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바닥으로 피가 주르륵 흘러 고였다. 스카이라는 침대 난간을 잡고서 피를 뱉어 냈다. 적은 양이 아니었으나 그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소리를 죽여 가며 피를 토해 낸 그가 낮게 욕설을 짓씹고는 입을 닦았다.
“애리얼이 일어나기 전에 시녀 불러서 치워 놓으라고 해.”
레이신은 의자에 몸을 젖히고 앉아 말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스카이라는 주변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여분의 옷가지를 주워 들고서 병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비척거리는 걸음이 척 봐도 그가 힘겨운 상태임을 보여 주었다.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아파 보였으나 레이신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레이신이 딱히 섬세한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스카이라도 그의 도움을 거부할 확률이 컸다.
형제는 닮는다고 했던가. 데본시아처럼 스카이라도 아플 때는 평소보다 더 예민해졌다. 그 누구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길 원했다.
그래서 레이신은 그를 그냥 내버려 뒀다.
기숙사의 시녀들이 더러워진 바닥을 닦아 내고 말끔히 청소를 마쳤을 때쯤, 욕실에서 쿠당탕 요란한 소음이 났다.
시녀들이 나가려다 말고 놀라서 욕실을 주시했다. 레이신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시녀들의 관심을 끊어 냈다.
“내가 확인할 테니까 너희들은 그만 가 봐.”
“네, 서하.”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고서 병실을 나갔다.
레이신은 곁눈질로 애리얼이 아직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욕실 특유의 텁텁한 공기 사이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욕실 바닥에는 상체를 탈의한 스카이라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름대로 훌륭하게 균형 잡힌 그의 창백한 몸엔 토혈 자국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레이신은 쓰러진 그의 곁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도와줘?”
기절한 건 아닌 모양인지, 레이신의 물음에 스카이라가 낮게 욕을 뱉었다. 그러더니 어렵사리 부탁을 꺼냈다.
“부축만 좀…….”
레이신은 스카이라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는 휙 일으켰다. 스카이라는 크게 휘청이다가 겨우겨우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그의 상태는 몹시 나빠 보였으나, 레이신은 부축하는 이상의 친절은 보이지 않았다.
스카이라는 레이신에게 기댄 채 입에 남은 핏물을 퉤 뱉어 내고는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이 상황이 어지간히도 쪽팔리는지 낮게 욕설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분, 조금이지만 몸을 추스른 스카이라가 욕조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로 좀.”
“씻는 것도 도와줘?”
“미친 새끼야. 의자 말하는 거라고.”
거칠게 욕설을 뱉어 낸 스카이라가 레이신을 밀어내고서 벽을 짚었다. 어렵사리 홀로 선 그는 비틀거리며 걸어가 겨우 의자에 앉았다. 고작 그 정도 움직임도 힘겨웠는지 스카이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레이신은 욕실 중앙에 멀뚱히 선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애리얼은 아직 자고 있어.”
“그거 참 다행이네.”
스카이라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손을 휘적거리며 수건을 쥐었다. 피투성이의 몰골부터 수습해야 했다. 그는 욕조의 수전을 틀고 미지근한 물줄기에 수건을 적셨다. 피 묻은 부위를 닦아 내자 흰 수건이 빠르게 더러워졌다. 그가 흘린 피가 많았음을 증명하듯 검붉게.
스카이라는 대충 몸을 닦아 내고는 얼룩덜룩해진 수건을 바닥에 툭 던졌다. 레이신의 눈길이 잠시 떨어진 수건을 향했을 때, 스카이라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수건을 향했던 레이신의 눈이 무뚝뚝한 감사에 다시 스카이라를 향했다.
스카이라는 애써 레이신을 외면한 채 허공만 주시하고 있었다. 거기에 철천지원수라도 있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서.
“그다지 안 고마운 거 같은데.”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든지.”
“뭐…… 아무튼 고맙다는 거지? 알겠어.”
레이신이 적당히 수긍하자 스카이라는 입술을 삐죽이고는 습관처럼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데본시아는? 거기 있었을 텐데.”
“있었어. 앞길을 막길래 순간 이동으로 빠져나왔어.”
“현장은 어땠는데?”
“그을린 자국 빼곤 뭐 딱히.”
“데본시아가 결계를 쳤나 보네.”
“응.”
“……하…….”
스카이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더니 걱정이 잔뜩 서린 목소리를 한탄처럼 내뱉었다.
“하필 전교생이 모인 데서 폭발이 터져서.”
“인명 피해는 없었어. 기물 파손도 크진 않았고.”
“없어도 문제야. 공식적인 자리에서 폭발을 일으킨 건 변함이 없으니까, 애리얼은 이제…….”
