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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41)화 (141/264)

어제의 레이신은 뭐였을까.

애리얼은 침대에서 빈둥거리다 그를 떠올렸다. 갑자기 쫓기듯 떠나 버리던 레이신은 평소와 달랐다. 황급히 돌렸던 그의 옆얼굴이 살짝 붉었던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왜 그런 반응이었지?’

레이신이 새삼스레 감정을 자각하기라도 한 건가. 혹시 몰라서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그의 호감도 창에 추가된 하트는 없었다.

‘호감도는 문제없으니 괜찮겠지…….’

어차피 퇴학당할 마당이라 만사가 귀찮아졌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쥔 채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수업에 들어갈 필요가 없으니 시간이 남아 돌았다. 방학 때보다도 더 나태한 생활이 이어졌다. 공략 대상들의 위치를 파악하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산책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게 일과의 끝이었다.

이렇듯, 하는 일이 특별히 없으니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아직도 시험 날짜는 고지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애리얼은 종종 초조해졌다. 퇴학을 결정한 만큼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백작에게는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과 함께 아카데미를 떠나겠다는 제 의사를 미리 전했다. 백작은 여느 때와 달리 조금 고민하는 듯 침묵하다가 수긍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따르겠노라고.

이제 그녀의 퇴학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없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생활이 이 주째에 접어들어 데본시아의 호출을 받기 전까지는.

***

황태자의 시녀가 애리얼을 찾아왔다. 시녀는 오늘 중으로 황실의 차가 올 것이니 그걸 타고서 황성을 방문하라고 전해 왔다.

차가 도착한 때는 늦은 오후였다.

애리얼은 심란한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또 무슨 일로 부르는 걸까. 분명 데본시아와 마주하게 될 터다.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황성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린 애리얼은 중앙관에 도착하여 즉시 황태자의 집무실로 안내를 받았다.

“전하, 허클리 공녀가 방문했습니다.”

“그래.”

데본시아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시녀는 묵례를 남긴 뒤 애리얼만을 남겨 두고 물러갔다.

문이 닫히자 집무실은 완전히 고요해졌다.

애리얼은 뻘쭘하게 서서 데본시아의 눈치를 봤다. 바빠 보여서 함부로 말을 걸기 어려웠다.

다행히 오래가지 않아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전혀 다행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시험에 대해 긴장감이 없는 거 같은데, 애리얼.”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바쁜 와중에도 애리얼의 동향은 철저히 파악한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눈동자를 굴리며 변명을 생각했다.

“너무 신경 쓰니까 오히려 초조해지고 쫓기는 기분이 들어서요. 여유 있게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 어차피 퇴학당할 생각이니까, 여유 있겠지.”

“아……. 그걸 어떻게…….”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데본시아가 잇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애리얼은 다급히 해명했다.

“아, 그게 아니라! 그…… 퇴학에 지나치게 신경 쓰면서 겁먹는 건 효율이 나쁜 것 같아서요. 차라리 퇴학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그런…….”

“어렵게 거짓말 안 해도 돼.”

“…….”

“퇴학당하고 싶을 수도 있지. 이해해.”

그가 팔랑팔랑 서류를 넘기며 다정히도 말했다. 억지로 쥐여 준 기회를 이딴 식으로 걷어차겠다는 그녀의 태도에도 화내지 않겠다는 듯이.

애리얼은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수업도 안 들어가고, 늘 방 안에만 틀어박혀서 아예 포기한 사람처럼 굴었잖아. 모를 수가 없던걸?”

“……죄송합니다.”

“아냐, 포기해도 돼.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좋아. 근데…….”

데본시아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더없이 상냥한 얼굴이었다. 애리얼과 마주하며 미소를 머금고 휜 입꼬리가 우아했다.

“네가 아무것도 안 하면 난 편애와 특혜로 공정성을 깨면서 네 퇴학을 막을 수밖에 없어.”

