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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48)화 (148/264)

애리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너무 급작스러워 얼떨떨하긴 했으나, 스카이라가 멀쩡해 보여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신은 안도감이 어른대는 애리얼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너한테 설명할 게 있어.”

“시험의 결과인가요?”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거야.”

레이신의 말에 애리얼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꺼낼 용건이 어떤 것일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각오하고 있었다.

그녀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솔렘의 시험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와 상황은 달랐지만, 맥락은 비슷했다. 고위 귀족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위협적인 폭발을 일으켰고, 그들에게 위협을 끼쳤다.

그건 큰 죄였다. 그 책임을 물어 구금이라는 처분을 받았었다. 그나마도 참작의 여지가 있어서 가벼운 처분을 받은 거였다.

그랬기에, 애리얼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저는 어떤 처분을 받게 되나요?”

차분한 얼굴로 하는 그녀의 발언에 레이신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알았어?”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요. 솔렘의 시험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니까 처분이 가볍지는 않겠네요.”

“생각보다 침착하네. 억울하지 않아?”

“그런 건 아니지만…… 억울해도 별다른 방도가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녀가 그렇게 말을 꺼냈을 때, 욕실 문이 열리며 스카이라가 나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벌써 포기하지 마.”

“저하…….”

“어떻게든 해 줄게.”

표정은 너무나도 고요했으나, 스카이라의 눈빛은 아주 진지했다. 정말 어떻게든 해 줄 것 같았다.

***

어둠이 내린 시각.

아나스타샤는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조용히 실습장으로 걸음했다. 출입구로 다가가자 현장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그녀를 알아보고서 안내했다.

결계로 접근이 제한된 실습장은 아직 완전히 수습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부서져 널린 파편들과 새까맣게 탄 바닥이 그대로 보였다. 폭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적어도 이틀은 현장 보존을 해 둘 것이다.

“출입은 오 분만 허용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아나스타샤는 결계를 무시하는 반지를 끼고서 안으로 진입했다. 아직도 탄내가 나는 실습장의 중앙으로 걸어가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밤중에 온통 불타고 그을린 잔해 속에서 탐색하기란 쉽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도 오 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탐색 마법을 펼쳤다. 분명 마력의 잔재가 남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내가 본 게 확실하다면, 아직 그게 여기 있을 거야!’

간절함을 담고 뻗어져 나간 아나스타샤의 마력이 한 군데 모였다. 아나스타샤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보랏빛 마력이 검은색의 파편을 감싸고 돌았다. 아나스타샤는 곧장 몸을 굽히고서 마력에 휩싸인 작은 파편을 손에 쥐었다. 희미하게 황태자의 마력이 느껴졌다.

이 파편은 황태자가 애리얼에게 건넸던 브레이슬릿의 조각인 게 틀림없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아나스타샤는 조각을 꾹 말아 쥐며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폭발 직전에 애리얼의 손목에서 떨어져 나왔던 건 황태자의 마력이 담긴 브레이슬릿이 맞았다. 그러니 그걸 토대로 아나스타샤가 했던 추측들 역시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쏘아지지 않던 총, 부서진 브레이슬릿, 폭발, 새카맣게 변했던 과녁.

브레이슬릿이 떨어져 나간 직후 폭발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 브레이슬릿은 마력을 억제하는 장치의 일종일 것이다.

아나스타샤의 예측은 정확하진 않았지만 얼추 비슷하게 들어맞기는 했다.

황태자는 애리얼의 마력을 억제하려고 했다. 과녁을 까맣게 물들일 정도로 강한 마력을 지닌 이를 억누르고 성장을 저해했다. 그로 인해 초래된 불균형이 오늘의 시험에서 폭발로 나타났다. 이마저도 황태자가 직접 주관한 시험이었는데.

‘애리얼을 죽이려던 건 아닐 거야.’

다만 그 잘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지는 걸었다.

아나스타샤는 애리얼의 마력 수준이 고작 밑에서 두 번째인 ‘특수 방어 마법’으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런데 오늘 느꼈던 애리얼의 마력은 특수 마법사 수준은 가뿐히 될 듯한 수준이었다. 황태자가 이걸 몰랐을 리 없었다.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다.

‘애리얼을 추락시키고, 고립시키고, 외부와 유리해서…… 자신에게만 종속되도록 전부 뺏으려는…….’

거기까지 추측한 아나스타샤는 발작하듯 손을 털어 냈다. 그녀의 손에 올라가 있던 잔해물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애리얼이 처한 상황에 아찔한 공포를 느꼈다.

권력과 지위를 자존심처럼 붙드는 뼛속까지 고위 귀족인 그녀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만큼 탐욕스러웠고, 뭐든 뺏기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지위든 권력이든 재물이든.

그리고 황태자는 상대가 뭘 가지고 있든 쉽게 빼앗을 수 있는 권력자다.

그는 총애하는 애리얼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으려 했다. 종국에는 애리얼 본인마저도 얻어 낼 생각이겠지. 그렇게 전부 빼앗기고서 얻어지는 게 황태자의 사랑이라면, 아나스타샤는 그 사랑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비참하게 느낄 것이다.

