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로 이야기는 끝이었다.
본인이 됐다는데, 애리얼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음 날, 휘아킨은 또 물에 젖어서 방으로 왔다. 애리얼은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더 하지 못했다.
그는 고맙다는 말만 짤막하게 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후에 다시 방을 나갔다. 그러고서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애리얼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지금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드문드문 얕은 잠만 자다가 아침을 맞았다. 오전 열 시경이 되어서야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다행히 물에 젖거나 하지 않고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만 지쳤는지,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왔을까?’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이 쓰였다. 대화할 사람이 휘아킨밖에 없어서 더 그렇기도 했다. 또래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때문에 경계심도 쉽게 허물어졌다. 그가 호감도를 신경 쓸 필요 없는 히든 캐릭터라는 점도 컸다. 친해져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종종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했다.
휘아킨은 언제나 빈손으로 방을 나갔다가 빈손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도 그의 것이라 부를 만한 물건이 없었다. 여벌용 옷이 몇 벌 구비되어 있을 뿐. 그것도 교복이 다였다. 기숙사에서는 낮잠만 자고 가는 게 다인지. 기숙사 시설을 이용하는 것도 아닌 듯한데, 식사는 어디서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수업에도 거의 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행적은 대부분이 미스터리였다.
그래도 굶고 다니거나 부족한 것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무하 가문의 독자니까 무하가에서 뒤를 봐주고 있는 건가?’
궁금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가 말해 주지 않는 이상은 알 방법이 없었다.
애리얼은 잠시 그를 보다가 방 밖으로 나갔다. 기숙사에 와서 하는 거라곤 낮잠 자는 게 다인 애였다. 이 시간만큼은 방해가 되지 않게 피해 주고 싶었다.
기숙사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금요일이라 시간표를 비운 학생들이 다수인 탓이었다. 그만큼 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다. 애리얼은 피로함을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출입문을 나서서 빠르게 후원으로 향했다. 많이 걷지 않고 갈 수 있는, 유일하게 조용한 장소였다.
간지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그늘에서 애리얼은 휴대폰을 꺼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애리얼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브레이슬릿을 발로 차 버리고, 끼기 싫다며 면전에다 대고서 건방지게 직언했는데. 데본시아의 하트는 여전했다. 반 개 정도는 떨어지지 않을까 했더니.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 짜증 나. 힘들어.”
지이이잉-
그녀의 한탄을 듣기라도 한 듯 휴대폰이 진동했다. 한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애리얼은 울상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3 기숙사 동 - 후원』
“뭐야, 왜…….”
놀라 뱉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애리얼로부터 십여 미터는 떨어진 거리였다. 기다란 금발이 햇살 아래 반짝거렸다.
애리얼의 눈이 그를 향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휘날리는 금발이 눈길을 끌었다.
같은 순간, 레이신도 애리얼을 발견했다. 애리얼이 있는 나무 아래로 곧장 걸어왔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숨기고서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도망이라도 칠까 했으나, 제 체력으론 얼마 못 갈 것을 알았다.
어느새 둘은 같은 나무 아래에 있었다.
“이쪽으로 담을 넘으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는데, 진짜 만나니까 신기하네.”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레이신은 그다지 반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미소도 걸치지 않은 얼굴은 여느 때처럼 무뚝뚝했다.
애리얼도 그가 아주 반가운 건 아니어서 그냥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공자 서하를 뵙습니다.”
“그런 거 안 해도 돼.”
“그래도 해야죠.”
“왜? 그러고 인사하는 거 좋아?”
“그게 아니라, 제국의 법도…….”
애리얼은 유구한 제국의 계급과 예를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도 모르는 게 아닐 텐데 이걸 설명해서 뭐 하나 싶었다. 그는 법도고 뭐고 그냥 애리얼이 안 했으면 좋겠으니까 저러는 거였다.
레이신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애리얼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말을 하다 말았는데도, 왜 말을 멈추냐며 재촉하지 않았다. 그 행동이 그의 성격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원래 궁금해하던 게 아니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함.
