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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37)화 (137/264)

이후로도 레이신은 종종 백작저를 찾아와 애리얼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다가 돌아갔다.

애리얼은 불편하기만 했던 그와의 시간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대화의 부재도, 마수가 떠올라 두렵기 그지없었던 그의 시선도 어느새 차츰 익숙해졌다. 때때로 그와 식사를 하기도 했다.

일단 한번 익숙해지니 레이신과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편했다. 그는 딱히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사건건 귀찮게 구는 렉시우스나 예민한 눈치로 살피며 뭔가를 요구하지 못해 안달 난 스카이라, 어딘지 싸한 태도로 자꾸만 끈덕지게 유혹하는 데본시아보다 훨씬 대하기 수월했다.

그래서였을까. 애리얼은 가끔 제가 먼저 레이신을 찔러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풀어 보거나, 고대어로 쓰인 어려운 책을 가져와서 그에게 읽어 달라고 하기도 했다. 대화도 없이 그와 응접실에 앉아 있는 상황이 때때로 몹시 지루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시험에서의 무정함에 대한 조촐한 복수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싱거운 반응을 보였다. 요구하는 건 다 들어주고, 애리얼이 귀찮게 굴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녀를 제지하지도 않았다.

애리얼은 유려한 발음으로 고대어를 읽어 주는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레이신은 그녀를 굳이 깨우려 들지 않았다. 그냥 계속 책을 읽어 주다가 그녀의 기울어진 고개에 쿠션을 받쳐 주었다. 애리얼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잠들었다.

그녀는 십여 분의 짧은 수면에 들었다가 서서히 깨어났다. 폭신한 감촉에 고개를 들자 청록색의 쿠션이 보였다.

“자꾸 졸길래, 그거라도 베고 자라고.”

무심한 목소리가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 줬다.

그 순간 애리얼은 그와 자신의 달라진 관계를 체감했다. 많은 일이 일어나기 전, 아카데미 편입을 앞두고 마력을 공부하고자 갔던 수도 도서관에서의 만남.

그때도 레이신은 책을 읽고 있었고, 애리얼은 그와 말을 나눌 기회를 엿보며 기다리다가 졸았었다. 그때의 레이신은 몹시 차가웠다.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선 매정한 얼굴로 떠났다. 심지어 협박과 같은 어조로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레이신은 그녀가 좀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쿠션을 받쳐 주고 있었다. 그녀를 대하는 음성은 차분하고 배려가 묻어났다.

이토록 가까워졌다. 얼음과도 같아서 오한을 일으키는 탓에 다가가기 어려웠던 그와.

애리얼은 충동적으로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손등을 톡 건드려 보았다. 온기가 느껴지는 살결이 만져졌다.

레이신이 흘금 제 손을 내려다보고는 애리얼을 보았다. 애리얼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도 딱히 묻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짓, 절대로 할 수 없었을 텐데. 애리얼은 부쩍 달라진 관계가 신기했다. 그도 비슷한 것을 생각하는지 오묘한 표정이었다.

***

추운 겨울 동안 제국은 전쟁에 돌입했다. 이전처럼 적당히 소모전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괴멸을 노리고 세 개의 왕국을 쳤다.

남쪽 산맥에서 큰 전투가 펼쳐졌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기다란 전선을 형성한 그곳을 두고서, 렉시우스는 르젠으로 향했다. 마력과 체력을 최대한 아껴야 했기 때문에 나아가는 속도는 생각보다 더 느렸다. 수도에서 떠난 지 일주일째가 되는 날에야 르젠의 국경을 지났다. 수도에 가까워지자 르젠의 자랑인 거대한 결계가 보였다.

연노란색의 빛을 내는 반구형 결계.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다는 철옹성. 그런 이유로 결계의 바깥은 방어가 허술했다. 결계 자체가 최고의 방어책이니만큼 당연한 현상이었다.

르젠의 그 누구도 이 결계가 뚫리리라 생각지 않는다.

렉시우스는 위장도 없이 당당한 걸음으로 결계에 다가갔다. 한 손에는 근원 소멸기를 들고서 유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결계만 무너트리면 수도는 금방 함락될 것이다. 쓸 만한 기사들은 모조리 최전선에 가 있을 테니까.

