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사실이었다. 블랑셰를 응시하던 애리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자신의 룸메이트가 무하 공자의 사촌이라니. 그러고 보니 무하 공자의 잿빛 머리칼과 블랑셰의 은빛 머리칼이 겹쳐 보였다. 처연한 듯 몽환적인 인상도 닮아 있었다.
‘사촌……. 그러면 말이 되는 듯도 하고.’
흉내 내기 어려운 인상이 너무도 닮아 있던 탓에 애리얼은 쉽게 수긍했다.
그러자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블랑셰는 왜 제3 기숙사 동에 있을까.
무하 공자와 사촌이라면 블랑셰도 상당한 귀족 가문의 자제일 텐데. 적어도 왕족이나 후작 가문이 쓰는 제2 기숙사 동에 있어야 되지 않나.
“저는 마저증이 있어요.”
애리얼의 의문을 눈치챈 듯, 블랑셰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돌연 고백했다.
“마저증?”
“몰라요?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무하 공자가 앓는 병이요.”
“……알고는 있었어.”
“알면 설명 안 해도 되겠네요.”
블랑셰는 대수롭잖게 말하며 제 침대에 풀썩 앉았다.
애리얼은 놀란 얼굴로 시간표를 쥔 채 멀뚱히 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여긴 마력을 가진 엘리트 계층에 마법을 가르치는 특수한 아카데미였다. 마력이 없거나 부족하면 애초에 입학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런데 마저증인 블랑셰가 어떻게 입학했는가. 답은 쉽게 나왔다. 블랑셰는 편입생으로 이곳에 왔다. 애리얼처럼 특례를 받고서 입학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학생이 마저증이라면?
애리얼은 공개 시험에서 빈총만 쏠 때 들려오던 학생들의 야유를 떠올렸다.
이곳의 학생들에게는 현존하는 최고의 마법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원석으로서의 자긍심이 높았다. 그런 만큼 실력도 재능도 없는 존재가 특례를 받는 것을 경멸했다.
블랑셰가 마저증을 앓는다는 걸 알면, 이곳의 학생들은 블랑셰에게 혐오감을 표출할 것이다. 블랑셰에게 실제로 실력이 있든 없든, 마저증이라는 것만으로 공격 대상이었다.
애리얼은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시였으나 전교생에게 둘러싸여 야유와 비난에 노출되었던 탓에, 그 압박감을 잘 알았다. 그랬기에, 애리얼은 다소 걱정스러워하는 눈길로 블랑셰를 보았다.
“그런 거 나한테 말해도 괜찮아?”
“여기 그거 모르는 사람 없어요. 무하 공자가 마저증인 건 모르겠지만, 제가 마저증인 건 공공연한 사실이라.”
블랑셰는 덤덤했다. 하긴 함께 수업을 듣고 실습도 했을 텐데 마저증을 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저렇게 담담한 걸 보면, 생각 외로 괴롭히는 사람은 딱히 없나 보네.’
애리얼은 그녀의 반응에 조금 안심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난 시간표 좀 제출하게 올게.”
“네, 그러세요, 선배님.”
선배라는 말에 문을 열던 애리얼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블랑셰가 고개를 갸웃하며 애리얼을 보다가 살포시 눈웃음을 지었다.
“선배라는 말 처음 들어 보셨어요?”
“……응.”
순진한 대답에 블랑셰가 입꼬리까지 끌어 올리며 방긋 웃었다.
“앞으로는 자주 듣게 되실 거예요.”
그 말을 듣고서 애리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왔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선배님…….’
아카데미라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 떠오르게 하는 말이었다. 여러 가지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는, 비슷한 또래끼리의 추억을 만드는 곳이다. 애리얼과는 연이 없던 이야기였는데, 선배라는 그 한마디에 문득 체감되었다.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고 보니까 공략 대상이나 카논 외에 제대로 대화할 사람이 생긴 건 처음이네.’
