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습게도 퇴학이라는 게 그다지 나쁘지 않은 선택지로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호재일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스카이라가 약혼을 말한 참이라 불편했다. 오버히트의 위험에 처해 있는 데본시아와 마주하는 것도 껄끄러웠다. 심지어 레이신까지 친근함을 보이며 접근해 오는 참이고, 곧 렉시우스마저도 승전보를 들고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넷 모두 하트 세 개 이상을 채웠다.
공략이 끝난 대상들과 더 붙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성격이 좋지도 않은 인물들이었다. 저들끼리 부딪치면 그 안 좋은 성격은 아예 극을 달렸다. 그들의 신경전 사이에 낄 생각을 하니 벌써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하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피할 수 있었다.
어차피 솔렘의 영구적인 비호와 후원을 획득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하더라도 가문에 누가 되지는 않을 터. 백작은 아쉬워할지 모르겠으나, 애리얼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그녀가 반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애리얼의 선택은 어느덧 확고해졌다.
퇴학.
“그래……. 그래야겠어.”
퇴학을 결심하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
레이신은 느지막하게 아카데미로 왔다. 어둑하게 저물어 가는 하늘의 끝에 마지막으로 빛을 뿜어내는 주홍색 노을이 보였다. 멋들어진 풍경이었으나 그는 감흥 없이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기만 했다.
아주 오랜만에 와 보는 기숙사에는 하얀 분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학기 초에 별관이 아니라 기숙사로 바로 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다른 감회를 느끼지 못한 채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렇게 내부로 들어선 레이신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입구에서 멈칫거렸다. 하도 오랜만이라 제 방이 어딘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귀찮아서 사용인도 다 물렸는데, 난감했다.
기숙사의 시녀라도 불러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복도 끝에서 우아한 걸음걸이로 나타난 아나스타샤가 레이신을 보고서 보라색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솔렘 공자?”
그녀는 어리벙벙하게 그를 부르다가 일순 안색을 바꾸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물건을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까딱이며 가벼운 인사를 건네더니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찰나였으나, 레이신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물건을 똑똑히 봤다. 검은색 검집에 끼운 단검. 그것도 단순한 검이 아닌 마도구였다. 뭐에 쓰려는 걸까. 잠시 의심이 피어났으나 그는 이내 그 의심을 접었다. 아나스타샤가 뭘 하든 별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애리얼이라면 몰라도.’
그 생각을 하고 나서 레이신은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왜 이런 별거 없는 순간에마저 그녀를 떠올리고 있는지.
그는 애리얼을 제 구원자나 다름없이 생각했다. 그 지긋지긋한 마수의 굴레에서 벗어날 단초를 제공해 준 사람이고, 그의 행동에 불을 붙인 사람이었다. 공작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하던 그녀의 말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해 준 말들에 희열을 얻었다.
레이신은 애리얼에게 명백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게 그녀에게 충성하고 사죄하고픈 마음이라고 여겼다. 은덕에 감사하고, 그 은인을 선망하고, 보호하고 싶어 했다.
그걸 위해서 애리얼을 솔렘의 공작 부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충성심의 결과가 공작 부인이라는 건 굉장히 이상했으나 그는 무시했다. 그러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없었다.
그는 감정을 잘 몰랐고, 애정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했다.
일평생 솔렘의 가주라는 의무만 바라봤던 삶이었다. 따스한 관심이나 이해는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을 의무와 충정의 일종이라 여겼다. 그가 받은 호의라곤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자꾸…… 애리얼을…….’
그는 혼란스러워하며 이마를 짚었다. 요즘 조금만 시간이 비면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가 보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백작저로 향했던 날부터 계속 그랬다. 시도때도 없이 애리얼을 떠올렸고, 애리얼을 보면 아무런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랬기에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었다. 당연한 무조건 반사처럼 그는 애리얼을 갈구했다.
이 감정이 정말 충정인 건가. 레이신은 때때로 그런 의문을 가졌지만, 끝내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감정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것이 싫었다. 감정이라는 걸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제껏 자신이 받았던 감정들이 얼마나 부정적인 것들뿐이었는지 알게 되니까. 둘러싼 환경이 얼마나 삭막한 건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에게 감정이란 대개 좋지 않은 것이고, 감정 중 최고로 좋은 것은 깊은 충성심에서 비롯한 충정이라는 고정 관념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그런데 충정이라는 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상대방을 생각하게 되는 거였던가?
레이신은 끝없는 의문에 휩싸여 기숙사 입구에서 멍하니 멈춰 있었다.
지금 애리얼을 마주하면 이 감정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자 가슴 속이 간질간질하다가 세차게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당장 그녀를 보고 싶어졌다. 레이신은 곧장 시녀를 불렀다.
