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뒤 애리얼은 시녀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황성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극진했다. 혼자 즐기기엔 과분할 정도의 점심 식사를 대접한 것도 모자라 극존칭을 써 가며, 마치 황족을 대하듯 그녀를 모셨다. 덕분에 애리얼은 아주 불편했다.
이토록 과한 대우는 분명 데본시아의 입김이다.
그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애리얼은 가슴이 갑갑해졌다. 가장 엮이고 싶지 않은 인간이랑 가장 가깝게 엮여 드는 이 상황이 엄청난 도피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오버히트’라는 단어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깜박댔다. 속이 더부룩해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아무도 못 찾는 데에 도망쳐 있다가 생일날 돌아와 버릴까…….’
가끔은 그런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물론 그런 짓을 했다간 생일날 선물 대신 질문 세례만 받을 게 자명했다. 아주 취조하려 들지도 몰랐다.
그러니 좋든 싫든 특별 엔딩을 보려면 공략 대상들과 지속해서 부딪혀야 했다.
‘적어도 내년 생일까지는 버터야 해.’
그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애리얼은 공략 대상에게서 직접 선물을 받아야 한다던 특별 엔딩의 조건이 원망스러웠다. 도망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애초에 도피할 곳도 없긴 하지만.
애리얼은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을 지키다가 일어났다. 황성에 있는 건 심적으로 너무 불편했다. 식사도 마쳤으니 이제 떠나고 싶었다. 때마침 대기하던 시녀가 잽싸게 다가왔다.
그 길로 애리얼은 곧장 응접실을 나섰다. 드넓은 황성을 가로지르며 한참 걸음을 옮기는데, 복도 저편에서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우웅-
휴대폰이 울려 댔다. 정원으로 나가는 마지막 길목이었다. 애리얼은 양쪽으로 기사들을 줄줄이 끼고서 걸어오는 스카이라와 마주쳤다. 애리얼을 발견한 그가 보고를 올리던 중인 기사의 말을 막으며 걸음을 멈췄다.
그 움직임에 애리얼은 한 박자 느리게 예를 갖췄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할 말 있으니 따라와.”
스카이라는 딱딱하게 명령을 내리곤 애리얼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뒤를 기사들이 우르르 따랐다. 그 기세에 살짝 주눅이 든 애리얼은 벽면으로 물러난 채 주춤거렸다.
앞서 걷던 스카이라가 걸음을 멈추고 애리얼을 돌아다보았다.
“안 따라오고 뭐 해?”
툭 쏘아붙인 그의 재촉에 애리얼은 급히 다리를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사과와 함께 기사들이 늘어선 가장 끝줄에 그림자처럼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그제야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을 거느린 스카이라는 평소보다 훨씬 더 고압적으로 보였다. 선두에 서서 끊임없이 무어라 보고를 듣는 그의 표정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냉정했다. 기사는 긴장한 얼굴로 극존칭을 써서 그를 대했다.
애리얼은 가장 뒷줄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새삼스럽게 그의 지위가 체감되었다.
감히 말을 걸기도 어려운 황족. 황자 저하.
집무실에 다다른 그가 해산 신호를 보내자 뒤따르던 기사들이 일제히 물러갔다. 꽉 차던 복도가 어느새 텅 비고, 그와 애리얼만 남았다.
스카이라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반쯤 몸을 밀어 넣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멀찍하게 떨어져 선 애리얼이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스카이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와.”
그의 부름에 애리얼은 종종걸음으로 문으로 향했다.
스카이라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무실의 전경이 보였다. 채광이 그리 좋지 못해 어둑한 내부. 진녹색의 벽면. 무거워 보이는 책상과 두껍게 쌓인 서류철들. 데본시아의 집무실 못지않게 일감이 쌓인 모습이었다.
스카이라는 서류가 뭉텅이로 올려진 책상을 짚고 서서 애리얼을 응시했다.
“또 황태자가 불렀어?”
“네.”
“무슨 일로?”
“이틀 후에 있을 공개 시험 때문에 부르셨어요.”
“뭐라고 했는데?”
“시험에서 공격술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왜?”
“모르겠어요. 그냥 쓰지 말라고만 하셨는데…….”
애리얼은 손끝을 매만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은근히 까칠하고 날카로운 스카이라의 말투 때문에 조금 기가 죽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다. 줄곧 바닥만 주시하다가 곁눈질로 슬쩍 그의 상태를 살폈다.
스카이라는 필요한 건 다 물었는지 입을 다물고 사념에 잠겨 있었다. 조금 찌푸린 표정으로 보아 그다지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뭐가 또 심기에 거슬린 건가.
“뭐 필요한 거 없어?”
그는 찡그렸던 인상을 풀며 무심히 물었다.
또 취조 형태로 물어 오거나 짜증을 내리라 예상했는데 의외의 질문이었다. 애리얼은 살짝 놀란 채 되물었다.
“……필요한 거요?”
“지원해 줄게. 아무거나 필요한 거 말해 봐.”
