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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39)화 (139/264)

스카이라는 총학생회장 대행으로 느지막이 입학식에 참가해 짧은 연설을 하고 내려왔다.

새로 입학한 학생들을 비롯해 진녹색의 타일을 밟고 선 낮은 지위의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그를 보았다. 저마다 한마디라도 전하기 위해 그를 따라다니고 기다렸다.

솔렘의 시험에서 생존한 이들이 퍼트린 이야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황자가 몰살 위기의 도전자들에게 달려와 그 귀한 마력을 쏟아부으며 그들을 위해 희생했다, 는 이야기.

과장이 없지는 않았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그날 많은 사람을 구했던 스카이라의 인망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아래 계급을 위해 책임감을 드러내고 필요 이상의 친절을 보인 고위 계급은 희소했기 때문이다. 제국민들은 황자를 선망하기 시작했다. 그를 주제로 한 시와 책이 쏟아지고, 연극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황태자를 이길 수 없는 황자였고, 실제로 제국을 이끄는 데 있어서도 황태자가 더 적합했다.

그도 딱히 황태자 자리를 바라지 않았다.

그날 도전자들을 구한 것은 다 애리얼을 위해서였다. 그녀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만 다치지 않을 수 있다면 시험의 도전자들이 다 죽어 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려고 했다. 다친 인간들을 내버려 두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애리얼이 처참하게 다쳤다고 했을 때, 후회는 최고조에 달했다.

매일매일 잠들 때마다 그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봤다. 한자리에 고정된 채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를 지르다 결국 놓쳐 버리는 꿈을 반복해서 꿨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불면증을 앓는 날이 점차 늘어났다. 그렇게 지냈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그날 도전자들을 다 죽게 둘걸. 두고 따라갈걸.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제국민들이 그런 저를 찬양한다고……. 그 소릴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스카이라는 웃지도 않고서 다가온 학생들을 지나쳐 걸었다.

그들이 찬양해야 할 건 애리얼이었다. 그녀는 제게 홀려 있는 황자를 이용해 도전자들을 구했다.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서 절대 거절하지 못할 부탁으로 옭아매 도전자들을 구하게 한 장본인이다. 찬양의 대상은 그런 맹랑한 짓을 저지른 그녀가 됨이 옳았다.

인망이니 선망이니, 그에겐 귀찮기만 했다.

스카이라는 조금도 달갑지 않은 시선들을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차는 곧장 제1 기숙사 동으로 향했다. 애리얼은 아직 거기 있을 것이다.

오늘 오전 완전히 사색이 되었던 애리얼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저와 약혼하는 게 뭐 그리 손해인 일이라고 그런 표정을 하는지.

백작 공녀인 그녀에게 황자인 스카이라와의 약혼은 이득밖에 없는 결합이었다. 오히려 손해는 스카이라의 쪽이 컸다. 부유한 왕국의 왕녀도 아니고, 제국에 셋뿐인 공작가나 명망 있는 후작가의 여식도 아니다. 허클리 백작가는 이름도 크지 않을뿐더러, 그 외동딸인 애리얼 허클리는 사교계 경험도 전무하지 않던가. 입지가 하늘과 땅 차이다.

‘오히려 손뼉을 치며 좋아해야 할 제안이 아니냐고.’

스카이라는 툴툴거렸다.

‘너무 협박하는 것같이 말해서 그런가?’

확실히 그때는 감정이 격해져서 다소 불친절한 말투이긴 했다. 그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기숙사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다정하게 대해 주면서 다시 제안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의 다짐은 자신을 보자마자 곧장 돌아서서 도망가는 애리얼의 뒷모습에 무너졌다.

“애리얼 허클리!”

기껏 부드럽게 가다듬었던 성대로 사나운 음성을 뱉어 냈다.

스카이라의 불호령이 휴게실을 울렸다. 달아나던 애리얼의 뒷모습이 화들짝 튀었다.

애리얼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겁에 질린 몸은 도망을 치려고 나아가는데 냉철한 이성은 멈추라고 소리쳤다.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아 다리가 갈팡질팡했다.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다가온 스카이라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휙 돌려세웠다.

“지금 나 피했어?”

“……아니요.”

애리얼은 의외로 차분하게 시치미를 뗐다. 그것 때문에 스카이라는 더 기분이 상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방금 나 보고 돌아서서 갔잖아.”

“최근 바쁘신 것 같아서, 신경 쓰이시지 않게 미리 자리를 피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부주의한 행동으로 오해를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녀는 아주 이럴 때만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말에 막힘이 없다.

“네가 이렇게나 날 생각해 주는 줄은 몰랐는데?”

“저는 황자 저하께 은혜를 입은걸요. 은인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애리얼의 한마디 한마디에 거리감이 배어 있었다. 참 철저하기도 하시지.

스카이라는 열이 받아 그녀에게 따로 전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잊어 가고 있었다. 약혼보다 더 중요한 말을……. 아니, 따지자면 약혼보다 중요한 이야기는 없다. 그는 그렇게 합리화하며 또다시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밀어붙이려고 했다.

순간 이동으로 난입한 황태자만 없었더라도.

“오랜만에 보네.”

날카로운 자신의 목소리와는 다른, 간드러진 황태자의 목소리. 형제에게는 절대 꺼내지 않을 살가운 인사.

