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찼던 것과 같은 검은색의 고리.
애리얼은 잔디밭을 박차듯이 짚고 일어났다. 등을 쓸어 주던 손이 단박에 떨어져 나갔다. 몸을 휙 돌리자 생긋 웃고 있는 데본시아가 보였다. 방금까지 업무를 보다가 뛰쳐나온 듯한 백색의 정복 차림으로, 늘 그렇듯 우아한 외관을 한껏 과시하면서.
또다시 그녀에게 족쇄와 같은 것을 강요하려 한다.
애리얼은 살갑게 휘어진 그의 눈을 보면서 잔디밭에 놓인 브레이슬릿을 지그시 눌러 밟았다.
그러자 예쁘게 미소 지은 데본시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네.”
“미안. 조금 더 예쁘게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외양까지 바꾸려면 시간이 걸려서.”
“…….”
“그래도 색 정도는 바꿀 수 있는데. 애리얼은 무슨 색이 좋아?”
“필요 없어요.”
애리얼은 눌러 밟았던 브레이슬릿을 발끝으로 톡 쳐서 데본시아의 쪽으로 날려 보냈다. 검은색의 고리가 그의 발치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데본시아는 제 발치로 굴러온 것을 허리 숙여 주워 들었다.
“그렇게 싫어?”
그가 검지에다 브레이슬릿을 걸어 두고서 물었다. 여전히 미소는 유지한 채였다. 그의 심기가 약간 불편해진 게 보였으나 애리얼은 물러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 브레이슬릿 때문에 마력의 불균형으로 죽을 지경까지 갔다.
“네. 싫어요.”
“안 차면 아까 같은 상황이 계속 벌어질 텐데?”
“저걸 차서 아까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거겠죠.”
“왜 그렇게 생각해?”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저 브레이슬릿을 차고 난 뒤 ‘대마법사 엔딩’이라는 게 사라졌다는 걸 기억한다.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었을 운명인데, 고작 마력 흡수에 이런 과민 반응을 겪을 리가 있나. 브레이슬릿으로 유발된 불균형이 기어코 몸에 부작용을 남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는 자꾸만 브레이슬릿이 훌륭한 보호구인 양 호도했다.
심지어는 공개 시험에서 수를 써서 구설에 휩싸이도록 만든 주제에.
그의 프로필 창을 채운 다섯 개의 하트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분노가 이는 것을 느끼다가 억지로 표정을 가라앉혔다.
“공개 시험에서, 절 죽이려고 하신 건가요?”
침착한 태도로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데본시아가 미소를 거두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였어?”
“폭발이 나도록 유도하셨잖아요. 전하께서 그날 시험에 쓰일 총에 술식을 거셨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애리얼……. 그건 그냥 공격술이 발동되지 않도록 하는 술식이었어. 널 해하는, 그런 게 아니야.”
데본시아가 피로한 듯 이마를 짚었다.
이쯤이면 애리얼도 황태자인 데본시아의 지위를 고려해 머리를 숙여야 했다. 특혜도 사라진 처지였다. 그녀와 데본시아의 사이에는 까마득한 계급 차가 있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고개를 숙이고 순종할 생각이 없었다. 그랬다간 브레이슬릿을 다시 차야 할 마당이었다. 물러나기 싫었다.
“그 술식만 아니었다면 적정량의 마력으로 과녁을 쏠 수 있었어요. 애당초 브레이슬릿이 아니었다면 굳이 공격술을 고수할 필요도 없었고요.”
“…….”
“제 마력의 불균형은 황태자 전하로부터 비롯된 거잖아요.”
“알고 있었어?”
그렇게 묻는 데본시아는 별로 놀란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조금 의외라는 투에 불과했다.
애리얼은 묘한 불안이 들었다. 왜 저렇게 침착할까. 슬그머니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거.”
데본시아가 떠나려는 애리얼에게 바짝 다가서며 브레이슬릿을 내밀었다.
“껴야지, 애리얼.”
“저는 싫다고…….”
“그래야 안 흔들리고, 목표한 것만 바라볼 수 있지. 응?”
데본시아는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목표라니, 뭘 말하는 건가.
“……지금 대체 뭐라고…….”
“너도 다 안다고 했잖아? 이걸 껴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데. 정말 싫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인가.
“혹시 정신 제어…….”
애리얼은 홀연히 내뱉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데본시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기억난 거 있어?”
“…….”
“내 목소리라든가.”
그가 ‘목소리’라고 떠보듯 힌트를 던지자, 애리얼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 하나가 선명히 떠올랐다.
“그게 그렇게 소중해?”
그의 집무실에 갔을 때, 불현듯 머릿속을 잠식하던 그 음성.
데본시아의 목소리.
애리얼이 소중히 여기던 무언가를 하찮게 바라보며 차가운 낯으로 서늘한 미소를 피워 물던 그.
목소리에 이어 장면이 순식간에 머리를 채웠다. 한 번 경험했던 과거처럼 애리얼에게 스며들었다.
브레이슬릿으로 제어당하던 것이었다. 어쩌면 악몽이나 다름없었을지 모르는 끔찍한 기억의 조각.
가장 섬뜩한 것은, 이게 애리얼이 찾고자 하는 기억의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방금 떠올린 것은 원세계의 기억이 아닌 이곳에 빙의하고서의 기억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찾고자 했던 기억, 그 이상을 잊어버린 채 이곳에 있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진실의 파편을 맛보게 되자 심장이 공포로 가파르게 수축했다. 두근두근. 두려움으로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이토록 그녀를 두렵게 만드는 기억의 중심에는 데본시아가 자리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당신은 대체 뭐야……?”
