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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42)화 (142/264)

“왕녀의 뒷배는 대체 누구일까요?”

“샤펠 공녀.”

보좌관의 물음에 스카이라는 칼같이 답했다. 샤펠 공녀라 단언하는 모습에 그의 보좌관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으나, 그는 굳이 이유를 설명하진 않았다.

스카이라는 왕녀에 관한 일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집무실로 들어갔다.

작년 아카데미 건립 기념제 이후부터 왕녀는 뒷배가 생긴 듯이 굴었다. 정확히는 렉시우스와 말을 나누고 난 후부터. 언제나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렉시우스가 왕녀에게 모종의 바람을 불어넣은 게 확실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을 불어넣었기에 왕녀의 태도가 저리도 변했는가.

그 이유는 오래가지 않아 밝혀졌다. 데본시아를 대하는 왕녀의 언행이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주제넘게 상냥하고 다정하면서도 우위에 선 듯 묘하게 내려다보는 눈길. 감히 황태자를 상대로 일개 왕녀가.

아마도 왕녀는 데본시아가 자신에게 마음을 두었다, 같은 터무니없는 망상을 하는 게 아닐까.

그에 데본시아가 불쾌함을 느낀 건 당연지사였다. 스카이라를 힘들게 하려고 붙여 놓은 존재가 이상한 착각을 하고서 오히려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니 난감하기도 했으리라.

평소 같았으면 왕녀 정도는 거슬린 그 순간 치워버렸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남부의 병력 지원으로 플라넬 왕국과 깊이 얽힌 상황. 왕녀를 내치지도 못하는 데본시아는 그녀를 억지로 참고 대했다. 스카이라를 얽으려고 펼쳤던 복잡한 관계가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는 격이었다.

괴상한 착각에 빠진 왕녀는 그것도 모르고 데본시아를 귀찮게 하고 다녔다. 무심한 스카이라 대신 억지로라도 상냥함을 가장하는 데본시아에게 끌리는 듯. 플라넬 왕녀는 스카이라의 이전 약혼녀들처럼 데본시아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스카이라는 코웃음을 쳤다. 이전에 약혼녀들을 빼앗겼을 때와는 달리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통쾌하기만 했다.

날이 갈수록 왕녀는 스카이라가 아닌 데본시아를 따라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녀는 스카이라의 혼담 상대였기에, 데본시아는 그녀를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가장 불편해했던 건 다름 아닌 황태자의 약혼녀, 샤펠 공녀였다. 황태자의 주변을 맴돌며 묘하게 여지를 뿌려 대는 왕녀가 그녀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심지어 황자의 예비 약혼녀라는 지위를 지닌 탓에 그녀로서는 해코지하기도 어려워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타이밍 좋게 스카이라 쪽에서 먼저 왕녀를 내쳐 주었다.

슬슬 데본시아에게로 마음의 추가 기울던 왕녀는 미련 없이 혼담을 포기했다. 이 기회에 차라리 황태자를 택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참이었다.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는 알량한 야망이었다.

그리하여 황자와 왕녀 사이에 오가던 혼담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그게 샤펠 공녀를 움직이게 했을 거다.

황자와의 혼담마저 파기된 왕녀는 황성 내에서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황태자를 탐내고 다녔다.

안 그래도 제 자리 보전에 예민한 샤펠 공녀가 그런 왕녀를 두고 볼 이유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타인의 손을 이용해 왕녀를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충동적이고 쓸데없이 추진력이 좋은 왕녀의 성향을 이용해서 도를 넘는 일을 벌이게 만들고, 종내는 데본시아나 스카이라에 의해 내쳐지도록. 불법 침입을 눈감고, 위험한 마도구를 건네고, 멍청하게 상대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해 공갈로 음해하도록 회유하고, 설득하고.

제1 기숙사 동에서 이런 상황을 구태여 설계할 인물은 샤펠 공녀밖에는 없었다. 이전에 데본시아에게 들러붙던 스카이라의 약혼녀들을 처리한 방식과 유사했다.

그래서 스카이라는 단번에 눈치챘다. 이 일을 계획한 왕녀의 뒷배가 아나스타샤 샤펠이라는 걸.

‘아무리 그래도 애리얼을 공격하게 하는 건 도가 지나친데.’

스카이라는 살벌한 눈빛을 한 채 관자놀이를 꾹꾹 문질렀다.

샤펠 공녀도 브레이슬릿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 마도구로는 애리얼이 다치지 않을 걸 알고 있었겠지. 데본시아가 무슨 의도로 애리얼에게 브레이슬릿을 건넸는지, 데본시아가 애리얼에게 얼마만큼의 관심을 지녔는지 알 테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데본시아가 애리얼을 얼마나 총애하는지 알면서도 이런 계획을 세우다니.

‘데본시아도 묵인한 사안인가…….’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그 눈치 빠른 황태자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걸 몰랐을 리가 없는데. 짜증 나는 왕녀를 처리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자기 약혼녀까지 한 번에 엮을 셈인가?’

마지막 서류를 정리하던 스카이라의 손이 멈칫거렸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이번 일로 제 약혼녀까지 처리하는 건 위험했다. 아나스타샤 샤펠은 황태자파 중에서도 가장 세가 크고 충성심이 깊은 샤펠 공작가의 장녀다. 잘라 내면 데본시아 본인의 기반만 약해진다.

애초에 심각한 결격 사유가 없다면 잘라 낼 수 없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언제 상황이 급변할지 모르니 경계해 둘 필요는 있었다.