데본시아는 애리얼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로, 상냥하게.

스카이라가 감정에 휘둘리느라 취하지 못했던 태도를 그는 여유롭게 수행했다.

“전달 사항은 잘 들었지?”

데본시아가 애리얼을 향해 물었다. 들은 바가 약혼뿐인 애리얼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반응이 이상한 것을 느낀 데본시아가 의아해하며 스카이라를 보았다.

“설마 아직 안 전했어?”

“막 전하려던 차였어. 끼어들지 말고 빠져.”

“아냐. 이렇게 온 김에 내가 전할게.”

데본시아는 웃으며 애리얼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팔을 휙 뻗었다. 그대로 눈앞에 있는 애리얼을 끌어당기더니 곧장 사라졌다.

불시에 벌어진 순간 이동 납치였다.

그 광경을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스카이라는 휴게실의 소파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황태자가 역겨워 미칠 것 같았다.

***

시야가 삽시에 전환되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순간 이동의 감각이었다.

애리얼은 놀란 나머지 데본시아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놀랐구나. 미안.”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애리얼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제야 애리얼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 억세게 억누를 것만 같던 그의 팔은 의외로 순순히 풀렸다.

데본시아의 품에서 벗어나 트인 애리얼의 시야로 익숙한 전경이 보였다. 흰 벽, 나무로 짠 바닥과 백색의 가구들. 데본시아가 순간 이동으로 온 곳은 다름 아닌 애리얼의 기숙사 방이었다.

“여기가 애리얼이 지내는 방이구나.”

데본시아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방을 둘러보았다.

애리얼은 방 안에 그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는 거북함에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오버히트라는 경고 사항을 아는 지금, 데본시아는 약혼을 말하는 스카이라보다도 훨씬 더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이 와중에 하필이면 카논도 없었다. 있었어도 하녀라는 지위인 카논은 말 한마디 못 하고 내쫓겼겠지만.

경계심이 가득한 애리얼의 시선을 느꼈는지 데본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너무 그렇게 싫어하지 마.”

“아닙니다…….”

“아닌 얼굴이 아닌데?”

“…….”

“알았어, 그만할게. 표정 풀어. 일단은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려고 온 거니까.”

“무슨 이야기인가요?”

“애리얼은 작년 학기말 시험 안 쳤지?”

“아…….”

애리얼은 탄식과 함께 잊고 있었던 아카데미 시험을 떠올렸다. 솔렘의 시험에서 크게 다친 후 한 달 동안 의식을 잃은 채였던지라 학기말 시험을 치지 못했다. 솔렘의 시험을 통과하고는 정작 아카데미의 시험을 치르지 못한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아카데미 쪽에서 아무 말도 없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낙제가 세 개 이상이면 강제 퇴학이야. 알고 있지?”

“……네.”

“그래도 넌 이유가 있으니까, 기회를 한 번 더 줄까 하거든.”

“정말인가요?”

“응. 정식 수업이 이루어지기 전, 한 달의 적응 기간 중 하루를 택해 공개 시험을 치를 거야. 거기서 네가 낙제를 했음에도 아카데미가 내치지 않을 인재라는 걸 증명하면 돼.”

“증명……. 어떤 방식으로 말인가요?”

“글쎄? 네 장기를 보여 주면 다들 인정하지 않을까? 솔렘에서처럼 다 태우고 하면 어때?”

그가 은근하게 비꼬며 말했다. 일종의 반어법이었다. 솔렘의 시험에서 있었던 폭발을 나무라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는 의미로 하는 말이었다.

데본시아 역시 그날 애리얼이 보였던 무모함에 상당히 화가 났던 것 같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정확한 날짜는 조만간 고지할게.”

데본시아는 살갑게 웃으며 애리얼에게 눈인사를 보낸 뒤 방을 나갔다.

그가 떠나자마자 애리얼은 고민에 휩싸였다. 안 그래도 솔렘의 시험을 준비하느라 아카데미 수업을 많이 빠진 터였다. 학기말 시험만 잘 치르면 될 거라고 여겼는데, 그조차 하지 못했다. 후학기 시간표에 채웠던 세 가지 수업 모두 꼼짝없이 낙제였다. 하필이면 세 개라서 낙제도 세 개였고, 이대로면 무조건 퇴학이었다.

하지만 운 좋게 퇴학당하지 않을 기회를 얻었다.

데본시아는 이유 있는 결석이었기에 애리얼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거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특혜였다. 시험은 질병으로 인한 결석이었으나, 그전에 수업을 줄줄이 빠진 것은 명백한 태도 불량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자주 결석하고 시험도 망쳐놓고 기회를 제공받는 건 아카데미에서 애리얼이 유일했다.

그러니 공개 시험을 통해 애리얼 스스로 자격을 증명하라는 것이고.

‘하지만 솔렘의 시험에서 사용했던 식의 힘은 쓰지 말라고…….’

가장 큰 장기이자 후학기 내내 연습했던 자신의 강점이 막혔다. 애리얼은 도대체 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심지어 시험 날짜는 지금부터 한 달 안으로 정해질 것이다. 준비 기간이 한 달도 채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심지어 마력의 불균형까지 겪는 애리얼은 공격술 외엔 뭘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체질인데.

‘차라리 퇴학당할까?’

막막함의 끝에 애리얼은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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