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직설적인 언행에 애리얼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왜 제가 보고 싶으신 건데요?”
그 질문에 레이신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리다가 답을 내어놓는다.
“그냥.”
“그냥이라니…….”
“자꾸 생각나고, 그래서 자꾸 보고 싶고. 정말 그냥 그게 다인데.”
상당히 낯 뜨거운 솔직함을 보이고서 그는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왔다. 도리어 애리얼만 당혹스러워졌다. 묵직한 시선에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런 경우에는 뭐라고 말해야…….’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리얼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마주쳐 오는 눈빛을 피해 슬쩍 고개를 틀었다. 노골적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는데도 그는 별말이 없었다.
참으로 편한 듯 불편한 과묵함이었다.
차라리 화제를 돌려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면 편할까.
하지만 애리얼로선 이 상황을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일부러 따라오거나 하지는 마세요.”
“……불편했어?”
“……편하지는 않았어요.”
“그랬어? 미안.”
레이신은 그다지 미안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애리얼이 따라다니지 말라고 부탁한들 그는 듣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나마 그의 하트가 세 개라는 게 위안일까.
‘적당히 인사만 하고 지내면 하트가 더 오르지는 않겠지. 레이신이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잘 없으니까.’
애리얼은 ‘호감도 피버 타임’의 효과로 폭증한 그의 호감도가 정체할 것이라고 보았다. 아이템을 써서 억지로 키운 호감도였다. 레이신의 감정은 다른 공략 대상들의 것만큼 진심이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무심히 여기려고 노력하며 애리얼은 레이신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안도감과 확신을 불러왔다.
대화를 나누고 가끔 어울리는 정도로는 그의 호감도가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그와 길게 마주할 필요는 없다.
애리얼은 슬슬 일어나려고 책상을 짚었다.
때마침 황성의 시녀가 열람실의 문을 두드리며 애리얼을 찾았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연 시녀는 황태자가 호출했으니 얼른 중앙관으로 오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미 차도 대기해 있다고.
‘요즘따라 자주 찾네.’
애리얼은 한숨을 삼키며 일어났다. 귀찮았고, 무슨 용건인지 불안하기까지 했지만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지 마.”
착 가라앉은 저음이 내는 짧은 말에 애리얼은 주춤거렸다. 의아함에 가득 찬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주시했다.
“네?”
“안 가도 되잖아. 가지 마.”
여전히 감정을 읽기 어려운 무표정으로 그는 고집을 피웠다. 그것도 황태자의 부름을 무시하라는 위험한 소리를 하면서.
“아니, 안 가면 안 되는데요…….”
“왜? 아카데미서만큼은 높은 신분으로 대우받잖아? 거절해도 돼. 저쪽에서도 세게 처벌하진 못해.”
“그래도 황태자 전하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어요. 황태자 전하는 제 추천인이시기도 하니까, 더더욱 아카데미 학생으로서 달려가야죠.”
애리얼이 이유를 설명하자 레이신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몸을 뒤로 젖혔다. 마음에 안 든다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그가 남의 사정에 이만큼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의아하게, 조금은 불안하게 느끼며 물었다.
“서하께선 왜 제가 가지 않길 바라시는 건가요?”
“그냥……. 네가 간다니까 기분이 별로야.”
“사무적인 일 때문인데도요?”
“아닌 거 알아.”
“…….”
“넌 사무적으로 가는 거겠지만, 상대는 아니잖아.”
그의 말에 애리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이신이 생각보다 눈치가 빨라서 놀라웠다. 이런 쪽으로는 감이 둔한 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최근에 아카데미 관련해서 전달 사항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부르시는 걸 테니까요. 공적인 일이에요.”
애리얼은 그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사실 오해는 아니지만, 아무튼 해명은 필요했다. 지금 이해시켜 놓지 않으면 오해가 심해져 더 큰 고집을 불러올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신은 애리얼의 말을 다 듣고서도 여전히 무표정한 상태였다.
“굳이 날 이해시키려고 안 해도 돼.”
“하지만 서하께서…….”
“나는 그냥 내 의사를 말한 거야.”
레이신은 한발 물러나듯 그렇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애리얼은 감정이 잘 읽히지 않는 그를 두고서 시녀를 따라나섰다. 뒤통수로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상태를 확인할까 하다가 말았다. 마지막에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레이신은 의외로 데본시아만큼이나 속을 읽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말이 별로 없지만 그만큼 한마디 한마디가 직설적이고, 표정이 없는 대신 행동이 적극적이다. 그럼에도 묘하게 선을 지키는, 적당히 무심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건 본인 자체가 감정에 무뎌서 표현에 한계가 있는 것 때문인 듯했다.
여러 가지를 함축해서 떠보듯 말하는 데본시아와 달리, 레이신은 그때그때 느끼는 걸 되는대로 말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레이신과의 관계는 벽에 막힌 듯 진전이 없었다.
애리얼은 이런 정체 상황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무척 편할 텐데, 하는 레이신에게는 미안한 생각을 했다.
***
도서관 앞에서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황성에 도착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곧장 중앙관의 집무실로 안내받은 애리얼은 오도카니 소파에 앉아 업무 중인 데본시아를 기다렸다. 그는 그녀의 눈앞에서 홀로 서류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벌써 삼십 분째였다.
‘이럴 거면 끝내고 부르지.’
볼멘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애리얼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데본시아는 나른한 눈빛으로 조용히 서류철을 넘겨 보았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졸음을 유발했다.