‘내가 원했던 건……, 내가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야.’

애리얼이 되고 싶을 정도로, 애리얼을 질투하고 선망했던 건 그녀가 황태자의 총애로 얻게 될 것들이 부러워서였다. 하지만 총애의 결과는 그녀가 상상한 것과 크게 달랐다. 소름만 끼쳤다.

아나스타샤는 아름답고 고고하며 압도적인 황태자를 사랑했으나, 이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만약 권력과 재력을 빼앗기고 추락하게 된다면 자결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것들에 소유욕이 넘쳤다.

그 모든 것을 잃을 바에는 그의 사랑을 포기하는 게 나았다. 괜히 황태자비 자리를 얻겠다고 설쳤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공포에 질린 아나스타샤는 부리나케 실습장을 빠져나갔다.

같은 시각, 데본시아는 집무실에서 아나스타샤의 동향을 모조리 듣고 있었다. 제라온은 그녀의 행동거지를 속속들이 보고한 후 황태자의 의중을 물었다.

“어떻게 조치할까요?”

“필요할 때 내가 정리할게.”

황태자는 약간의 미소를 짓고서 덤덤하게 말했다. 제라온은 불안한 심정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받아들이실까요?”

“욕심이 많은 애지.”

“역시 반발하시겠죠?”

“아니. 욕심이 많으니까 받아들일 거야.”

“샤펠 공작은 어떻게 나올까요?”

“제 딸을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이니까 딸의 의견을 존중하겠지.”

황태자는 나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라온은 굳은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황성을 장악해 가는 제 주군이 얼마나 무서운 이인지 하루가 다르게 실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허클리 공녀에게 내려질 황제의 징계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그것까지도 이용할 인물이었기에, 그 중심에 선 공녀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황태자의 총애는 달기만 한 것이 아니니까.

***

애리얼은 저를 도와주겠다는 스카이라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어디까지든 얼마든지 선을 넘을 것 같아서였다. 가진 것을 잃고, 사람을 상해하게 되더라도 제 안위를 지켜 줄 것 같아서.

애리얼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절박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징계는 그녀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데본시아가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게 막을 테니까. 하트 다섯 개분의 호감도를 가진 황태자가 그 권력을 이용해서 제 목숨 줄 정도는 지킬 것이다. 그거면 됐다.

이 이상으로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특히나 선을 넘을 것 같은 스카이라의 호의는 받으면 서로에게 독이 된다.

애리얼은 타인을 해하면서까지 자신을 비호해 주길 원하지 않았다.

스카이라는 그러한 그녀의 의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러는 거야?”

“아니요. 오히려 믿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런 거라면 더 이해 못 하겠는데.”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기숙사 방문 앞에서 몇 시간째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도움을 바랄 때까지 이러고 있을 셈인지.

그 탓에 애리얼은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었다.

황성의 징계로 애리얼은 가진 특혜를 모두 박탈당했다. 제1 기숙사 동을 떠나 제3 기숙사 동으로 가야 했고, 백색 교복도 입을 수 없다. 카논도 더는 데리고 있을 수 없었다.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되어 어딜 가든 감시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생각보다는 가벼운 징계였으므로, 애리얼은 크게 불만이 없었다. 어차피 제국법상 억울하더라도 상층부의 징계에는 따라야 하는 처지였고,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다. 괜히 특혜를 되돌려받으려고 스카이라의 도움을 받으면 더 큰 파장이 일 것이다.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말씀은 무척 감사하지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저하.”

애리얼이 허리를 굽히며 사력을 다해 거절하자 그도 주춤거렸다. 애리얼은 이 기회를 잡아 무릎까지 꿇었다.

스카이라가 당혹한 얼굴로 애리얼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일어나.”

애리얼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시고, 많은 특례를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저를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가슴에 품고 살겠습니다.”

“너…….”

감사 인사에 스카이라는 오히려 분노한 듯 이를 깨물었다. 말만 감사지 이건 확실한 거절이었다. 그의 호의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아예 작별을 고하는 듯한 태도였다.

스카이라도 이런 애리얼의 태도에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징계는 참지 못할 정도로 무겁지 않다. 특별 감시가 붙었으니, 그녀는 안 좋은 소문에는 휘말리겠지만 신체적 위협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러나 적당히 안위를 살피는 게 정답이다. 이러는 게 뒤탈이 없는 걸 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끝나면 애리얼과 스치듯 만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제3 기숙사로 가 버리게 된다면, 이제 더 이상은…….

“……하나만 묻자.”

조금 차분해진 스카이라의 목소리에 애리얼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애리얼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다리를 굽혔다. 애리얼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 내려왔다. 둘의 시선은 어느새 수평이 되었다.

“넌…… 여길 떠나는 게 아쉽지 않아?”

스카이라의 목소리는 무척 침착했다. 무덤덤하게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애리얼은 그가 예사 소리로 이런 걸 묻고 있는 게 아님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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