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새도록 대체 누굴 만났다는 소린가. 심지어 전신이 물에 젖은 채 돌아온 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애써 질문을 삼키고서 물러났다.
“어쨌든,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 그러다 감기 걸려.”
“더 안 물어봐요?”
“말하기 싫어하는 거 같아서.”
그 말을 꺼내자 휘아킨은 묘한 눈빛으로 애리얼을 바라보았다. 상대의 속을 가늠하는 듯한 눈초리가 조금 매서웠다.
역으로 의심을 받는 느낌에 애리얼은 의아해하며 눈을 맞추었다. 그제야 그는 날카로운 눈길을 거두고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씻고 올게요. 배려 감사해요, 선배님.”
휘아킨이 수건을 쥐고서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윽고 세찬 물소리가 방 안으로 퍼졌다.
적나라한 샤워 소리에 휘아킨의 본래 성별을 아는 애리얼만 괜스레 어색해졌다.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나을까. 애리얼은 적당히 짐을 챙긴 뒤 방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고 출입문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그녀의 걸음은 정처 없이 배회했다.
시간표를 제출하긴 했으나 반영은 다음 주부터 됐다. 듣고 싶다면 당장 오늘부터 들어가도 되긴 하지만, 그게 출석일로 인정되진 않았다. 애리얼은 그렇게까지 수업을 들을 열의는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엉망으로 짠 시간표다. 독학으로 어떻게 시험만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꼼수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제외한 학생들은 수업을 듣기 위해 교사 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운행하는 소형 열차를 줄지어 타는 모습이 보였다.
애리얼은 멀뚱히 서서 그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관찰했다. 친구와 어울려 떠나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그립게 느껴졌다. 예전에 분명 자신도 저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친구끼리 어울려 이동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그녀는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남부의 높다란 산등성이는 사시사철이 겨울이나 다름없었다. 쌓인 눈을 치우고 지은 임시 막사는 얼어 죽기 십상인 온도였다. 황태자께서 친히 보내 주셨다는 온열 램프 덕에 안 죽고 버티고는 있지만.
렉시우스는 몸을 잔뜩 젖히고서 간이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끝이 램프를 툭툭 건드렸다. 신경질이 난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당초 예상보다 전쟁이 길어졌다. 자꾸만 하루 이틀씩 미뤄지는 보급이 발목을 잡았다. 분명 데본시아의 짓이다. 길어도 석 달이면 끝났어야 할 전쟁이 벌써 넉 달째 끌리게 된 것은.
렉시우스는 신경질을 이기지 못하고 램프를 툭 밀어 넘겼다.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넘어간 램프의 주홍색 빛이 죽었다. 고작 램프 하나 엎었다고 막사는 빠르게 식어 갔다.
“황태자 새끼가 우릴 죽이려나 보다.”
“저하, 그런 말씀은 위험합니다.”
“뭐 어때, 그 새끼 면전에서도 했는데.”
렉시우스의 말에 전쟁터까지 동행한 보좌관, 카스트로 메튼은 사색이 되었다. 기사 출신이라 어지간한 일에는 면역인 그도 제 상관의 불경에는 소스라쳤다. 곧 제국의 황제가 될 이에게 저런 언행이라니. 죽어도 주군과 함께하겠다고 맹세하긴 했으나 그게 불경죄까지 눈감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새끼가 보급만 제때제때 했어도 지금쯤 산에서 내려가고도 남았어. 중간에 배라도 엎어진 게 아니면 이틀 전에 왔어야 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렉시우스는 계속 황태자를 ‘그 새끼’라고 칭했다. 어릴 때부터 친분이 깊어 스스럼없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메튼은 불안해하는 얼굴로 눈동자만 굴렸다.
“하여튼 쓰레기 같은 놈이야. 르젠 복속이 빨랐던 게 다 누구 덕인데. 병합에 속도를 내지는 못할망정, 최전선에서 계속 굴려 대고. 보급일 계산도 거지같이 해서.”
한바탕 데본시아를 욕하고 난 렉시우스가 의자에 늘어진 채 고개를 젖혔다. 금빛 눈은 누군가를 그리듯 멍했다. 사념에 골몰하여 입을 다문 그의 모습에 메튼은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물러났다.
갑작스럽게 침묵이 내려앉은 막사 안은 온열 램프마저 꺼져 춥고 고요했다.
무거운 침묵은 십여 분을 이어졌다.
메튼이 렉시우스의 심기를 감히 헤아리지 못해 마음을 졸이던 때였다.
“전쟁터에서 가족이 아닌 사람이 미친 듯이 그리우면, 그건 어떤 경우지?”
돌연히 입을 연 렉시우스는 의외의 것을 물었다. 여태껏 이런 종류의 감성적인 질문은 일체 한 적이 없는 상관이었다. 메튼은 조금 어리둥절해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보통 마음을 준 이가 그립습니다. 연인이나 은사 같은,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중요하다……. 가족보다 더 자주 떠오르면 가족보다 중요한 건가?”
“예? 아니…… 꼭 그런 것은…….”
“솔직히 가족은 별로 생각도 안 했고, 걔만 생각나는데.”
“…….”
“내가 진짜 더럽게 많이 좋아하나 보네.”
렉시우스는 웃음기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한탄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사실을 설명하는 듯. 일면으론 무심해 보일 정도였다.
전쟁터에서 이루어진 무미건조한 감정 자각의 순간이었다.
렉시우스는 제 앞에 놓인 책상을 발로 엎으며 일어났다. 제 감정의 깊이를 깨달아 타오르는 두 눈은 결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침대에 기대어 둔 검을 들고서 막사를 나갔다.