애리얼은 도자기같이 매끄러운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감상하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스르르 눈이 감기고 고개가 기울어질 즈음, 나긋한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졸지 마.”
“……네, 죄송…… 합니다.”
잠에 취한 머리를 좌우로 저으며 애리얼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금방 끝낼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네.”
애리얼은 이번에는 위아래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잠을 쫓았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한 데본시아가 피식 웃고는 다시금 서류에 집중했다. 제국의 이윤을 위한 새로운 국가사업 계획과 그와 관련하여 신설될 기관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크게 위험성은 없지만 그만큼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업이 많았다. 굳이 추진할 필요는 없는 비슷비슷한 내용이 반복되었다. 대부분 쓰레기로 분류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힐 운명이었다.
그는 서류철을 분류해 한쪽에다 쌓아 놓고는 뒷덜미를 주물렀다. 마지막 것까지 별 볼 일이 없었다. 오십여 개의 사업 계획서를 훑었는데 건진 게 하나뿐이다.
머저리들이 구상한 계획서만 올린 건지…….
데본시아는 잡쳐지려는 기분을 정화하려고 애리얼을 보았다.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은 말간 얼굴이 보였다. 애리얼은 졸지 말라고 주의를 받은 것도 다 잊고서 한가로이 잠들어 있었다.
황태자를 옆에 두고서도 저리 태평하게.
데본시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잠든 애리얼의 앞으로 다가갔다. 소파의 등받이를 짚고서 상체를 기울여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쩌자고 이렇게 무방비한지. 그는 손을 뻗어 숱이 풍성한 흑발을 슬금슬금 빗겨 주다가 미간을 톡 건드렸다.
“일어나.”
애리얼은 꽤 깊게 잠든 건지 반응이 없었다. 확 손대 버릴까. 데본시아는 제 속에서 위험한 본능이 꿈틀대는 것을 억누르며 재차 말했다.
“일어나라니까?”
언령이 깃든 음성에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눈꺼풀이 열리며 까만 눈동자를 드러냈다. 자고 일어나 게슴츠레 가늘던 애리얼의 눈은 그를 포착하자마자 순식간에 크기를 키웠다.
“데, 데본…… 아니, 전하!”
“내 꿈이라도 꾸고 있었어? 막 이름으로 부르네.”
그는 허둥지둥하는 애리얼을 웃으며 관찰했다.
애리얼은 자다 일어난 이 상황이 멋쩍고 어색해서 손만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함부로 존함을 부르려던 거요.”
“넌 참 죄송할 일도 많네.”
그는 픽 웃으며 굽혔던 상체를 일으키더니 애리얼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또 옆자리를 꿰차고 앉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리를 두는 그의 행동을, 애리얼은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데본시아 쪽에서 일정 거리를 지켜 준다면 그녀야 좋지만, 그의 행동 변화 자체는 주의 깊게 봐 둘 필요가 있었다.
“왜? 옆에 앉았음 좋겠어?”
애리얼의 시선에 그가 놀리듯 물었다. 애리얼은 놀란 나머지 고개도 젓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 맹한 얼굴에 데본시아가 프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이렇게 정신을 빼고 다녀. 곧 시험인데, 응? 정신 차려야지.”
“시험에 관한 일로 부르신 건가요?”
애리얼은 뒤늦게 자신이 호출된 이유를 물었다. 데본시아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험에서 뭐 보여 줄 거야?”
“그냥…… 제가 잘하는 거요.”
“흠……. 잘하는 거.”
데본시아는 별로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그러더니 검지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 작은 소리가 애리얼을 옥죄었다.
“그래도 공격술은 안 했으면 좋겠어.”
공격술을 하지 말라니. 할 줄 아는 게 그거뿐인데. 애리얼은 당황스러워하며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그는 싱긋 미소만 지어 보였다.
속이 타는 쪽은 애리얼이었다.
“하지만 저는 공격술이 아니면…….”
“증명 못 해도 퇴학되는 거 아니니까, 하지 마. 알겠지?”
데본시아는 장난스레 웃고 있었지만, 눈만은 진지했다. 낮과 밤의 일교차만큼이나 순식간에 차가워진 오드 아이가 싸늘하게 빛났다. 이건 협박이고 경고였다.
애리얼은 가슴이 철렁했다. 시험은 당장 이틀 후인데 공격술은 안 된다고. 그러면 능력 증명도 못 한 채 구설수에 휘말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실력도 떨어지는 이가 황태자의 총애를 받아 편법으로 아카데미에 붙어 있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심지어는 아카데미에서도 최고라 일컫는 대우를 받으면서.
‘그런 건 싫은데…….’
앞으로 1년은 더 지내야 할 곳에서 안 좋은 소문이 나는 걸 누가 반기겠는가. 애리얼은 가뜩이나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이목이 몰려 있는데 굳이 그런 수군거림까지 떠안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장 마주한 데본시아의 눈이 너무도 단호하고 싸늘해서 애리얼은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데본시아는 암묵적인 긍정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그가 날카롭던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점심 못 먹었지? 응접실에 차려 놨으니까 식사하고 가.”
“……네. 감사합니다.”
“요즘 일이 많아서, 난 먼저 일어날게. 같이 못 먹어서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애리얼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랬더니 웬일로 데본시아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너무 숙이고 다니지 마. 마음 아프니까.”
애리얼이 안쓰럽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제 기분이 별로라는 뜻인지. 그녀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데본시아는 손을 거두고서 먼저 집무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