공포에 질린 그녀의 발언에 데본시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이라니, 애리얼…….”
그는 어느새 조금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왜 저러는 걸까. 대체 왜. 씁쓸함이 가득 차오른 얼굴로 저리도 애달프게 부르는가.
그런데도 왜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을까. 동정심이 생길 구석마저 두려움이 차지한다. 그는 도대체 자신과 무슨 관계였던 걸까.
애리얼은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을 표정과 눈빛으로 내비쳤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데본시아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한발 물러났다.
“끼기 싫다니까, 굳이 강요하진 않을게.”
그는 애리얼에게 내밀었던 브레이슬릿을 겉옷의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금세 평소와 같은 분위기로 산뜻하게 웃었다.
“자주 못 와서 미안해. 바쁜 일만 끝나면 자주 올게.”
원하지도 않는 재회를 약속하며 데본시아는 순간 이동으로 모습을 감췄다.
애리얼은 데본시아가 사라지자마자 기숙사를 향해 뛰어갔다. 황급히 4층으로 올라가 기숙사 방의 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 벽면에 느긋하게 기대어 있던 휘아킨이 그녀를 보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결 좋은 은발이 찰랑거리며 그의 어깨에서 스르르 미끄러졌다. 당연하게도 그는 블랑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고서 나흘간 거의 본 적이 없던 그녀의 룸메이트였다.
그런데 하필 이 순간에 마주할 줄이야.
애리얼은 공포에 질렸던 기색을 얼른 감추며 멋쩍게 웃었다.
“아, 안녕?”
“누가 괴롭혔어요?”
휘아킨이 꽤 날카로운 질문을 대뜸 던졌다.
애리얼은 그의 질문에 뜨끔 놀라고서도 태연한 척하느라 용을 썼다. 혹시 인사하다가 티가 났나 싶어서 침착하게 목소리도 가다듬었다.
“아니…….”
“근데 왜 이렇게 겁먹었어요?”
“그렇게 보여?”
“네. 도망치다 온 것 같은 얼굴이에요.”
휘아킨은 갸웃하며 기울인 고개를 침대 헤드에 기대고서 늘어진 자세를 취했다. 시큰둥하니 맹한 눈빛인데 판단하는 게 꽤 날카로웠다.
숨기긴 어려울 듯하니 차라리 솔직하게 나갈까.
애리얼은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괴롭힘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한테 묻는 거예요?”
“응.”
“흠…….”
휘아킨은 애리얼을 물끄러미 보다가 기울어진 몸을 바르게 세워 앉았다.
“그건 선배님이 어떻게 한다고 명확한 답이 나오지는 않을 거예요. 보통은 괴롭히는 쪽이 비뚤어진 거라.”
“응…….”
“거기다 계급까지 높으면 답이 없어요.”
“그렇구나.”
애리얼은 잠자코 듣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답이 없다는 소리를 상당히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휘아킨은 약간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그나마 무시하는 게 최선이에요.”
“그래?”
“저는 그래요. 그러면 오래 끌릴 게 빨리 끝나거든요.”
그의 답변에 애리얼은 확연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가 너 괴롭혀?”
“아시는 줄 알았는데.”
그가 태연히 인정했다.
애리얼은 아연한 반응을 보이다가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곤 낯빛을 흐렸다.
“그럼 그때 물에 젖어서 온 건…….”
“아, 그거요. 한 다섯 명인가가 몰려와서 마력의 흐름을 느끼게 해 준다고 호수에 밀어 넣었거든요.”
휘아킨은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듯 무심했다. 몹시 차분한 표정은 어딘지 무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괴롭힘에 익숙해졌기에 나오는 반응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애리얼은 몹시 화가 났다. 마력의 흐름이라는 소리를 해 대며 그를 호수에 빠트린 걸 보아, 괴롭힘의 이유는 마저증 때문인 게 확실했다. 타인의 아픔을 약점으로 잡아 괴롭히는 저열함이다.
“여태 방에 못 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야?”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맞아요.”
“누가 못 오게 막은 거야?”
“그건 왜 물어요? 도와주시게요?”
“당연하지.”
애리얼의 대답에 휘아킨은 아주 놀란 것 같았다. 커다래진 눈에서 그가 느끼는 충격이 읽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돌연 아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애리얼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주제넘은 발언이었나…….’
어색하게 쭈뼛거리고 있으니 휘아킨이 대뜸 물었다.
“진심이에요?”
“……응.”
“이상한 사람이네요, 선배님.”
“주제넘은 소리였다면 미안해.”
“아니, 그건 아니고요. 왜 날 도와주겠다는 건지 좀 신기해서요.”
휘아킨은 비웃거나 비꼬는 투는 아니었다. 애리얼을 보는 잿빛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선배님, 저 알아요?”
“룸메이트니까 알기는 아는데.”
그러자 그가 또 아하하, 웃었다.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유쾌하게 보여서, 애리얼은 왜 웃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휘아킨은 한바탕 웃고 나서 가라앉은 얼굴로 차분히 물었다.
“만난 지 고작 나흘 된 룸메이트잖아요. 그 나흘간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인데, 절 도와주고 싶다고요?”
“하지만 네가 당한 일이 너무 화가 나는걸.”
애리얼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의 입꼬리가 또 웃음을 터트릴 것처럼 씰룩거렸다. 기어코 피식 웃음을 흘린다.
“선배님, 정말 마음은 감사한데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