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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35)화 (135/264)

데본시아는 찻잔의 핫초콜릿을 다 비운 뒤 트레이를 직접 들고서 방을 나갔다. 군림하기 좋아하는 그답지 않게 모든 것을 손수 했다.

애리얼은 안절부절못하며 그 광경을 보다가 직접 하겠다며 나섰다. 그러나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그의 손에 다시 침대에 앉혀지고 말았다.

“부러웠거든.”

데본시아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애리얼이 쳐다봐도 그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묵묵부답이다가 문을 나설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자, 애리얼.”

자상한 목소리였다.

그 때문에 애리얼은 공교롭게도 렉시우스를 떠올렸다. 조금 거친 말투로 잘 자라며 인사하던 그의 모습을, 데본시아가 제 방식대로 따라 하는 것만 같았다.

허. 어이가 없어서 애리얼은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다행히도 문은 닫힌 후였다.

데본시아가 부럽다던 건 렉시우스의 이야기였다. 감시인이라는 명목으로 사용인까지 무르고서 구금된 애리얼을 독차지했던 렉시우스가 부러워서 오늘의 일을 벌였다.

애초에 그 자신이 렉시우스를 처벌 담당자로 명했으면서.

애리얼은 괜스레 휴대폰을 꺼내어 그의 하트 다섯 개짜리 호감도를 확인하고서 그날 밤 잠을 설쳤다.

***

새벽이 밝아 오는 어슴푸레한 시각에 겨우 눈을 붙였던 애리얼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늦게 기상한 애리얼의 앞으로 시녀가 점심이 담긴 트레이를 가져다주었다. 별로 배고프지 않았지만 애리얼은 꾸역꾸역 식사를 마쳤다.

다행히 데본시아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황성의 실세가 되어 가는 황태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같았다.

애리얼은 그 틈을 타 빠르게 중앙관을 빠져나갔다.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황태자의 허락이 떨어진 사안인 모양이었다. 정문에는 이미 그녀를 태울 차가 도착해 있었다. 애리얼은 조금 맥이 빠진 채로 차에 올랐다.

렉시우스는 남부 전쟁의 최전선으로 가게 되었다. 데본시아는 그가 죽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 정도 전쟁은 렉시우스를 죽일 수 없다는 투였다. 애리얼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라기보단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했다. 어딘지 못마땅해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애리얼은 설득되었다.

데본시아가 살짝 아니꼽게 여길 정도로 렉시우스는 강하고, 그렇기에 죽지 않고 귀환할 것이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죽음을 냉소적일 정도로 단호히 부정하던 데본시아를 상기하며 걱정을 눌렀다. 아는 이가, 그것도 꽤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 전장으로 갔다는 사실은 당연한 걱정을 불러와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솔렘의 시험에서도 느꼈던 상실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비슷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 피로해 애리얼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렉시우스는 어릴 때부터 전장에 나간 전쟁 영웅이었다.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버거운 애리얼이 그를 도울 방법은 없었다.

애리얼은 백작저까지 두세 시간 남짓한 시간을 선잠으로 때웠다.

백작저 초입에 도달했을 때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피로감이 남은 눈가를 문지르며 차에서 내리는데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울렸다.

우우우웅-

흰색 차가 백작저 정문 앞에 세워져 있었다. 은으로 만든 순록 모양 보닛 장식에 새파란 하늘이 비쳤다. 솔렘의 차였다.

애리얼은 멍하게 그 차를 바라보다가 하녀장을 찾았다. 저게 언제 온 거냐고 물었더니, 하녀장은 어제부터 있었던 거라고 대답했다.

그 말인즉슨, 어제부터 계속 레이신이 와 있었다는 소리다.

애리얼은 기겁하여 백작부터 찾았다.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곧장 출입문을 통과하여 백작의 집무실로 가려는데 그 길목에서 레이신과 마주쳤다.

