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추론 결과에 곧장 마음이 심란해져 왔다. 애리얼은 심각해진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월의 맑은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풍경이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풍경을 감상하는 애리얼의 마음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앞으로 계속 한방에서 지내야 하는데, 룸메이트가 여장 중인 남자라니. 큰 문제였다.
무턱대고 방을 바꿔 달랄 수도 없었다. 모두가 여자로 알고 있을 룸메이트가 사실은 남자인데, 방 좀 바꿔 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애리얼의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사이 블랑셰…… 아니, 휘아킨은 다짜고짜 침대에 드러누웠다.
풀썩 넘어가는 기척에 애리얼이 고개를 돌렸다. 이불도 덮지 않고 늘어지게 누운 휘아킨이 눈을 감고서 말했다.
“어제 잠을 못 자서, 좀 잘게요.”
“어…… 그래. 난 신경 쓰지 말고 자.”
“네,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애리얼은 뻘쭘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자는 얼굴을 보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 차라리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참에 제3 기숙사 동의 구조나 익혀 두자 싶었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켜고 위치 추적 기능에 딸린 조감도를 띄웠다. 기숙사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금 빠져나온 방에 자리한 휘아킨 무하의 초상화도 선명하게 보였다. 블랑셰와 휘아킨이 동일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애리얼의 룸메이트는 남자였다.
‘쟤는 나랑 한방을 쓰는 거, 괜찮은가?’
애리얼은 휘아킨의 반응을 회상했다. 그는 애리얼을 딱히 편해하는 건 아니었으나 크게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그냥 초면인 룸메이트를 대하는 태도였다.
무슨 이유로 여장을 하고서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피치 못할 사정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저 상태로 1년이 지나고 이제 2년째이니 큰 문제는 없을 터.
“괜찮겠지…….”
그도 여장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대로 모른 척 그냥 지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심 신경이 쓰였던 애리얼은 기숙사를 나왔다. 출입문을 통과해 멀리 걸어 나와서는 휴대폰을 켰다. 인적이 드문 기숙사 뒤쪽의 작은 후원.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사이 그늘 길이었다. 주변을 확인하고는 휘아킨의 프로필 창을 띄웠다.
『휘아킨 무하
*직위: 공자(제국의 개국 공신 중 하나인 무하 공작의 외동아들)
*나이: 17세
*거짓말에 주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3 기숙사 동 - 4층』
뭐 했다고 벌써 하트가 한 개 차 있다.
애리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휘아킨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 것인가.
‘히든 캐릭터라 굳이 공략할 필요는 없긴 한데.’
적당히 대화만 나누는 정도의 사이만 유지하면 불편할 것은 없었다. 크게 잘해 줄 필요도, 그렇다고 밀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것저것 재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건, 오버히트가 히든 캐릭터에도 적용되는 사안인가 하는 점이다.
애리얼은 조금 고심하는 표정으로 휘아킨의 프로필 창을 두드렸다.
『※‘휘아킨 무하’에 대한 개별 접근 알림을 설정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그녀의 손가락이 ‘네’ 부분을 맴돌다 비스듬히 옮겨 가 ‘아니요’를 눌렀다.
‘이건 굳이 필요 없겠지. 룸메이트라 계속 마주칠 텐데, 설정해 봐야 귀찮기나 할 테고.’
다른 대상을 경계하기도 바쁘다.
이제 겨우 하트 하나가 찬 상대다. 오버히트를 걱정하는 건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이었다.
‘적당히 사이좋게 지내면 문제없을 거야.’
적당히 결론지은 애리얼은 기숙사나 더 돌아볼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업이 한창일 시간. 학생의 대부분은 교사 동에 있었기에, 기숙사는 조용한 상태였다.
애리얼은 이 틈을 타 기숙사의 곳곳을 돌아보았다. 궁금했던 중정을 둘러보고, 휴게실과 식당도 확인했다. 도서관과 열람실 등의 편의 시설까지 찬찬히 살펴본 다음 4층으로 올라왔다.
기숙사가 생각보다 넓었던 탓에 시간이 꽤 걸렸다. 한 시간 남짓한 탐방을 끝내고 방의 문고리를 쥐었을 땐, 이미 정오가 넘은 시각이었다. 식당을 이용하려는 학생들이 몰려 아래층이 시끌벅적했다.
애리얼은 무리에 휩쓸리기 전에 올라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다 뒤늦게 휘아킨이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급히 발소리를 죽였다.
‘아직 자고 있으려나?’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방은 비어 있었다. 누운 흔적만 남은 침대 시트와 정적만이 그녀를 반겼다.
‘점심 먹으러 갔나?’
