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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34)화 (134/264)

애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스카이라는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었다. 그 사실이 너무 서운해서 그는 분노까지 느꼈다. 최근엔 거리가 좀 생겼지만, 그전까지는 서로 수업도 같이 듣고 식사도 함께 하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저런 왕녀와 약혼을 이어 가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고…….

화가 나 따지려던 그는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먼저 거리를 두고 왕녀와의 약혼을 성사시킬 것처럼 굴었던 게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는 걸.

혀끝에 맴돌던 분노는 순식간에 갈 곳을 잃었다.

그는 여태 그녀에게 제 감정을 제대로 전한 적조차 없다. 그런 주제에 먼저 거리를 벌렸고, 아카데미에선 아예 모른 체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망이라니.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애리얼이 왕녀의 지나친 발언을 듣고 나서 준 건, 한때 가까웠던 상대에게 보이는 도의적인 행동에 불과했을 텐데. 그런 행동에 멋대로 기대를 품고 좋을 대로 해석한 것은 그였다.

그러니 이제 와서 아까 그녀가 한 말이 아쉽다고, 서운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 추천인이라는 관계성마저 사라진 지금에는…….

그런데도 서운하다. 그녀의 행동을 꼬투리 잡고 싶었다.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저를 봐 달라고 다그치고 싶었다. 어린아이처럼 유치해진 마음을 모두 꺼내서 애리얼이 죄책감에 휩싸이도록. 그리하여 그녀가 저를 안타깝게 여기고 밀어내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스카이라는 홧김에 제 마음을 모두 뱉어 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지금 말해 봐야 뭐 할까. 왕녀도 정리하지 못한 그가 하는 고백이 진중하게 들릴 리가 없었다. 가까스로 그 충동을 삼켜 내느라 세게 깨문 아랫입술이 찢어졌다. 피의 비린 맛이 끔찍하게 느껴졌을 때, 그는 애리얼을 등졌다. 왜 그녀가 황성에 있는지 묻는 것도 잊은 채, 빠르게 그녀의 곁을 벗어났다.

혼자 남은 애리얼은 차마 그의 뒤를 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금은 훈훈할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던 재회는 처참하게 끝이 났다.

애리얼은 터덜거리며 왔던 길을 돌아와 열린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매우 저조했다. 창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자주 하는 도피 방법이었다.

***

“식사도 안 하고, 이렇게 자면 편해?”

조용한 방을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

애리얼은 잠에 취해서 그 목소리를 들었다. 선명하게 들리지만, 대답은 하기 귀찮았다. 좀 더 자고 싶었다. 어차피 꿈이겠지. 몽롱한 정신으로 가벼이 치부했다. 아무렴 황성인데 누가 침입했으려고.

태평히 생각하는데, 스르륵, 침대 시트를 문지르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애리얼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일어났어?”

주변이 어둑한 가운데, 창밖에서 넘어온 달빛에 남자의 얼굴이 희게 보였다. 애리얼은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색이 다른 눈동자가 그의 신원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기야 애리얼이 있는 방을 이렇게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은 그밖에는 없었다.

“데본시아…….”

꿈결처럼 느껴지는 그의 얼굴이 아주 미려하게 웃었다.

“나, 보고 싶었어?”

“……아니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거부를 표현하자 그가 하하 웃어 버린다.

그 웃음소리에 애리얼은 정신이 차려졌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데본시아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찼다. 침대에 걸터앉아 제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서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모습이.

애리얼은 발작하듯이 상체를 일으키고서 뒤로 물러났다.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쌕쌕거리며 숨을 뱉어 내는데 그는 태연하게 웃고만 있었다.

“진정해.”

친절히도 건네진 말에 애리얼은 마법처럼 차분해졌다.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그가 꺼낸 언령이었다. 강압적이지는 않고 상냥한 투였다.

덕분에 겨우 침착해진 애리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여기 계세요?”

“이따 보자고 했잖아.”

그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고, 애리얼은 아까 응접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서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잊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서운하네. 내 말도 잊고 이렇게 태평하게 자고 있다니.”

“죄송합니다…….”

애리얼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기운도 빠지고, 그를 상대하기 귀찮았다. 사과 빼고 할 말도 없었다. 그녀는 약속 아닌 약속을 잊고 뻔뻔하게 누워 잔 예의 없는 초대객이 된 처지였다.

물론 자는 사람을 깨울 생각도 하지 않고 몰래 침대 옆을 지키고 앉은 그도 께름칙하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미리 알려 주시지 그러셨어요.”

볼멘소리를 툭 하자, 그가 낮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애리얼은 뒤늦게 제 입을 막았다. 아직 정신이 덜 깨서 실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 말이 맞아. 미리 알려 줄 걸 그랬어. 나랑 만나야 하니까 딴 데로 새지 말고 정신 잘 붙들고 있으라고…… 말이야.”

데본시아는 웃음기 밴 말투로 묘한 이야기를 했다. 어딘지 의미심장한 단어 선택에 담긴 속뜻을 애리얼이 눈치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고 계셨어요?”

“뭘?”

“제가 오전에 황자 저하와 왕녀님 사이에 꼈던 거요.”

“음……. 뭐, 내가 모를 수는 없겠지?”

그는 일부러 능청을 떨었다. 의문문으로 끝맺는 그의 음성에 묘하게 가시가 있었다. 그 일로 심기가 틀어졌음이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애리얼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오늘 내내 사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첨예한 계급 구도에서 바닥에 깔린 자의 설움이었다. 원래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감정인데,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데본시아에게 이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랬는데도 귀신같이 눈치가 빠른 그는 은근하게 다정한 표정을 하고서 애리얼을 보았다.

“반말하고, 짜증을 내도 괜찮아.”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러고 싶은 표정이던데?”

