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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51)화 (151/264)

“선배님?”

블랑셰가 재차 애리얼을 불렀다.

애리얼은 두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혼란에 빠져 있는 얼굴로 맹하니 블랑셰를 보았다.

“어?”

“무슨 문제 있어요?”

“아, 아니……. 괜찮아.”

애리얼은 시선을 피하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블랑셰는 별 의심 없이 문을 닫고 들어오더니 애리얼에게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연하늘색 포장지에 싸인 작은 과자 같은 거였다.

“휴게실에서 가져왔어요. 드실래요?”

“이건…….”

“초콜릿이에요. 애들이 있을 때는 먹기 힘들거든요. 인기가 많아서.”

“일부러 가지고 와 준 거야?”

애리얼은 블랑셰가 내민 초콜릿을 받아 들고서 물었다. 블랑셰는 제 침대로 가 앉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기회가 아니면 구경도 못 하실 거 같아서요.”

“그렇게 인기가 많아?”

“네. 매주 수요일에 한 번만 배급되는데, 황성에서 주는 거래요. 마력에 따라 당도가 달라진다나…….”

블랑셰는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을 손가락에 감으며 설명했다. 누가 보아도 애리얼 또래의 여학생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늘고 높은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다. 외모는 비슷하나 그 외에는 무하 공자와 달랐다. 블랑셰는 어느 곳을 뜯어봐도 여자였다.

마법으로 위장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저한테 뭐 할 말 있어요?”

애리얼의 지긋한 시선에 블랑셰가 의아해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제야 애리얼은 제 시선이 꽤 집요했음을 느끼고 눈을 내리깔았다. 블랑셰에게 혹시 본인이 무하 공자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심지어 오늘이 초면이다. 애리얼은 블랑셰에게서 건네받은 초콜릿만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챙겨 줘서 고마워.”

“별거 아닌데요, 뭐.”

“아냐, 그래도.”

일부러 챙겨 준 호의에 감사를 전하며 애리얼은 건네받은 초콜릿의 하늘색 껍질을 깠다. 직사각형 모양의 흰 초콜릿이 나타나 은은한 단내를 풍겼다. 그러고 보니 마력에 따라 당도가 다르게 느껴진다고 했었나. 호기심을 느낀 애리얼은 흰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으…… 우욱.”

애리얼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지독한 단맛. 고문에 가까운 달기에 헛구역질이 났다. 초콜릿이 닿은 입 안 점막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수준의 맛이었다. 입 안에다 시럽을 가득 넣고 숨 구멍을 틀어막은 듯 느글거렸다.

“선배님?”

블랑셰가 의아해하며 애리얼을 부른 순간, 애리얼은 참지 못하고 욕실로 뛰어갔다. 다급히 문을 열고 세면대에다 초콜릿을 뱉었다. 겉면이 살짝 녹은 초콜릿 덩어리가 배수구로 떨어졌다.

마력에 따라 당도가 다르다더니, 이런 거였나.

“선배님, 괜찮아요?”

블랑셰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애리얼에게 다가왔다.

애리얼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세면대를 잡고서 입 안에 남은 잔여물과 타액까지도 전부 뱉어 내고, 대여섯 차례에 걸쳐 입을 헹궜다. 지나치게 씻어 내서 혀가 아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은 단맛에 턱이 떨렸다.

“괜찮으세요?”

“응……. 괜, 찮아.”

애리얼은 가까스로 블랑셰의 물음에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세면대 위에 붙은 낡은 거울에 물기로 축축해진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거울 한쪽 구석에는 놀란 듯한 블랑셰의 얼굴이 보였다.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온 애리얼은 손을 들어 젖은 입가를 닦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추스르며 거울로 제 모습을 점검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애리얼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입가를 훔친 왼손, 소매가 내려가 드러난 손목에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광택을 내며 위치한 검은색의…….

“많이 안 좋아요? 보건실에라도 가 보실래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블랑셰가 조심스럽게 애리얼의 안색을 살폈다.