긴 금발을 올려 묶은 그가 창밖을 보고 있다가 애리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얀 셔츠 차림의 그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순한 인상이었다.

“어디 갔었어?”

유해진 인상만큼이나 부드러워진 어투였다.

애리얼은 생소함과 어색함을 느끼며 조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궁금한 일이 있어서 황성에 방문하였습니다.”

“대공자의 일 때문에?”

“그걸 어떻게…….”

“그저께 밤에 대공자가 날 찾아왔거든. 공식 방문은 아니고, 뒷문으로.”

몰랐던 일을 듣고서 애리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자까지 던지며 싫어할 때는 언제고, 렉시우스가 몰래 레이신을 찾아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왜……, 무슨 일로요?”

“중요한 일이라 여기서 말할 수는 없고. 정 듣고 싶으면 자리를 옮겨서 알려 줄게.”

둘이 나눌 중요한 이야기라.

그의 대답에 애리얼은 렉시우스가 전쟁에 관련한 일로 레이신을 찾아갔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 애리얼이 들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한 명이라도 아는 이를 줄이는 게 유리한 내용일 테니까.

애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서하께선 무슨 일로 오셨나요? 어제부터 와 계셨다고 들었는데…….”

“선물 달라며.”

“……네?”

애리얼은 다소 바보같이 되묻다가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서린 진심을 읽고서 당황했다. 그에게 생일 선물을 달라고 했던 일이 뒤늦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내년에 달라는 의미였는데. 레이신은 이미 지나가 버린 애리얼의 올해 생일을 챙길 생각인 듯했다.

그것 때문에 어제부터 기다렸을 그를 생각하니, 애리얼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내년 생일만 챙겨 주시면 되는데……. 명확하게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응, 알아. 내년에도 챙겨 줄 거야.”

“네? 아니……. 내년에만 챙겨 주시면 돼요.”

“알았어. 선물은 네 방에 뒀어.”

“…….”

“가서 봐.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로 준비해 줄게.”

그는 애리얼의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가 판단한 대로 제 말만 했다. 새로운 타입의 벽창호였다. 한마디도 제대로 나눌 수 없었던 시절에는 전혀 몰랐던 그의 성격. 어쩐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무시하던 때와 아주 다르지는 않은 성격이라 느껴졌다. 꺾을 수 없는 완고함이었다.

애리얼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미 가져다 놨다는 선물을 확인하지 않을 순 없으니까.

“우선은 어머니께 인사부터 드리고 올게요.”

그러자 레이신은 말끔히 길을 터 줬다.

백작은 집무실에 있었다. 그녀는 서하께 말씀 들었다, 하는 간단한 말만 했다. 이미 애리얼이 레이신의 방문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투였다. 그녀의 판단이 맞았다. 애리얼 역시 레이신에 관한 사안은 더 묻지 않았다. 백작과는 간단히 안부만 주고받은 뒤 집무실을 나왔다.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레이신이 집무실 문 앞에서 그녀를 맞았다.

“먼저 올라가 계시지…….”

“네 방이잖아. 네 허락이 있어야 가지.”

그는 어울리지 않게 정론을 말했다.

‘근데, 이 인간 며칠 전에 창문 깨고 들어오지 않았었나?’

약간의 황당함을 느끼며 애리얼은 위층으로 향했다. 레이신은 한 발 뒤에서 착실하게 애리얼을 따라왔다.

방이 있는 층으로 들어서자 카논이 반가워하며 애리얼의 곁으로 다가왔다가 레이신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공자 서하를 뵙습니다.”

카논은 숨을 한 번 고른 뒤 애리얼을 보고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응. 다녀왔어.”

“일이 있어 마중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애리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이신의 방문 탓에 카논이 고생을 꽤 했을 것이다. 그가 가져온 선물이 뭔지는 모르지만, 카논은 그것 때문에 방을 떠나지 못한 것 같았다.

대체 뭘까.