스카이라는 차마 말끝을 맺지 못했다. 솔렘에 이어 아카데미에서도 큰 폭발을 일으킨 애리얼은 제국을 위협할 위험 요소로 꼽히게 될 것이다. 그게 자의로 일으킨 폭발이든 타의로 일으킨 폭발이든 상관없었다. 그 정도의 마력량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했다. 그녀가 가진 마력의 위력마저 전교생의 앞에서 명명백백히 밝혀졌으니, 입막음을 하거나 사건을 덮기도 어려웠다.
황성 행정관까지 동석한 자리였으니 오늘의 일은 곧장 황제에게까지 보고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하필이면 황제가 아프고 예민한 이런 시기에.’
스카이라는 상황이 이 꼴로 돌아가게 된 것이 갑갑해 미칠 것 같았다. 황태자에게 대항할 견제 세력을 모으는 와중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진 황제가 애리얼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애리얼은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그것도 두 번이나. 테러리스트로 오인당하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진실로 결백하다 한들 믿어 줄 이가 몇이나 될까.
황자의 지위로 어떻게든 그녀를 비호하기는 하겠으나, 애리얼에게 내려질 징계나 특별 감시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아카데미에서 내려질 징계만 해도 보통이 아닐 게 분명했다. 퇴학까지는 당하지 않아도 특례를 박탈당하고 일반 기숙사로 강등당하겠지. 그러면 일반 학생들과 부대끼며 지내야 하고, 제1 기숙사에 있는 이들에게는 말 한번 못 붙이는 처지가 된다. 특별 감시 대상으로 지정될 게 뻔하니, 그녀를 보는 시선도 곱지 않을 것이다.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황제의 명이라면 데본시아라도 거스를 수 없었다. 아마 데본시아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으리라.
스카이라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을 감고서 호흡을 골랐다. 안 그래도 일이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갈 텐데 당장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나마 폭발에 뛰어들어 간발의 차이로 결계를 펴고 애리얼만이라도 제대로 보호했으니…… 일단 다행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낙관적으로 보기에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만만치가 않았다. 플라넬 왕녀를 퇴학시켜 본국으로 보내고 그나마 숨 좀 돌리나 했더니, 사건이 줄줄이 터져 쉴 틈이 없었다. 심지어는 가장 좋지 않은 형태로 터졌다. 자신이 힘든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애리얼이 힘들게 되는 건…….
스카이라의 낯빛이 심란해졌다.
레이신은 그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았고, 같은 걱정을 하고 있긴 했으나 굳이 그걸 그와 공유하진 않았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의 심정일 것이다.
대화는 끊겼고, 욕실은 조용했다. 스카이라는 계속 사념에 골몰하고 있었다.
지루해진 레이신이 먼저 욕실 문을 열고 나갔다.
때마침 애리얼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가늘게 눈을 떴다.
레이신은 곧장 욕실 문을 닫고서 애리얼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어났네.”
“……공자 서하?”
“응.”
“여기는…….”
“병실. 너 기절했었어.”
“아……. 그럼 스카이라…… 황자 저하는요? 어디 있어요? 괜찮으신 거예요?”
“음……. 아마도 괜찮을 것 같아.”
“아마도…… 라고요?”
“아직 정상은 아니라서. 피를 토했거든.”
“네? 뭐라고요?”
애리얼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레이신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두 눈을 멀뚱히 뜨고서 있다가 이윽고 차분하게 답변했다.
“마력 과부하 때문에 그런 거야. 대충 치료는 해 뒀어. 더 아프진 않겠지.”
“황자 저하께선 어디 계신데요?”
“욕실에.”
“……서하, 방금 욕실에서 나오지 않으셨어요?”
“응. 스카이라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거든.”
레이신이 말을 끝내자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스카이라가 아픈 것도 잊은 채 나타나 소리를 질렀다.
“그걸 왜 말해!”
“궁금해하는 거 같길래.”
“그걸 왜 네가 멋대로 판단해서 지껄이는데!”
“……? 그럼 안 돼?”
레이신이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스카이라는 한껏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애리얼에게 약한 모습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레이신은 뭐가 문제냐는 듯 무심한 얼굴로 침대 프레임에 기대어 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저거한테 뭘 기대하겠어.’
스카이라는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하필이면 애리얼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아직 상의를 입지 않은 상태인데. 그걸 인식하자 안 그래도 달아올라 있던 그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애리얼은 그를 보고서 반가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시지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카이라는 열었던 문을 쾅 닫고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 광경을 가만히 관찰하던 레이신이 애리얼을 향해 말했다.
“멀쩡한 거 같아.”
“……네. 그런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