권력자의 오싹한 발언에 애리얼은 몸을 굳혔다.

그의 말인즉슨, 애리얼이 시험을 치든 말든 퇴학은 절대 시켜 주지 않을 거란 소리다. 설령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퇴학당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칠 수 없다.

이대로면 애리얼은 공개 시험에서 형편없는 실력을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고도 퇴학당하지 않아 아카데미 학생들의 눈총을 받게 되겠지.

애리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시험,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응원할게.”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충직한 신하처럼 순종적으로 말을 마친 후에야 애리얼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데본시아는 턱을 괴고 있다가 싱긋 웃으며 검은색 봉투를 내밀었다.

애리얼은 제 앞으로 다가온 봉투를 받으며 물었다.

“전하, 이건 뭔가요?”

“확인해 봐.”

그의 말에 애리얼은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4월 30일, 오후 2시, 교내 실습장.」

시험에 관한 것이 분명한 일시와 장소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고작 일주일 후다.

애리얼은 예상한 듯 덤덤한 얼굴로 임박한 시간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퇴학은 당할 수 없고,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데본시아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제 처지 때문에 기분이 저조했다.

***

애리얼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무실을 나설 때, 바쁜 황태자는 배웅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했다. 더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는 눈빛을 무한정 뿌리면서…….

‘이대로 가다간 데본시아 루트로 끝나겠어.’

불길한 예견을 떠올린 애리얼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데본시아의 호감도를 억지로라도 떨어트리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데본시아가 하지 말라고 비꼬던 공격술이나 시험 날 쏴 버리는 것뿐인데.’

어차피 단기간에 준비할 수 있는 장기도 그것밖엔 없다. 실습장엔 강력한 결계가 둘려 있을 테니 어느 정도 화력을 뽐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거고.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적당히 화력을 조절하면 되고.

우우우웅-

구체적으로 변해 가던 그녀의 생각을 잘라 내듯 진동음이 울렸다.

애리얼이 휴대폰을 확인하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맞은편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당연히 공략 대상이라 여기며 그녀가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애리얼…… 허클리…….”

이를 악물고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을빛이 쏟아지는 복도에 검은색 교복을 입은 헬레나가 서 있었다. 이곳에 출입할 수 없을 터인 인물이었다.

“왕녀님?”

애리얼이 어리둥절해하며 입을 열자, 헬레나는 구겨진 얼굴로 손에 무언가 들고서 달려왔다.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 사이로 음습하게 빛나는 연녹색 눈이 보였다.

위험을 감지한 애리얼이 황급히 물러났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반응이 조금 느렸다. 헬레나는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손안에 쥔 것을 애리얼을 향해 뻗었다. 녹색 칼날이 애리얼의 목전으로 다가왔다.

이대로면 꼼짝없이 찔린다.

애리얼은 급히 팔을 들어 칼날을 막으려고 했다. 설령 팔뚝이 뚫리더라도 급소는 보호해야 한다.

고통이 엄습할 것을 각오하며 애리얼은 팔에 힘을 줬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던 칼은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살갗을 파고들지 않았다. 피부에 닿기 직전에 멈춘 녹색 날이 바르르 진동하다 바닥으로 추락했다.

챙그랑!

떨어진 단도 날이 유리처럼 조각났다. 조각난 칼날 사이에서 녹색의 액체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독극물인 것 같았다.

섬찟함을 느낀 애리얼의 시선이 바닥에서 헬레나에게로 이동했다.

흉기를 놓친 헬레나의 손이 공중에 붙들린 채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괴물이라도 마주한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애리얼은 공포에 질린 헬레나의 시선이 향해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스카이라가 있었다.

그가 헬레나의 손목을 부러트릴 듯 쥐고 있었다. 차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낯이 섬뜩했다.

“황자 저하, 저, 저는…… 공녀를 해하려던 것이 아니라…….”

“자해 공갈을 하려고 했다고? 알아.”