스카이라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서류 작업을 마치고는 집무실에서 일어났다.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던 보좌관이 때맞추어 다가오자 그는 뭔가 결정했는지 입을 열었다.

“필릭, 이틀 정도 시간이 필요해. 할 일이 있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일정 비워 놔.”

하필이면 요즘처럼 바쁜 때에. 필릭이 하소연하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스카이라는 개의치 않았다. 데본시아가 이번 공개 시험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아 놔야 했다.

***

기숙사는 무척 조용했다.

애리얼은 자신과 사용인 외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기숙사를 걸어 다녔다. 창밖으로 드문드문 황실 기사들이 보였다. 어제 있었던 왕녀의 불법 침입 탓에 기숙사의 경비가 삼엄해졌다. 애리얼은 차마 정원에도 나가지 못하고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산책을 대신했다.

우우우웅-

주머니에 넣어 온 휴대폰이 울렸다. 애리얼은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 복도에 땋은 머리를 늘어뜨린 레이신이 보였다.

그는 앞으로 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걸음을 주춤거리다가 서너 개 정도 풀어 헤쳐 놓은 셔츠의 단추를 잠갔다. 그러고는 애리얼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솔렘 공자 서하.”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애리얼은 먼저 인사를 건네며 허리를 숙였다.

조금 당황한 듯 그의 걸음이 멈췄다.

“안녕…….”

짧은 인사가 들려왔다. 애리얼은 고개를 들고 그를 살폈다.

레이신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표정이었다. 별로 할 말도 없는 것 같았고.

애리얼은 레이신에게 짧게 묵례만 남기고 다시 걸었다. 바로 옆을 지나치는데도 그는 애리얼을 붙잡지 않았다. 정말 용건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애리얼은 제 뒤통수로 와 박히는 따가운 시선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복도 중앙에 가만히 서서 이쪽을 보고 있던 레이신과 눈이 마주쳤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애리얼이 묻자 레이신은 잠시 침묵하며 눈동자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아니. 딱히 없는 거 같아.”

그런데 왜 저러고 멈춰서 보고 있는지.

덩달아 할 말이 없어진 애리얼은 다시 한번 묵례를 한 뒤 쭉 걸어갔다.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괜스레 어색해서 걸음만 쫓기듯 빨라졌다.

이후로도 그런 미묘하게 어색한 상황들이 반복되었다.

주로 복도를 걷다 마주치거나, 가끔은 휴게실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유난히도 동선이 겹치는 느낌이었다. 달리 갈 곳이 없어 기숙사 내부만 돌아다니다 보니 더 자주 만나는 것도 같았다. 다른 공략 대상이 부재해 마주칠 대상이 그밖에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그렇게 마주친 레이신은 늘 짧은 인사만 건네곤 더 말이 없었다. 딱히 대홧거리가 없는지 늘 과묵했다. 그런데도 그는 먼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먼저 떠나는 쪽은 항상 애리얼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불편했던 애리얼은 어느 순간부터 건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제1 기숙사 동의 안이라면 경비는 다 똑같이 삼엄하니, 그 안에서 돌아다니는 건 괜찮을 것이다. 다만 날이 조금 쌀쌀하니 실내 공간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애리얼은 아카데미에서 기숙사 다음으로 익숙한 곳을 찾았다.

제1 기숙사 동의 도서관은 늘 고요했다. 애초에 이용할 수 있는 학생이 제한되어 있고 그 수마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심지어 이 도서관을 이용할 만한 수준의 학생들은 구태여 이곳을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도서관에 구비된 책 정도는 이미 그들의 자택에도 보유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애리얼은 인적이 드문 이 도서관을 도피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만의 아지트 같은 느낌도 들고,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았다.

애리얼은 공격술에 관한 책을 펴 놓고 시험에서의 재능 증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했다.

시험은 고작 이틀 후.

아리앨라에게 연락해서 조언을 구했지만 마땅한 수는 얻지 못했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원래 잘하던 것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재능에 대한 증명도 될 것이고, 구설에 오르는 일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건 사격을 통한 마력의 화력 증명뿐인데…… 마도구로 개조한 총을 어디서 구하지?’

고민에 빠진 애리얼은 틱틱 연필을 굴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아리앨라에게 연락을 해 봐야 하나?’

그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지이이잉-

책상에 놓아둔 휴대폰이 요란하게도 울렸다.

애리얼은 일어나려다 말고 자세를 고쳐 앉고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 제1 도서관 1층』

최근 자주 마주한 이름이 화면에 떠오르자 애리얼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레이신의 초상화는 그녀가 있는 열람실의 앞에서 속도를 늦췄다. 이윽고 문고리가 돌아가고 레이신이 등장했다.

애리얼은 일부러 모르는 체 휴대폰부터 숨긴 뒤 고개를 돌렸다.

열람실로 들어온 그는 애리얼이 앉은 자리로부터 이삼 미터 정도 떨어진 책상에 앉았다.

이쯤 되니 애리얼은 확신이 들었다. 레이신은 의도적으로 자신과 동선을 겹쳐 다니고 있다.

불쑥 따지고픈 마음이 든 그녀는 말도 없이 그를 응시했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금색 눈동자가 똑바로 애리얼을 담았다. 인사는 없었다.

애리얼은 여느 때처럼 과묵한 그를 바라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레이신의 눈이 호기심을 보이며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애리얼은 그가 있는 책상으로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공자 서하.”

“응.”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신가요?”

“…….”

“없어요?”

레이신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따라다니는 거냐고, 애리얼이 물으려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딱히 이렇다 할 용건이나 할 말은 없는데, 보고는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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