정오니 그럴 수도 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애리얼은 별생각 없이 침대에 누웠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학생들로 복작거리는 식당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특별 감시 대상으로 지정되어 이런저런 시선이 몰릴 것이다. 사람이 많은 장소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애리얼은 가만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힘이 빠진 사지가 흐물흐물 시트 위로 늘어졌다. 오전부터 짐을 옮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생각보다 체력을 썼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닿은 몸이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졸음이 몰려와 눈꺼풀을 덮었다.
잠이 드는 건 아주 순식간이었다.
적당히 따뜻한 온도. 아래층의 소리가 미치지 않는 조용한 방 안.
애리얼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얼마나 깊고 길게 잤는지 일어났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자 여전히 비어 있는 옆 침대가 보였다. 노을이 진 하얀 침대 시트는 아까 구겨진 모양 그대로였다.
‘낮잠 자다가 나가더니, 아직도 안 왔네.’
그럼 수업을 듣는 중이거나 도서관에라도 간 거겠지. 애리얼은 이번에도 크게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일어났다.
점심을 거른 탓에 허기진 배가 복통에 가까운 배고픔을 호소했다.
애리얼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고 적당히 매무새를 정리한 뒤 방을 나섰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돌아온 기숙사는 여러 소음으로 활기찼다.
애리얼은 삼삼오오 무리 지은 학생들 사이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겨 식당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시선이 따라붙었으나 말을 걸어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1 기숙사 동에 있던 시녀, 기사들과 같은 반응이었다.
특별 감시 대상. 그러면서 동시에 황태자의 총애를 받고, 솔렘 가문의 비호를 받는 이. 건립 기념제에서 대공자의 파트너였던 사람.
제3 기숙사 동의 학생들은 애리얼에게 강한 호기심을 비치면서도 철저하게 몸을 사렸다.
그 덕에 애리얼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식당에 도달해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관상동물인 양 온갖 시선을 받아 불편하긴 했으나, 배가 고픈 게 우선이었다. 뷔페식으로 준비된 음식을 적당히 덜어서 혼자 식사를 하고는 다시 4층으로 올라갔다.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하나…….’
쏟아지던 시선들을 떠올리자 애리얼은 길게 한숨이 나왔다. 지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섰다.
휘아킨은 여전히 부재중이었다. 이 시각이면 어지간한 수업은 다 끝났을 텐데, 도대체 어딜 간 건지.
애리얼은 그가 없는 틈을 타 욕실을 쓰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구겨진 침대 시트도 정리해 주었다. 혹시 몰라 식당에서 챙겨 온 간식도 그의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점심은 제때 먹었을까?’
애리얼은 의자에 앉아 그가 누웠던 침대를 바라보았다.
카논마저 백작저로 돌아갔으니, 대화할 이가 아무도 없었다. 방 안에는 정적이 무겁게 깔렸다.
그녀는 오롯하게 홀로 된 기분을 느끼며 유일한 대화 상대인 룸메이트를 떠올렸다. 돌아왔으면 싶다가도 안 왔으면 싶어졌다. 외관은 동성이지만 실제론 이성이라는 사실이 조금 거북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애리얼은 침대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뜬눈으로 천장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감았다.
휘아킨은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오전 여덟 시.
애리얼은 여전히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빈 침대를 보고 섰다.
대체 어디를 갔길래 이렇게 밤새 기숙사를 비울 수 있는지 궁금했다. 혼자 써서 좋았다는 혼잣말을 흘렸던 거로 보아, 어디 다른 숙소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고심 끝에 애리얼은 휴대폰을 꺼내 그의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휘아킨 무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3 기숙사 동 - 4층』
놀랍게도 휘아킨은 근처까지 와 있었다. 그의 초상화가 방 앞에 섰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방문을 응시했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벌어지는 문 틈새로,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블랑셰의 모습을 한 휘아킨이 보였다. 은회색 머리칼이 물기로 온통 축축해 보였다.
애리얼은 경악한 얼굴을 했다.
휘아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상태로 방 안에 들어왔다. 마치 호수에 몸을 던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제 정오부터 없었던 애가 하루를 꼬박 비우고 다음 날에야 나타났는데, 이런 꼴이라니.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님.”
굳어 있는 애리얼을 향해 휘아킨은 능청스러운 인사를 던졌다.
인사고 자시고 애리얼은 그의 상태 외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러고 돌아왔단 말인가.
“무슨 일이야?”
애리얼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기나 했다.
“별일 아니에요.”
“별일인 거 같은데……. 어디 빠지기라도 했어?”
“그냥 좀…… 더워서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휘아킨은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칼을 정리하며 얼굴을 닦았다. 소매도 온통 축축해서 물기가 번지기만 했다.
애리얼은 욕실에서 마른 수건을 가져와 그에게 건넸다. 그는 수건을 받아 들더니 적당히 얼굴과 목을 닦고는 애리얼을 보았다.
“누굴 좀 만나고 왔어요.”
“……밤새?”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