메튼이 긴장한 얼굴로 제 상관의 뒤를 따랐다.
***
우우우웅-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애리얼은 급히 열람실을 빠져나왔다. 햇살이 비치는 복도로 나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없는 복도 끝 계단에 와서야 휴대폰을 켤 수 있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강한 애정을 느낍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데 더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현재 위치: -(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어…….”
연초의 폭발적인 호감도 증가 후 오랜만에 보는 호감도 상승 알림이었다.
애리얼은 난감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버히트는 여섯 개부터다. 적어도 다섯 개 반까지는 위험한 호감도는 아닐 것이다.
‘아직은…… 괜찮아. 다섯 개까지는 괜찮아.’
눈을 가린 채 한숨을 쉬었다. 안도하기 위해 억지로 쉬는 한숨이었다.
이미 데본시아가 다섯 개다. 렉시우스가 네 개 반이 된다고 해서 특별히 더 겁에 질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놀란 속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이제 기숙사도 옮겨진 참이다. 렉시우스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거다.
겨우 차분해진 애리얼은 열람실로 돌아가 읽다 만 책장을 다시 넘겼다. 월요일에 있을 ‘고대 역사와 마법의 이해’ 수업과 관련된 중남부 대륙의 고대 역사책이었다. 방대한 양과 지루한 구성으로 왜 학생들이 기피하는지 알 만한 내용이었다.
애리얼은 가지고 온 책의 십분의 일도 읽지 못하고 집중력이 흐려졌다.
머릿속에는 자꾸만 렉시우스의 하트가 떠올랐다. 네 개 반. 데본시아와 반 개 차이.
그 신경 쓰이는 사실을 잠시라도 잊어 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선배가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걱정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전장에 나가 있는 그가 걱정되는 것과 별개로, 그와의 만남이 두려웠다.
글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렉시우스와 데본시아의 하트 개수가 눈에 어른거렸다. 그 잔상이 읽기를 방해했다. 글자만 읽히고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애리얼은 결국 책을 덮어 버렸다. 효율이 나지 않는데 더 이어 가도 소용이 없었다. 반납 책장에 책을 올려 두고 열람실을 나왔다.
한창 수업이 진행되는 오전 시간임에도 도서관에는 사람이 꽤 있었다. 시험 기간이 되면 사람이 꽉 차서 앉을 자리가 없다고 했다. 늘 사람 한 명 없는 제1 기숙사 동의 도서관과 비교되는 부분이었다.
애리얼은 은연중에 흘금거리며 닿아 오는 타인의 시선을 못 본 체하며 밖으로 나갔다.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후원의 가장자리에는 언제나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 가만히 서면 애리얼은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시선도 소음도 옅은 장소.
제3 기숙사 동에 온 지 나흘째였다.
애리얼은 바뀐 환경에 적응할 듯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뀐 시설에는 금세 적응했다. 문제는 함께 생활하는 학생들의 시선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반응이, 애리얼은 무척 불편했다.
‘차라리 유령 취급을 받으면 편한데.’
도서관에서도 저를 향해 쏠리던 시선을 상기하자 속이 불편했다.
애리얼은 우울해지는 기분을 떨치기 위해 눈을 감고 느리게 호흡했다. 그러자 순간 무언가 손안으로 흘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물길 속에 손을 넣은 듯한 기분. 마력을 지닌 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감각. 마력의 흐름이다. 손가락 사이로 잡힐 듯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번쩍 눈을 뜨고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브레이슬릿에서 해방된 왼쪽 손목이 보였다.
더는 걸리는 것이 없었다.
온전히 손안에 담기는 물과 같은 부피감의 투명한 마력. 그대로 밀려드는 마력을 받아들였다.
방출하는 것밖에 안 됐던 마력이 몸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비로소 손을 타고 흘러들어 충만해졌다.
애리얼은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동공이 확장되고 사지가 떨렸다. 처음으로 마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불균형하게 분리되었던 마력과 맞닿아 마법사로서의 정신이 환희에 찼다.
“드디어 나도……!”
애리얼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탄을 터트렸다.
이제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감격하여 고조된 마음으로 체내에 침투한 마력을 감싸 안듯이 반겼다. 더 큰 마력을 안고 싶었다. 흡수하고 나아가서 그동안 브레이슬릿으로 인해 제한받았던 모든 것들을 이루고…….
“아, 으윽!”
갑자기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애리얼은 허리를 숙이며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지금까지 어루만지듯 몸을 감싸던 마력이 폐부를 조이고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질식할 듯한 고통이 온몸을 잠식했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다.
특정 음식에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알레르기처럼 몸이 마력을 거부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어째서?’
의문을 느낄 정신마저 고통에 착란을 일으켰다.
애리얼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흐윽! ……헉!”
억지로 호흡을 내뱉어도 꽉 막혀 꺽꺽대는 소리가 나갔다.
누가 와 주지 않는다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애리얼은 잔디를 뜯으며 엉금엉금 기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해 힘이 빠졌다. 머리가 흐릿해졌다.
‘누가 나 좀…… 살려…….’
우우우웅-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가운데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렸다.
누군가가 애리얼의 어깨를 붙잡고 척추를 따라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능숙한 치료술이었다. 조금씩 호흡이 돌아왔다. 애리얼은 색색거리며 숨을 뱉어 냈다.
서서히 아픔이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급격히 찾아왔던 고통으로 공포에 질린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등 뒤의 인물이 고개를 숙여 가만히 속삭였다.
“조심해야지.”
치가 떨리도록 익숙한 음성이다.
데본시아.
“이제 안 아프게 해 줄게.”
그가 다정히 소곤거리며 그녀의 눈앞에다 새로운 브레이슬릿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