애리얼은 단번에 마도구로 개조된 총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걸 요구하면 데본시아의 경고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것도 스카이라를 통해서.
일이 복잡해질 것을 고려한 애리얼은 총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지금 그녀는 데본시아의 이름 아래 편입된 학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스카이라의 도움을 받으면 스카이라까지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게 된다.
애리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스카이라가 다시금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말 놓는 것도 싫고, 약혼도 싫고, 필요한 것도 없고.”
“……저하?”
“나랑 엮이기 싫어?”
스카이라가 대놓고 이렇게 물어 오니 애리얼은 할 말이 없어졌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고, 그가 약혼 같은 이야기를 꺼내면 꺼낼수록 피하고 싶어졌다. 차라리 이대로 침묵해서 긍정의 뜻을 비치고 멀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애리얼이 입을 다물자 스카이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만 짜증이나 분노를 입 밖에 내놓진 않았다. 책상을 짚은 채 애리얼을 지그시 노려볼 뿐이다.
선연하게 타오르는 푸른 시선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애리얼은 묵례하듯 고개를 숙였다. 왜인지 죄책감 같은 것이 심장 부근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스카이라는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집무실 문이 휙 열리며 바람이 일었다. 마법이었다.
애리얼은 바닥을 보던 고개를 들었다. 스카이라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책상에 앉아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애리얼은 예를 갖춰 묵례를 남기곤 열린 문을 통해 나갔다.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으나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스카이라는 서류철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의 매몰찬 반응에 애리얼은 괜스레 씁쓸해졌다. 그런 감정이 들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서운하다.
***
공개 시험이 치러지는 날.
애리얼은 아직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공격술을 금지당하고서 고작 이틀 만에 대책을 준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제 애리얼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애와 혜택으로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구설에 시달리든지, 아니면 데본시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공격술로 증명하든지.
애리얼은 높고 견고한 외벽을 지나 실습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오후 두 시. 강한 햇빛과 함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전교생이 빼곡하게 들어앉은 좌석이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몰고 왔다.
애리얼은 굳은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다가 한 군데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원형으로 죽 늘어선 좌석 사이 유난히 눈에 띄는 자리. 발코니석에 앉은 데본시아가 애리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반기듯 밝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를 제외한 다른 공략 대상은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 곳에 앉은 건지 뭔지.
애리얼은 그를 향해 짧게 묵례를 올리고 정면을 보았다. 각종 무기와 마도구가 걸린 거치대, 그리고 그 옆에 선 황성 행정관과 아카데미 교수 두 명이 보였다.
“제한 시간은 한 시간. 어떤 마법을 써도 좋습니다.”
행정관이 앞으로 나서서 시험을 설명했다.
“공격술이든 방어술이든 어떤 마도구를 쓰든 그에 맞추어 환경이 조성될 겁니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며, 약간의 안전 장비 혹은 측정 기구가 나타나는 정도입니다. 보인 마법에 대한 평가는 일차적으로 여기 있는 험블 교수와 래들러 교수가 할 것이며, 최종 평가는 황태자 전하께서 하십니다.”
그녀의 퇴학 여부는 황태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 결과는 이미 뻔했다.
‘뭘 하든 퇴학되지는 않겠지.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하는 건, 이곳에 있는 학생들을 설득하는 것…….’
재능 여부를 보여 주느냐 마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아카데미 생활이 결정된다. 구설수인가 혹은 정당한 인정인가.
“질문 있습니까?”
행정관이 물었고, 애리얼은 고개를 저으며 질문이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 즉시 행정관과 두 명의 교수가 객석으로 물러났다.
이제 실습장의 바닥에 남은 것은 그녀뿐.
애리얼이 선 공간과 객석을 가르며 푸른빛이 도는 투명한 결계가 내려왔다.
바야흐로 시험의 시작이었다.
애리얼은 각종 도구가 걸린 거치대로 향했다. 이천 명이 넘는 전교생의 시선이 느껴졌다. 결계가 소음을 조금 막아 준 덕에 수군거리는 소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준비된 무기와 마도구들을 훑어보았다.
검, 도끼, 활, 총, 여러 모양의 방패, 다양한 크기의 상자, 팔찌, 목걸이, 구체 모양의 무언가…….
그나마 무기는 용도가 명확한 편이었으나, 마도구 쪽은 그 용도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공격술에 적합한지 방어술에 적합한지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애리얼이 마법을 담아 활용할 수 있는 건 무기뿐. 하지만 그걸 쓰려면 데본시아가 쓰지 말라고 경고했던 공격술을 사용해야 했다.
‘무기를 쓰든 안 쓰든 어차피 내가 쓸 수 있는 마법은 공격술밖에 없지만.’
공격술을 쓰면 데본시아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게 된다.
애리얼은 흘긋 발코니석을 올려다보았다. 무표정에서 억지로 입꼬리만 올린 듯한 얼굴의 데본시아가 보였다. 자꾸만 무기 쪽에서 서성대고 있는 자신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한기를 띠는 데본시아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경고했다. 공격술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애리얼은 거치대로 손을 뻗었다. 보란 듯이 총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