그의 말에 헬레나는 턱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정곡을 찔렸는지 반박은 하지 못했다.

애리얼은 자해 공갈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해 공갈이 목적이라면 본인을 찔러야지 왜 상대방을 찌르려 한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애리얼이 멍하니 의문을 내뱉자 헬레나가 눈을 홉떴다.

“너 때문에 난 약혼도 엉망으로……!”

“입 다물어.”

스카이라가 험악한 목소리로 헬레나의 말을 끊어 버렸다.

헬레나는 사색이 되어 유순하게 입을 다물었다. 스카이라는 눈썹조차 일그러뜨리지 않은 딱딱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를 자주 경험한 왕녀는 지금이 위태로운 순간이라는 걸 눈치챘다. 가차 없는 처분을 내리기 전의 감정이 표백된 반응. 혼담을 파투 냈을 때와 같은 반응이다.

“황자 저하…….”

헬레나가 애처롭게 그를 불렀다. 그는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부터 일정하고 분주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기숙사를 지키는 황성 출신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을 발견한 헬레나는 제 처분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서 다급히 외쳤다.

“저하! 황자 저하!”

“무단 침입에 흉기 난동, 불법 마도구를 반입한 혐의다. 끌고 가.”

스카이라가 죄목을 딱 짚으며 명령했다.

그제야 애리얼은 자신을 향해 날아왔던 녹색 날의 단도가 마도구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한테 칼을 들이밀었구나.’

헬레나의 행동이 겨우 이해가 되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쉬이 부서지는 마도구는 애리얼이 차고 있는 브레이슬릿의 방어술에 박살이 났으리라. 그 순간 안에 든 녹색 액체가 튈 테고, 헬레나는 독으로 추정되는 그 액체를 맞고서 피해자 행세를 할 셈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브레이슬릿의 보호를 받는 걸 알았지?’

애리얼은 고개를 갸웃했다.

브레이슬릿이 마도구라는 것 정도야 눈치껏 보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그 기능까지 세밀히 알기는 어렵다.

그녀가 새로운 의문에 빠진 동안 기사들은 공포에 질려 잠잠해진 왕녀를 끌고 떠났다.

스카이라는 제 보좌관을 불러 왕녀와 관련된 지시를 내렸다.

“왕녀가 생각이 짧긴 해도 바보는 아니야. 아마 뒷배가 있을 거다.”

뒷배.

그의 말에 애리얼은 순간적으로 데본시아를 떠올렸다.

렉시우스는 출정 중이고, 레이신은 성격상 왕녀와 말을 나눠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스카이라는 방금 왕녀를 잡아 멈춘 사람이기에 당연히 열외다. 소거법으로 남는 것은 데본시아. 왕녀와 안면이 있으며, 브레이슬릿의 기능도 알고 있는 인물.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단 한 가지가 아주 크게 걸렸다.

데본시아에게는 왕녀의 뒷배를 자처해 애리얼이 누명을 쓰도록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는 애리얼이 계속 아카데미를 다니길 바랐다. 오히려 퇴학이 되지 않도록 특권까지 쓰겠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그런 와중에 퇴학의 빌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사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리얼.”

스카이라가 부르는 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애리얼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네, 네!”

“다친 덴 없어?”

“아, 네!”

“혹시 모르니까 의사한테 가서 검진은 받아 봐.”

“네.”

“무슨 일이 더 있을지 모르니까, 원인이 규명되기 전까진 어디 나가지 말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애리얼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이라는 그다지 못 믿는 눈치로 애리얼을 보다가 보좌관과 함께 복도를 떠났다.

혼자 남은 애리얼은 녹색 액체의 얼룩이 남은 바닥을 바라보았다. 마도구의 잔해는 기사들이 회수해 간 후였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까…….’

스카이라는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고 일렀다.

페널티도 지나간 마당에 아직도 이런 일을 신경 써야 한다니. 무지하게 피곤해져서 애리얼은 퇴학 생각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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