“…….”

“화나 보여.”

그가 웃으며 애리얼을 살살 떠봤다. 애리얼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닙니다.”

“나한테 풀어도 돼.”

데본시아는 늘 요구하던 것을 오늘도 종용했다. 자기를 막 대하길 원하는 건지. 그게 되레 애리얼의 경계심을 사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질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만은 그렇게 굴고 싶지 않은 애리얼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데본시아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질척거리지는 않았다.

“싫으면 할 수 없고.”

담백하게 말한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용건은 이게 끝인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물러나 다행이다 싶었다. 긴장이 풀린 애리얼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머리맡으로 환한 달빛이 쏟아졌다.

‘시간이 얼마나 됐으려나…….’

애리얼은 자신이 아직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배도 고팠다. 그런데도 일어나기가 귀찮았다. 흘러가는 모든 게 막연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졸음이 몰려와 눈꺼풀이 감기는 건 당연한 순서 같았다.

다시금 방문이 열렸을 때, 애리얼은 잠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겨우겨우 게슴츠레 눈을 뜬 그녀에게로 데본시아가 걸어왔다. 그가 다가올수록 식욕을 자극하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그는 간단한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침대에 놓고서 그 옆에 앉았다.

“먹고 자.”

그가 침대 옆 협탁의 스탠드를 켜며 말했다. 주황색의 조명 빛에 트레이에 담긴 음식이 먹음직하게 드러났다. 구운 호밀빵 두 조각과 향이 진한 양송이수프.

안 그래도 허기진 배를 더 허기지게 만드는 먹음직한 향기에 애리얼은 비몽사몽인 정신을 떨치며 몸을 일으켰다.

데본시아가 헝클어진 애리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쓱쓱 빗겨 주고는 스푼을 들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부터 애리얼은 잠이 싹 달아났다. 설마 황태자라는 인간이 식사를 직접 떠먹여 줄 생각인 건가.

“제, 제가 할게요.”

“정신도 못 차리는 거 같은데, 내가 해 줄게.”

“이제 정신 차렸어요!”

애리얼이 기겁하며 외쳤으나 데본시아는 싱글거리며 수프를 떠서 후 식혀 주기까지 했다.

“크게 뜨겁진 않을 거야.”

그가 애리얼의 입가로 스푼을 내밀었다. 식욕을 돋우는 향기가 비강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선뜻 받아먹을 수 없었다.

“나, 팔 아픈데.”

애리얼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나긋하게 채근했다. 애리얼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벌려서 그가 떠 주는 것을 받아먹었다. 수프는 눈물 나게 맛이 좋았다.

데본시아는 아주 지극정성으로 애리얼을 먹였다. 호밀빵을 잘게 찢어서 입에 넣어 주고, 수프는 반드시 한 번 식혀서 내밀었다. 평생 남에게 음식을 떠먹여 줄 일 없었을 황태자가 어떻게 이 정도로 정성스러울 수 있는지 신기했다.

트레이에 담긴 요리를 기어코 제 손으로 다 먹인 그가 애리얼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애리얼은 괜히 멋쩍어서 시선을 피했다.

“……전하께서는 안 드세요?”

“나? 나는 아까……. 아, 후식을 잊었네.”

그는 대답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딴소리를 하며 마법을 썼다. 시트 위에 놓여 있던 트레이가 치워지고 새로운 트레이가 소환되었다. 두 개의 하얀 찻잔에 핫초콜릿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한 잔은 제 손에 들고 나머지 한 잔을 애리얼에게 건넸다.

초콜릿의 향기는 졸음을 불러올 정도로 몽롱하게 달았다.

애리얼은 따끈한 온기가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서 물었다.

“코코아인가요?”

“아니, 녹인 초콜릿을 크림에 섞은 거야.”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짙은 색의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농도가 코코아보다 훨씬 진하고 끈적끈적했다. 뇌가 녹아 버릴 정도로 달아서 몸서리가 쳐졌다.

흠칫 놀라면서도 한 입을 더 맛보는 애리얼을 보며 데본시아가 빙긋 웃었다.

“먹을 만해?”

“네. 괜찮아요.”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네 입에는 맞아서.”

그가 핫초콜릿을 한 모금 마시며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단걸 좋아하거든.”

느닷없이 제 기호를 고백한 데본시아가 제 입술에 남은 초콜릿을 혀로 핥아 냈다.

애리얼은 소스라치게 단 초콜릿을 입에 머금고서 그를 보았다. 이 정도로 단걸 좋아하다니. 신기했다. 그와의 식사 횟수가 적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애리얼은 여태 그의 기호를 몰랐다.

“조금 의외시네요.”

“많이들 그러더라. 나랑 안 어울리나?”

그가 애리얼의 의중을 묻듯이 시선을 보냈다.

“아뇨, 그렇지는…….”

“넌 어때? 단거 좋아?”

데본시아는 갑작스럽게 말을 끊고서 질문을 던졌다. 애리얼은 잠시 멀뚱하게 그를 보다가 이내 입을 움직였다.

“저도 좋아해요.”

“응, 나도 좋아.”

그가 산뜻한 미소로 화답하며 오해를 부르는 대답을 했다. 이미 말해 놓고 또 굳이 반복하다니. 대화의 뒷부분만 뚝 떼서 보면 서로 고백이라도 주고받은 것 같았다.

애리얼은 불편함을 숨기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애리얼은 참 매정하다니까.”

데본시아가 놀리듯 말했다. 말투만 그렇지 매정하다는 소리 자체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의 신비로운 눈동자는 비를 맞은 짐승처럼 처량하다가도 짜증 나는 작업을 마주한 행정관처럼 못마땅해졌다.

전부 애리얼을 향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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