애리얼은 사념을 잠시 미뤄 두고서 대답했다.

“보건실은 괜찮아. 근데…… 내가 먹은 초콜릿이 정말 인기가 많은 게 맞아?”

“별로였어요?”

“너무 달아서…….”

“그래요? 몰랐습니다. 죄송해요.”

블랑셰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애리얼은 블랑셰의 진중한 태도에 손사래를 쳤다.

“아냐, 나 챙겨 주려고 가지고 온 거잖아. 사과하지 마.”

블랑셰는 애리얼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하더니 욕실을 나갔다.

욕실에 홀로 남은 애리얼은 왼쪽 소매를 걷고 손목을 확인했다. 매끈한 왼쪽 손목에는 그 어떤 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인식표처럼 검은색 띠가 둘려 있던 자리에 새하얀 살결만이 드러났다. 눈을 씻고 확인해 봐도 없다. 거의 일 년 가까이 착용해서 익숙해진 브레이슬릿. 데본시아가 줬던 끔찍한 마도구가…… 없다.

‘언제 떨어진 거지?’

애리얼은 브레이슬릿이 사라진 자리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바람에 미처 인지하지 못했었다.

‘설마 그때, 공개 시험에서 떨어졌나? 폭발 때문에 부서진 건가?’

마력 과다로 얼금얼금 금이 가서 터진 총을 생각하면, 브레이슬릿도 아주 멀쩡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총과 브레이슬릿은 그 강도가 다를 터였다. 데본시아가 직접 제작한 마도구인데, 설마하니 그때 그 한 번의 폭발로 부서졌을 리 없다.

‘아니면 그 전에 솔렘에서부터…….’

그러고 보니 솔렘의 시험에서 브레이슬릿의 방어술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적이 있었다. 공작저의 북문 앞에서 개와 고양이를 섞은 것 같은 마수에게 목을 물렸을 때.

‘그때부터 결함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리하여 공개 시험에서의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애리얼은 아찔함에 어깨를 움츠렸다. 만일 그때 스카이라가 자신을 구하러 와 주지 않았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며칠 전 그를 매몰차게 밀어냈던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좀 더 친절하게 감사를 전하고,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어야…….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애리얼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왜 그와 접점을 만들려고 하는가.

자꾸만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나약함이 가슴속에서 너울거렸다.

솔렘의 시험에서도 아카데미의 공개 시험에서도, 스카이라가 왔을 때 반가움으로 넘실거리던 마음. 거침없이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던,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던 행동들.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필요한 정도를 모두 달성했는데. 이제는 그만 놔 버려야 할 사람인데.

애리얼은 흔들리고 있었다.

자꾸만 선명하게 감정을 드러내며 손을 뻗는 그를 다시 본다면 자신은 또…….

‘안 돼.’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듯 애리얼은 양손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꽉 감았다. 그 상태로 심호흡을 반복하자 흔들리던 속이 점차 가라앉았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손가락 사이로 브레이슬릿에서 해방된 손목이 보였다.

마력의 불균형으로 그녀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게 했던 원인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내 목적은 기억을 찾고, 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야.’

지향점을 되새기며 애리얼은 표정을 굳혔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 누구에게라도.

‘내년 생일까지 앞으로 8개월.’

불안감을 억누른 애리얼은 조금 비장하기까지 한 걸음으로 욕실을 나왔다. 마침 침대에 앉아 있던 블랑셰가 애리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까 얘는…… 어쩌지?’

아직 정체를 확신할 수 없는 존재. 만약 무하 공자가 맞는다면 히든 캐릭터일 그녀 혹은 그의 잿빛 눈동자가 똑바로 애리얼을 향하고 있다.

‘마법으로 여장을 한 건가?’

만일 그렇다면 앞으로 블랑셰와 한방을 공유하는 게 무척 껄끄러울 것이다. 뭔가 조치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애리얼은 태연한 척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침대에 앉았다. 대화로 블랑셰를 조금 떠볼 요량이었다.

