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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49)화 (149/264)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파문이 일고 있었다. 얼핏 간절함이 보이는 것만 같은 그의 눈빛에 애리얼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대답을 망설일수록 스카이라의 평정이 깨져 갔다. 혹시나 하는 희망 고문에 간절함이 불어났다. 스카이라는 어느새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서 맹렬한 눈빛을 보냈다.

“싫다고 하면, 내가 막아 줄게. 안 나가게 해 줄게. 빼앗긴 특혜도 전부 되돌려줄게.”

스카이라는 그녀가 고개 숙이고 부탁해야 할 일을 오히려 제 쪽에서 애원하듯이 말했다. 고개만 끄덕이면 뭐든 다 막아 줄 것 같은 그의 두 눈이 애리얼과 시선을 맞췄다. 애리얼을 도우면 그 자신은 손해만 보게 될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걸 너무나 원하는 듯이.

그래서 애리얼은 흔들렸다. 그다지 원하지 않는 일인데도,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왜냐하면 스카이라는……. 그는…….

‘내 편…… 같아.’

그는 맹목적일 정도로 애리얼의 편만 들었다. 전후 사정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큰 죄를 저질렀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을 기세였다. 그는 그녀가 무고하든 말든 그녀의 편이 될 생각이었다.

그 눈에 서린 감정은 순수했다. 순수한 바람, 애정. 그런 것들로 애리얼을 정면에서 붙들었다. 도무지 숨길 줄을 몰랐다. 언제나 늘 애리얼을 바라보고, 애리얼에게 애정을 느끼고, 맹목적으로 애리얼을 원하는…….

완전한 아군.

이걸 어떻게 단칼에 거부할 수 있을까. 완전히 혼자가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저…… 는…….”

애리얼이 그의 감정에 휩쓸려 무심코 입을 열었다.

그러자 스카이라는 다그치듯이 그녀를 붙잡고서 다가왔다. 푸른색의 눈이 불꽃처럼 일렁이며 얼른 자신을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범람하는 애정을 담고서 그렇게, 그녀에게.

나는 네 편이야, 하고.

퍽.

둔탁한 소음이 났다. 애리얼이 이마가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그의 어깨를 세게 밀친 것이었다.

스카이라의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그를 밀친 애리얼 역시 커다래진 눈으로 손끝을 떨었다.

“……애리얼?”

당황한 그가 멍한 목소리를 내자, 애리얼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와 눈을 맞추기가 두려웠다. 의지할 곳을 찾는 심장이 불편하게 뛰었다. 그를 붙잡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말에 무섭게 흔들리는 자신이 불안했다. 불안했기에 더 단칼에 잘라 내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두 번이나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고작 감사 인사밖에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애리얼은 마치 죄인 같은 표정을 짓고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서 스카이라를 지나쳤다.

“뭐……? 애리얼!”

뒤에서 스카이라가 소리쳤으나, 애리얼은 멈추지 않고 빠르게 달렸다. 계속 스카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더 다급히 도망쳤다.

스스로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를 믿고서 기대려 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의지하려 하고 말았다.

그의 눈에, 표정에, 분위기에 서린 감정이 너무나 선명해서. 데본시아는 거짓 같았는데, 스카이라는 진심 같아서. 그래서 붙잡을 뻔했다. 그랬다면 스카이라의 기대감을 충족시켰을 것이고, 그의 호감도가 오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마터면 스카이라를 오버히트가 될 수 있는 호감도 수치까지 올려 버릴 뻔했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기껍게 생각하려 했다.

목표인 특별 엔딩도 잊고서…….

***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만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만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징계가 내려져 더 이상 제1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으므로.

카논도 백작저로 돌아갔고, 애리얼은 직접 짐을 챙겨서 제1 기숙사를 나왔다. 그나마 마지막이라고 차는 지원해 줘서 제3 기숙사까지는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원래도 황성에서 잘 나오지 않던 데본시아는 물론이고, 스카이라까지 바빠서 기숙사에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애리얼은 이 틈을 타 걸음을 옮겼다. 지금 스카이라를 만나면 무슨 얼굴로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나지 않는 게 편했다.

‘여길 나가면 공략 대상들과의 불편한 접촉도 줄겠지.’

오히려 홀가분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짐 가방을 들고서 문을 나섰다.

특별 감시 대상이 된 애리얼에겐 시녀도 기사도 함부로 말을 걸지 않았다.

레이신만 알은체를 했다.

“지금 가?”

애리얼은 짐 가방을 들고서 고개를 돌렸다. 출입문 옆에 기대선 그가 보였다. 늘 그렇듯 그다지 단정치 않은 차림이었다. 하얀 블레이저 사이로 구겨진 교복 셔츠가 보였다. 기다란 금발 역시 헝클어져 있었다.

“네, 마침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도와줄까?”

특혜도 없어진 마당인데 현실 감각이 없는 물음이었다. 참 그다운 물음이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애리얼은 정중하게 거절을 전했다. 레이신도 딱히 더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그에게 묵례를 남긴 후 애리얼은 차에 올랐다.

어차피 그와는 영구적인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스카이라처럼 초조하게 굴지 않았다.

오월의 두 번째 주가 시작되는 날, 애리얼은 제1 기숙사 동을 떠났다.

이제는 백작 공녀답게 제3 기숙사 동에서 생활해야 했다.