호기심보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선물은 어차피 특별 엔딩을 위한 조건일 뿐이고, 엔딩 조건만 충족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하다못해 종잇조각이라도 괜찮았다. 그런 만큼 휘황찬란한 선물은 거북했다. 제발 부디 평범한 것이기를.

카논에게는 차마 묻지도 못하고, 애리얼은 선물이 있을 방의 문을 직접 열었다.

다음 순간 애리얼은 제 눈을 의심했다. 방의 한중간, 투명한 유리로 된 케이지 안에 검은색의 생명체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서 자고 있었다. 새끼 사슴처럼 생긴 외관에 애리얼은 저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건 마수였다.

애리얼은 기함하여 슬금슬금 발을 물렸다.

“저…… 저게, 왜……?”

해명하라는 듯 레이신을 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논을 향해 말했다.

“자리 비워 줘. 이 주변으로는 아무도 못 오게 해 주고.”

“네, 서하.”

카논은 아무런 항의도 없이 물러났다. 다만 떠나기 전에 애리얼의 손을 살며시 찌르며 ‘나중에 아는 대로 말씀드릴게요.’ 하고 소곤거렸다.

카논마저 떠나고 얼어 있는 그녀에게로 레이신이 다가와 말했다.

“뭐를 좋아할지 잘 몰라서,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쓸 만한 걸 가져왔어.”

“하지만 저건…… 마수잖아요?”

“정확하게는 마수의 유체야.”

그가 짚어서 확실하게 설명하자 애리얼은 심장이 철렁거렸다. 왜 저게 자신의 방에 있는지.

“저걸, 저한테 선물하신다고요?”

냉정해 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레이신은 불안정한 그녀의 상태를 느낀 건지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시야에서 마수가 사라져도 애리얼의 혼란과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저것이 자라난 형태에 죽을 뻔했다. 냉정할 수 있는 게 이상한 일이다. 애리얼은 한시라도 빨리 저 생명체를 집 안에서 치우고 싶었다.

레이신이 나지막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너더러 키우라고 하는 건 아니야. 키우는 건 내가 해. 그리고 마수는 네 명에 복종하도록 자랄 거야. 솔렘이 아닌 너의 패가 되도록 키울 거고.”

“왜…… 왜요?”

직접 말살할 정도로 증오하는 게 아니었던가.

애리얼은 그에게서 마수의 사육법을 들었었다. 마수는 레이신의 마력을 먹고 자란다. 레이신은 마수에게 제 마력을 먹이느라 마력 부족으로 긴 수면에 빠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데 그 짓을 다시 반복하겠다고, 그는 말했다. 심지어 저걸 키워서 애리얼의 선물로 주겠다고 한다. 그녀가 쓸 수 있는 강력한 패가 되도록.

“죽지 않는 마수는 솔렘이 가진 강대함의 큰 축을 담당하는 존재였어. 그 덕에 솔렘을 함부로 적대하는 이가 거의 없었지. 침입하려는 이는 더 없었고. 아주 강력하고 확실한 방어 수단이자 공격 수단인 마수가 있었으니까. 솔렘의 절대 중립은 마수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어.”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에도 그는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마수는 존재만으로도 그 정도의 권력이 돼. 그러니 그걸 네가 누렸으면 해.”

듣기만 해도 온몸이 떨릴 정도의 보상을 그가 귀에 속삭였다.

“아무도 너를 무시하지 못할 거야. 하물며 황족조차도.”

애리얼의 뒤에 그림자처럼 선 레이신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애리얼은 경련하는 듯 잘게 떨리는 손으로 제 치맛자락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녀가 받은 것은 단순히 마수의 유체가 아니었다. 그것이 불러올 무력과 권력, 그리고 그것을 키워 낼 레이신의 희생까지였다.

감당하지 못해 짜부라져 압사할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것이 생일 선물이라는 이름 아래 주어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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