그는 근원 소멸기를 들어 노란빛의 막을 슬슬 긁었다. 지지직, 지직. 잔스파크가 일었다.

중심이 어딜까.

예민한 감각으로 가늠하며 상하좌우로 근원 소멸기를 움직였다. 스파크가 더 크게 일고 미세한 진동이 조금이라도 더 큰 방향은 위쪽이다.

렉시우스는 망설임 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경사가 큰 결계 겉면에 근원 소멸기를 박아 몸을 지탱하며 암벽을 타듯 정상으로 향했다. 근원 소멸기를 타고 손으로 전해지는 진동의 세기가 점점 강해졌다. 아마도 이 반구의 중심, 왕성이 있는 바로 윗부분이 결계의 중심부일 것이다.

그는 해가 쨍쨍 내리쬐는 가장 높은 곳으로 단숨에 올랐다. 괴물 같은 체력을 기반으로 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어느덧 그의 발아래로 주제도 모르고 방만하게 쌓은 왕성이 보였다. 방어라곤 모르는 유약한 성채다. 높은 창 안으로 보이는 왕성의 인간들 몇몇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결계를 밟고 선 렉시우스를 발견하자 가늘어졌던 눈이 순식간에 크기를 키운다. 그래 봐야 이미 늦었지만.

“병신들.”

짧게 비소한 그는 결계의 중심에 근원 소멸기를 꽂아 넣었다.

결계는 온 사방으로 스파크를 튀기며 유리 깨지는 소리를 냈다. 쩌저적, 쩌적, 쩌적. 붕괴하며 일으키는 진동이 지진을 일으켰다. 결계 안의 대기와 땅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윽고 달걀 껍데기처럼 조각난 결계가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그 사이로 렉시우스가 대기를 가르며 뛰어내렸다.

그는 뒷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 왕성의 첨탑 지붕에다 꽂았다. 타일을 주르르 긁으며 미끄러지다가 아래의 창문을 발로 깨고서 왕성으로 침입했다.

빈 복도가 아주 무주공산이었다.

매끄럽게 착지한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허리를 굽혔다.

“윽!”

짧은 신음을 지르고는 이를 깨물었다. 근원 소멸기가 마력을 몽땅 빼앗아 가고도 모자란 대가를 피로 빨아들였다. 렉시우스의 안색이 시허옇게 질렸다. 그는 부들거리면서 겨우겨우 벽을 짚고 섰다. 체질과 더불어 미리 치아 안쪽에 새겨 온 회복술 덕에 빠진 피가 금세 수복되기는 했으나, 힘겨웠다.

회복술은 십여 명의 마법사가 마력 고갈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피로도 모자라 옆구리의 살이 뭉텅이로 베어졌다. 큰 상처임에도 피가 나지 않았다. 피가 계속 빨려 들어갔다. 그 속도를 못 이긴 회복술이 조금씩 타들어 갔다. 입 안이 매캐했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대가를 바라는 근원 소멸기가 자비 없이 그의 신체를 도려내 갔다. 쇄골 아래, 허벅지 안쪽, 팔꿈치 위쪽, 마구잡이로 살이 파였다.

이토록 잔혹하게 다 뜯어 갈 줄이야.

사람도 아닌 것이 이렇게나 철저히 계산하는 게 웃겨서 렉시우스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키들거렸다.

이대로 얼마나 더 뜯어 갈까, 궁금했다.

총력전을 한답시고 뛰어난 기사는 전부 최전선에 보냈으니, 르젠 왕성에 남은 건 극소수를 제외하면 죄다 어중이떠중이뿐이다. 하지만 그 어중이떠중이라도 이 상태로 마주하는 건 위험했다.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손이 달달 떨렸다.

렉시우스는 빈 복도를 주시하며 시간을 세었다. 지금쯤이면 각 위치에 배치해 둔 특수 부대가 르젠의 수도로 잠입했을 것이다. 그들이 왕성까지 도달하려면 적어도 세 시간 이상은 걸린다.

그때까지 적어도 왕국 기사를 몇십 명은 마주치게 될 터.

오 분, 십 분.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갔다.

뒤늦게 그의 제복 위로 피가 스며 나왔다.