제3 기숙사 동은 실습장이 있는 11, 12관의 뒤에 자리한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이었다. 커다란 중정이 있어 가운데가 뚫려 있고, 창문으로 건너편 기숙사 방이 보였다.

내부는 제1 기숙사와 달리 어두운 색의 나무로 되어 있었다. 좋은 자재로 지어지긴 했지만 오래된 티가 드문드문 났다. 좋게 말해 고풍스러운 느낌이었으나 설화 석고로 장식된 제1 기숙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월요일 오전의 기숙사는 조용했다. 아직 수업이 한창인 시간대라 학생이 없었다.

애리얼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짐을 옮기고 방을 배정받았다. 4층의 왼쪽 끝 방. 실습장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2인실이었다.

대충 짐을 푼 애리얼은 방을 둘러보았다. 가운데에 녹색 카펫이 깔려 있고, 양쪽으로 침대와 책상, 옷장이 각각 놓여 있는 구조였다. 제1 기숙사에서 쓰던 방의 사분의 일도 안 되는 크기였다. 욕실이 방에 딸려 있다는 점만 제1 기숙사와 같았다.

애리얼은 오른쪽 벽면에 붙어 있는 제 침대로 가서 앉았다. 반대쪽에는 그다지 쓴 흔적이 없는 룸메이트의 침대가 보였다. 침대뿐 아니라 책상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다 할 물건을 올려놓지 않았다. 정리를 무척 열심히 해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인가 싶었다.

‘내 룸메이트는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과 더불어 묘한 불안이 들었다. 모르는 이와 함께 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흔한 감정이었다.

애리얼은 물끄러미 반대쪽 침대를 보다가 문득 시간표를 떠올렸다.

퇴학은 되지 않았으니 시간표를 짜야 했다. 공개 시험을 치렀던 그녀의 급박한 사정을 고려해 준 아카데미 덕분에 시간표는 일주일 내로만 제출하면 됐다.

‘솔직히 일주일이나 시간이 필요하진 않은데.’

애리얼은 목표가 확실했다. 곧장 강의 안내서를 꺼내 최악으로 시간표를 짰다.

교수가 별로라 인기 없는 수업은 물론이고, 과목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루한 것들 위주로 골랐다. 인적이 드문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건 필수 고려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공략 대상은 물론이고 사람 자체를 피할 수 있는 시간표가 완성되었다. 이걸 제출하기만 하면 유령과도 같은 아카데미 생활의 시작이었다.

애리얼이 만족한 얼굴로 시간표를 들고서 책상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백색에 가까운 은빛 머리칼이 창문 넘어 비친 햇살에 환하게 드러났다. 이 세계에서도 희귀한 색에 속하는 머리칼이었다.

애리얼을 발견한 백발의 소녀가 방문을 열다 말고 주춤거렸다.

어색하게 탐색하는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애리얼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소녀가 마지못해 답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렵사리 인사를 꺼냈다.

저 소녀의 뽀얀 피부와 청순한 인상이 애리얼은 조금 낯익었다. 어디선가 스치듯 본 기억이 났다.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는데, 소녀가 검은색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혼자 써서 좋았는데…….”

“미안해요.”

소녀의 혼잣말에 애리얼은 무심히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소녀가 은회색의 눈동자를 동그랗게 키우며 움찔거렸다.

“아, 아니에요! 제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네.”

“그리고 저기…….”

“…….”

“저, 그쪽보다 후배예요. 말 놓으셔도 돼요.”

“응, 알았어.”

애리얼이 곧장 반말을 쓰자 의외였는지 소녀의 눈이 또 커다래졌다. 그러다 은회색의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더니 대뜸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예요?”

“애리얼 허클리.”

“블랑셰 멜로르입니다.”

소녀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애리얼은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 냈다. 입학식 날 단상에서 편입생으로 자신과 함께 호명되었던 사람.

애리얼은 블랑셰의 손을 잡으며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가지런한 눈썹과 처연하게 나풀거리는 속눈썹,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섬세한 이목구비. 가련한 느낌의 인상이 어딘지 익숙했다. 입학식 때 아나스타샤는 몰라도 블랑셰의 얼굴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기이했다.

‘어디서 봤지?’

자꾸만 묘하게 낯이 익어서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집요한 눈빛을 했다.

“신기해요?”

“응?”

“자꾸 보시길래…….”

블랑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말하자, 애리얼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물러났다. 악수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끝을 맺었다.

“초면에 미안해.”

“별일도 아닌데, 괜찮아요.”

블랑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다리를 슬쩍 물리더니, 다시금 애리얼을 보고서 물었다.

“그런데 왜 계속 봤어요?”

“그냥 어디선가 본 것같이 낯이 익어서.”

“흐음……. 제가 낯이 익어요?”

“미안, 착각이었나 봐.”

“아닐걸요?”

블랑셰는 묘한 뉘앙스로 애리얼을 떠봤다. 애리얼은 조금 당황한 채 그녀를 응시했다. 블랑셰가 이리저리 시선을 틀다가 곁눈질로 애리얼과 눈을 맞추었다.

“혹시 무하 공자 알아요?”

매우 뜻밖의 인물이 존칭도 생략된 채 블랑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애리얼은 놀라서 말을 버벅거렸다.

“어, 어떻게…….”

“만난 적 있죠?”

블랑셰는 아예 반쯤 확신하는 말투였다.

틀린 말도 아니어서 애리얼은 솔직하게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제가 낯이 익은 걸 거예요. 무하 공자는 제 사촌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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