뭐가? 아…….”
스카이라는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묻다가 뒤늦게 떠올랐는지 탄식과 같은 소리를 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하께서 다른 도전자들을 지켜 주셨다고 들었어요.”
“그거야 뭐…….”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애리얼이 진중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으나, 스카이라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일에 대해선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좀체 생색을 못 내는 그의 성격 탓인가 싶기도 했다.
애리얼은 슬그머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듯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리얼은 이쯤에서 물러나야 함을 느꼈다. 당사자가 딱히 감사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데 계속 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니까.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저하.”
“그럴 거면 왜 왔어.”
“……네?”
“이러고 설명도 없이 갈 거면서, 왜 끼어들었냐고.”
새파란 눈동자가 매섭게 타오르며 추궁의 기색을 띠었다. 어느샌가 뻗어진 그의 손이 애리얼의 손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왕녀를 걱정해서 이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이유가 뭐야?”
스카이라가 애리얼에게로 맹렬한 시선을 맞부딪쳐 왔다. 그 눈빛에 스며 있는 기대감을 읽은 순간 애리얼은 얼어 버렸다.
‘내가 왜 끼어들었지?’
도의적인 이유였다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머리는 찰나의 순간 백지가 되었다. 당황한 심장이 쿵쿵 빨라지기 시작했다.
스카이라는 다급하게 채근했다.
“왜, 왕녀의 말을 막은 건데? 내가 상처받을 걸 염려했어? 날 걱정한 거야?”
그의 눈빛에 드러났던 기대감이 이제는 그의 입을 타고 말로써 흘러나왔다.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손목을 세게 감싸 쥐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저를 걱정한다고 말해 준다면, 신경 쓰인다고 말해 준다면, 왕녀와의 약혼 논의 따윈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었다. 그 후환이 어떻든, 전부 감당하고 왕녀를 당장에 치워 버릴 것이다.
그녀가 말해 주기만 한다면…….
“제국민으로서 누구나 염려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국민으로서. 애리얼이 그렇게 답하자, 스카이라는 실망감을 숨기지 못했다. 애리얼은 자신의 행동이 누구나 가질 보편적인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단언하고, 선을 그었다.
그런데도 스카이라는 혹시나 하는 바람을 버리지 못해 자꾸만 물었다.
“하지만 그 어떤 제국민도 그런 마음을 행동으로까지 실천하지는 못해. 이렇게까지는…… 안 해.”
“……건방지게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아니, 혼내려고 한 게 아니야. 난 그냥…… 기뻐서…….”
스카이라가 뺨을 붉히며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섬세한 속눈썹 아래 이리저리 구르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아뿔싸. 애리얼은 낭패감을 느끼고서 불안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곳은 황성이다. 스카이라는 아직 왕녀와 혼담이 오가는 관계고, 애리얼은 외부인이었다. 그런데 그와 엮이는 건 안 될 일이다. 적당히 거리를 둬야 했다. 그래야 큰 구설수가 없을 것이다.
애리얼은 해명할 거리를 찾아 바쁘게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기쁘셨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혹여 실례를 저지른 건 아닐까 마음을 졸였는데……. 왕녀님께서도 제 무례를 이해하시고 수긍하셨으니, 이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스카이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간지러운 감정을 지니고서 수줍게 내리깔았던 두 눈은 살얼음이 낀 것처럼 차가워졌다.
“그 말은, 너…… 나더러 이 약혼을 이어 가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