애리얼은 설레는 얼굴을 하고서 시간표를 제출하기 위해 기숙사 1층에 위치한 행정실로 향했다.
우우우웅-
층계를 내려오는데 불길한 진동음이 울렸다. 설렘이 물러나고 경계심이 차올랐다. 대체 누가 여기까지 온 건지. 벽면에 붙어 슬쩍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확 드리웠다.
“뭐 해?”
“레이신!”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반응해 애리얼은 무심코 그의 이름을 외쳤다. 익숙한 얼굴이 맞붙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전에 장식되는 조각상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고 훌륭한 외관이 보석 같은 금빛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이토록 가까이서 그를 본 건 처음이었다.
“어디 가고 있었어?”
존칭도 없이 허락하지도 않은 이름을 불렀는데도 그는 태연하게 굴었다. 애리얼만 제가 내뱉은 말에 놀라 입을 막고서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공자 서하.”
“웬 사과?”
“함부로 존함을 불러 버려서요…….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 시간표 내러 가는 거야?”
레이신은 대수롭잖게 여기며 애리얼이 든 종이를 톡 건드렸다.
“아, 네. 지금 막 완성해서 제출하러 가는 길이에요.”
“봐도 돼?”
“……궁금하세요?”
“응.”
애리얼은 조금 망설이다가 그에게 제 시간표를 넘겼다. 특별 대우도 박탈된 마당에, 제국에 셋뿐인 공작가의 차기 가주가 궁금하다는데. 그가 달라면 애리얼은 전부 줘야 했다.
레이신은 넘겨받은 애리얼의 시간표를 찬찬히 훑어보고는 다시 그녀에게 넘겼다.
“이상한 것만 듣네.”
일부러 그렇게 채운 거니 당연하다. 애리얼은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그냥 웃기만 했다.
레이신은 한 걸음 물러서며 애리얼이 행정실로 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줬다. 더 궁금한 건 없는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꾸벅 고개를 숙여 묵례하고는 행정실에 들어가 시간표를 제출했다. 그러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나왔을 때, 여전히 복도를 지키고 선 레이신을 발견하곤 얼굴을 굳혔다.
“서하, 혹시 이곳에 볼일이 있으신가요?”
“음……. 아니?”
“그런데 왜 여기 계세요?”
“그냥. 너 보러.”
눈앞이 캄캄해지는 소리였다. 애리얼은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곳은 제3 기숙사 동이다. 극소수 인원만 지내는 곳이 아니란 소리다. 지금이야 한창 수업이 진행될 시간이라 조용하다지만, 곧 이곳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나타날 것이다.
일단은 레이신을 회유해서 장소라도 옮겨야 했다.
“서하, 우선은 자리를 옮겨서 말씀을 진행하는 게 어떠세요?”
“할 말은 크게 없는데.”
“그러면…….”
“내가 있는 거 불편해?”
그가 불쑥 물어 왔다. 애리얼이 현명하게 대답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사이 레이신이 말을 이어 갔다.
“넌 시선을 싫어했지? 주목받는 것도 싫어하고.”
“…….”
“정답이야?”
“네. 정답…… 이에요.”
애리얼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레이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오래 걸리지 않아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는 장소를 가려서 나타날게.”
무슨 소린가 싶은 말을 대뜸 내뱉더니, 레이신은 몸을 돌리고서 근처의 창문을 열었다. 애리얼의 시선이 그를 좇아갔다. 갑자기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내리쬐고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날랜 동작으로 창문을 넘어 건물 밖으로 휙 빠져나갔다. 길게 땋은 금발이 나풀거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애리얼은 당황한 얼굴로 그가 빠져나간 창문을 바라보다가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장소를 가려서 나타난다니? 오긴 계속 올 거라는 소리지?’
그가 한 말을 곱씹을수록 어리둥절했다. 그나마 장소는 가려서 나타난다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문제는 레이신이 어떤 기준으로 장소를 가릴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애초에 그의 기준이라는 건 애리얼이 생각하는 기준과 많이 다를 게 분명했기에.