“솔렘 공자 서하를 뵙습니다.”
“애리얼 허클리의 방은 어디지?”
그가 생뚱맞은 것을 묻자 시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신은 얼른 답을 주지 않는 시녀에게 채근하는 눈빛을 보냈다. 시녀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2층 왼쪽 복도, 두 번째 방입니다.”
원하던 답을 얻자마자 그는 계단을 올랐다. 조명이 켜진 복도는 환했지만,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누군가를 방문하기에 좋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2층 왼쪽 복도, 두 번째 방.’
시녀가 알려 준 애리얼의 방 위치를 되뇌며 걸어갔다. 거침없이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차분한 애리얼의 목소리가 신원을 물어 오자 레이신의 심장 박동이 조금 더 빨라졌다.
왜일까.
그는 조금 경직된 얼굴로 대답했다.
“레이신 디 솔렘.”
그는 딱딱하게 제 풀 네임을 내뱉었다. 뭐라고 말해야 자연스러운 건지 몰랐다. 그냥 황성에서 검문할 때처럼 말했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하얀 교복을 입은 애리얼이 나와 그를 맞았다.
“공자 서하, 무슨 일이신가요?”
“아, 그냥…….”
레이신은 익숙하게 들뜨는 기분을 숨기며 애리얼과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놀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가 기숙사에 있을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것 때문에 레이신은 조금 의아해졌다. 그는 원래 애리얼의 방을 찾아오기는커녕 기숙사에 제대로 발을 들이는 일조차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인물인데. 애초에 그가 이름을 밝혔을 때, 그녀는 놀랐어야 했다. 놀라서 진짜인지 되묻고 확인했어야 한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니.
그가 기숙사에 들어왔을 때부터 미리 알고 있었던 게 아니면 나오지 않을 반응이다.
‘설마 알고 있었나?’
하지만 조용히 왔을 텐데. 그는 사용인도 없이 차도 멀찍이 세우고 정원을 걸어왔다. 이미 밖이 어두워진 시간이어서 창문을 내다봤다고 하더라도 걸음이 빠른 그를 포착하기란 어려웠을 거다. 심지어 애리얼은 마력을 활용하는 상황이 아니면 상당히 둔했다. 그의 행동을 예측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이런 반응이 나올 수는 없었다.
레이신은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들끓는 것 같았다.
‘설마…….’
혹시나 그녀가 제 행동을 꿰뚫고서 이렇게 태연한 것은 아닐까. 매번 틈만 나면 그녀를 그리는 자신의 머릿속을 읽고 있지는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레이신은 참을 수 없게 부끄러워졌다.
애리얼은 말이 없는 그를 난감하다는 듯 올려다보며 어색한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단지 뻘쭘함에 지은 표정이었으나, 레이신은 괜스레 속내를 찔려 뺨을 붉혔다.
그녀를 보면 좋고, 보고 싶어서 왔는데. 막상 마주해 제 마음속을 들킨다고 생각하니 도망치고 싶어졌다.
레이신은 애리얼을 피해 휙 몸을 돌리더니 인사도 남기지 않고 매정하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의아해하는 애리얼의 시선이 제 뒤를 따라오는 걸 느끼고선 쫓기듯이 걸음을 옮겼다.
어딘지도 모를 빈방 문을 열고 들어간 뒤에야 이유 모를 부끄러움에 물든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든 걸까. 한동안 안 만나다가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가.
급작스럽게 얼굴이 달아올라 도망친 원인을 찾아보려 했으나, 제대로 된 원인이 찾아질 리 만무했다.
그래도 애리얼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기이하게 꼬였던 마음이 조금씩 침착을 되찾았다. 더 생각하는 게 피곤해진 그는 대충 빈방을 차지하고서 씻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그날 밤, 레이신은 꿈에서까지 애리얼을 보았다. 꿈속에서의 그녀에게마저 그는 얼굴을 붉혔다. 현실이 아님을 어렴풋이 자각하면서도 냉정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아름답다고 여겼던 그녀의 연흑색 눈동자를 보자 심장은 겁이라도 먹은 듯 조여들었다. 그는 꿈에서도 바보같이 꼬이고 들뜨는 복잡한 기분을 제어할 수 없었다.
말간 얼굴을 보다가 참을 수 없어서 도망치고, 그러다가 또 보고 싶어서 다시 다가가고. 또 도망치고, 또 다가가고. 의미도 없이 도돌이표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그렇게 밤새 남에게 말할 수 없을 꿈을 꾸고 난 아침, 그는 확신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가진 감정은 절대 충정이 아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