드디어 대가를 전부 치렀다.

렉시우스는 근원 소멸기를 챙겨 온 검집에 담아 허리에 찼다. 대신에 장검을 꺼내 쥐었다.

마력이 바닥난 탓에 마법은 쓸 수 없고, 베인 상처가 나으려면 몇 시간은 걸리겠지만, 어찌어찌 싸우는 데는 문제없었다.

마침 왕성의 기사 넷이 복도로 들어섰다. 붉은 머리칼을 보고서 기사들의 낯이 창백해졌다. 설마 익히 들었던 전장의 악몽이라 일컬어지는 존재인가.

“네놈…….”

“깨지는 소리를 못 들었나? 늦게도 오는군.”

렉시우스가 상대의 말을 끊어 먹으며 시큰둥한 조롱을 날렸다. 지루해 죽겠다는 말투에는 도발이 담겨 있었다.

사색이 된 기사 하나가 눈치 빠르게 입을 벌렸다.

“제국 놈이다! 제국이 침입…….”

그러나 끝맺어지지 못하고 말이 도중에 잘려 버렸다. 기사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피가 솟구침과 동시에 서 있던 몸이 무너지는데도 주변의 놈들은 아직도 반응이 느렸다. 이 정도로 경험 없는 놈들만 남았을 줄이야. 결계에만 기대며 얼마나 허술하게 왕성을 관리했는지 알겠다.

렉시우스는 곧장 칼날을 반대로 회전시키며 한 번의 휘두름으로 둘을 베었다. 넷이었던 기사는 하나만 남았다.

승산이 없음을 느끼고 감히 검을 빼 들 생각도 못 하는 초짜의 새파란 낯을 향해 렉시우스는 검날을 들이밀었다. 칼끝으로 턱을 들어 올리자 힘없이 끌려 올라온 기사의 얼굴이 그와 마주했다.

렉시우스는 친절한 미소를 걸쳤다.

“내가 여기 처음 와 봐서 그러는데, 안내 좀 해 줄래?”

“예, 예! 그러겠습니다!”

기사는 벌벌 떨면서 순종적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군기 빠진 왕성에서 왕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손쉬웠다. 결계가 무너짐과 동시에 수도로 침투한 특수 부대가 왕성에 도착했을 땐, 이미 렉시우스의 손에 르젠 왕의 목이 들려 있었다.

***

눈이 녹고 새순이 돋았다. 아직 날씨는 쌀쌀하지만 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4월이면 아카데미가 개학한다.

애리얼은 새 학기가 시작될 아카데미에 렉시우스가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며칠 전 르젠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데본시아의 말대로 렉시우스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더 기함할 성과를 들고 왔다. 렉시우스는 감히 걱정할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험준한 산맥에서 결사 항전을 벌이는 두 왕국이 남아 있었다. 함락된 르젠도 하루빨리 복속시켜야 했다.

르젠이 무너지고서 제국은 더 바빠졌다. 렉시우스가 빠르게 움직이는 만큼 데본시아도 일에 쫓겼다. 스카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아픈 황제는 업무를 거의 하지 않았다.

정계에선 아직 열아홉에 불과한 데본시아를 불신하는 세력도 꽤 있었다. 그런데도 큰 잡음이 새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그가 어지간히도 유능한 모양이었다. 아무렴 제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신성 마법사라는 명칭을 지녔으니, 함부로 무시하기도 어렵겠지만.

아무튼 황태자는 무척 바빴고, 황자도 바빴다. 꾸준히 백작저를 방문하던 레이신도 요즘은 발길이 뜸했다. 제국이 부산스러운 요즘, 그 역시 솔렘의 차기 가주인 만큼 할 일이 상당할 것이다.

백작 가문의 공녀인 애리얼만 한가한 시기였다. 심지어 가문의 가주인 백작이 아직 상당히 젊은 편이기에 애리얼은 더더욱 부담이 없었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며 허송세월하는 것에도 질린 애리얼은 대신 책을 보고 이 세계를 공부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세계의 역사, 마력의 기원, 마법의 역사……. 황태자의 이름 아래 비호를 받는 애리얼은 황성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었고, 생각보다 위험한 정보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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