‘그냥 내 쪽에서 최대한 피하는 수밖에 없나…….’
애리얼은 한숨을 폭 쉬며 4층 기숙사 방의 문을 열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블랑셰는 그새 어딜 나간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살짝 시트가 흐트러진 그녀의 침대를 보다가 제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설마 레이신이 2인실인 기숙사 방에 나타나진 않겠지?’
그를 떠올리자 초조해졌다. 레이신이라면 갑자기 대뜸 방문을 열고 들어와선 ‘여긴 두 명이서 써? 몰랐네.’ 하고 발언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러면 블랑셰에게도 큰 민폐였다.
‘차라리 지금 나타나면 미리 설명이라도 해 줄 텐데……. 무슨 기준으로 장소를 고르겠다는 건지도 물어보고.’
아예 그녀 쪽에서 레이신을 먼저 찾아가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난감한 상황이 연출될 바에는 미리 방지해 두는 게 좋을 테니까.
애리얼은 레이신을 찾기 위해 착잡한 얼굴로 휴대폰을 켰다. 레이신의 프로필 창을 띄우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묘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공략 대상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렉시우스 크레시앙]
*[레이신 디 솔렘]
*[휘아킨 무하]』
[???]로 표기되었던 히든 캐릭터의 이름이 떠올라 있다. 무하 공자의 것임이 분명한 이름이다.
“대체 이게 언제…….”
애리얼은 홀린 듯 중얼거리며 새로 등장한 이름을 눌렀다.
『휘아킨 무하
*직위: 공자(제국의 개국 공신 중 하나인 무하 공작의 외동아들)
*나이: 17세
*거짓말에 주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3 기숙사 동 - 4층』
프로필이 떠오른 것도 황당한데 심지어 같은 층에 있다.
애리얼은 화들짝 놀라 지도 창을 띄우고 그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정확하게 애리얼과 같은 층에 잿빛 머리칼을 지닌 무하 공자의 초상화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번에 무하 공작가에서 봤던 그 얼굴이다.
“왜 여기에…….”
그러다 문득 애리얼은 그의 프로필 창에 적힌 나이가 눈에 들어왔다. 17세.
현재 애리얼의 나이가 18세이니 그는 애리얼보다 한 살 연하였다. 그 사실에 애리얼은 공교롭게도 자신을 선배님이라 부르던 블랑셰가 떠올랐다. 프로필 창이 공략 대상과 제대로 마주해야 활성화된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블랑셰 외엔 이렇다 할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니…… 아니지. 설마……. 에이…… 그럴 리가……. 사촌이랬잖아…….”
연신 혼잣말로 부정하며 억지로 합리화할 이유를 찾는데, 무하 공자의 초상화가 딱 애리얼이 있는 기숙사 방 문 앞에 멈췄다.
애리얼은 얼른 휴대폰을 숨기고서 긴장한 얼굴로 문을 주시했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그렇게 나타난 인물은…….
“왜 그렇게 보세요, 선배님?”
은백발을 반짝거리며 나타난 블랑셰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걸어왔다. 초상화 속 무하 공자의 얼굴과 무척 닮아 있는 얼굴로, 여자 교복을 입고서. 무하 공자가 나타나야 할 자리에 그녀가 나타났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애리얼은 혼란에 빠져 대답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분명 그녀는 무하 공자의 사촌이라고 말했었고, 태도에 이상한 점도 딱히 없었는데…….
『*거짓말에 주의』
무하 공자의 프로필 창에 적혀 있던 주의 사항이 순간적으로 애리얼의 뇌리를 스쳤다.
애리얼은 뻣뻣한 표정으로 벌렸던 입을 꾹 다물었다.
사촌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눈앞에 있는 블랑셰 멜로르는 휘아킨 무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내려지려고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