‘혹시 무하 공자 서하와 친해?’ 같은 질문으로 애리얼이 막 입을 열려는데,

“그런데, 그렇게 달았어요? 뱉을 만큼?”

예상치 못하게 블랑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애리얼은 잠시 멈칫했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응. 혀를 고문당하는 것 같았어.”

“그 정도였어요? 다른 애들은 맛있다고 잘 먹길래, 선배님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넌 괜찮았어?”

“저요? 전 이거 안 먹어요. 나무토막을 먹는 거 같아서.”

애리얼이 순간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블랑셰가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웃었다.

“마저증.”

“아……. 미안. 내가 생각 없이 물었네.”

“괜찮아요. 저도 생각 없이 초콜릿을 드렸는걸요.”

블랑셰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시간표 내러 가신다고 했었죠?”

“응.”

“뭐 들어요?”

“나는 그냥…… 아무거나…….”

“아무거나 듣는다고요?”

애리얼의 발언에 블랑셰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발언이다. 마법 교육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황립 아카데미까지 와서 아무거나 듣는다니. 좋은 수업을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아등바등 시간표를 채워도 모자랄 판에. 괜스레 멋쩍어진 애리얼은 어색하게 웃다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넌 뭐 들어?”

“저요? 저는 뭐…… 마력학, 마력의 해석, 술식학, 공격술식, 방어술식, 결계술식, 마법의 해석, 마공학, 치료술식……. 한 아홉 개 정도 듣네요.”

“그걸 다 들어?”

“못 들을 것도 없죠.”

블랑셰는 그게 뭐 별거냐는 듯한 투였다. 자랑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다 이 정도는 하지 않냐는 듯, 무심했다. 심지어 어렵기로 유명한 수업들만 언급하고서도 말이다.

“매번 이렇게 들어?”

“편입 첫해에는 여섯 개 정도만 들었는데, 듣다 보니까 더 늘려도 될 것 같더라고요.”

“안 힘들어?”

“아뇨? 어차피 수업에 다 나가는 것도 아니라서.”

“다 안 나가는 거면…… 너도 시험으로 결석을 메꾸는 쪽이야?”

“그런 편이죠.”

“대, 대단하네.”

“선배님도 이 정도 들으실 거면서, 뭘요.”

“아니……. 난 그렇진 않아.”

“그래요? 흠……. 하긴 사람마다 다르겠네요.”

블랑셰는 그렇게 일축했으나, 사실 평범하게 개인차로 일축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한 학기에 평균 네 개 정도의 수업을 듣는다. 심화 과정은 두 개 이상 넣지 않는다. 그런데 블랑셰는 한 학기에 심화 과정으로만 아홉 개의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마저증이라곤 하지만 괜히 특례로 편입한 게 아니라는 듯 월등한 수업량이었다.

심지어 이번이 세 번째 학기. 이전 학기에서 그 정도 수업을 소화하고도 낙제를 받지 않았다는 소리다. 더군다나 굳이 수업에 나가지 않고 시험 점수로 때운다는 말까지 했으니.

이렇게 수업을 소화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대개 두 부류였다. 마법과 마력에 특출난 천재이거나, 어릴 때부터 온갖 마법 서적을 접하며 교육받아 온 고위 계급이거나.

하지만 마저증을 앓고 있는 이상 전자는 불가능했다. 마력을 다룰 기회가 많지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마법 서적 중에는 국가적으로 통제하는 금서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독학으로 이 정도 수준에 통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남은 건 후자. 어릴 적부터 조기 교육을 받아 온 고위 계급일 경우.

이렇게 되면 블랑셰의 계급이 특정된다. 이 정도의 조기 교육이 가능한 가문은 황실과 대공가, 그리고 3대 공작가뿐이니…….

애리얼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블랑셰 멜로르와 휘아킨 무하는 동일 인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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