‘지금까지 별말이 없는 걸 보니, 날 찾은 용건도 그저 보고 싶은 게 다인가? ……다겠지.’
애리얼은 자신이 대화를 이끌지 않으면 그가 이대로 침묵할 것을 알았다.
“저번에…… 앞으로는 장소를 골라서 나타나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골라서 나타난 거야.”
“우연히 지나다 발견한 거 아니셨어요?”
“응. 우연히 발견했는데, 마침 인적이 드문 장소여서 온 거야.”
레이신은 대강 끼워 맞춰서 말했다. 그런데 마침 상황이 다 들어맞아서, 반박이 막힌 애리얼만 할 말이 없어졌다. 장소를 고르긴 개뿔. 저 인간이라면 기숙사 휴게실 한중간에서 만났어도 그냥 왔을 텐데.
“그나저나 아까 담을 넘으셨다고 들었는데, 어디 있다가 오신 거예요?”
“밖에 잠시 갈 일이 있어서.”
“……아카데미 밖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맞는데. 아카데미 안이면 아카데미라고 말했지.”
“그럼 담이라는 건 아카데미 벽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거 말고 담이라고 부를 게 뭐가 있어.”
“……?”
애리얼은 잠시 이해가 안 가서 말을 멈췄다.
아카데미 벽은 10미터가 넘는다. 그걸 넘어왔다는 건…….
“설마 뛰어서 넘었어요?”
“안 뛰고 넘을 수도 있어?”
혹시 너는 안 뛰고 넘는 거냐고, 그런 식으로 되묻는 듯한 레이신의 눈빛에 애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달리는 차 위로 뛰어든 위인이었지.’
흔들리니까 그러지 좀 말라고 신경질을 내던 스카이라가 떠올랐다. 레이신은 그게 편하다며 뭐가 문제냐는 듯 대꾸했었다.
렉시우스도 그렇고 참 무시무시한 기초 체력이었다. 스카이라나 데본시아도 이렇겠지. 황족이니까 체면을 지키고 있을 뿐, 하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대단한 인간들만 공략 대상이구나 싶었다.
기어코 여기까지 공략한 게 용했다.
애리얼이 상념에 말을 멈추자, 대화는 자연히 끊겼다. 애리얼만 견디지 못하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애리얼은 새로운 대화 주제를 꺼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쯤 대화했으면 됐지.’
레이신이 따라오지만 않는다면 적당히 도서관에나 가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끈질긴 성격까지는 아니니, 먼저 작별을 고하고 걸어가면 괜찮지 않을까. 애리얼은 그런 생각으로 그를 향해 고개부터 숙였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무뚝뚝한 인사를 끝내고 곧장 몸을 돌려서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역시나 레이신은 애리얼을 붙잡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다.
레이신이 애리얼의 뒷모습에 대고서 입을 열었다.
“기숙사에 스카이라 와 있어.”
정신이 번쩍 드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듣고 애리얼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나무가 늘어선 쪽으로 향했다. 레이신이 있는 곳을 슬쩍 앞질러 갔다.
레이신은 자연스럽게 애리얼의 뒤를 따라 걸었다.
“스카이라를 피하는 거야?”
“아니……. 네, 맞아요.”
애리얼은 부정하려다가 그냥 긍정했다. 그의 말을 듣고서 걸음을 돌렸던 자신의 행동이 너무 적나라했기 때문이었다.
“스카이라, 싫어해?”
“아니요.”
“그런데 왜 피해?”
“황자 저하와는 마주하기가 조금 껄끄러워서요.”
애리얼은 조곤조곤 다 대답해 주면서도 절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신 역시 그녀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조절했다.
질문이 떨어지면 그만 따라올 줄 알았는데. 계속 따라오는 레이신 때문에 애리얼은 난감한 상태였다. 이래서야 휴대폰으로 스카이라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애리얼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서 그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얼굴의 레이신을 보고서 물었다.
“공자 서하,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신가요?”
“……있어.”
당연히 없다고 말할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예상 밖의 답변이 날아왔다.
애리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뭔가요?”
“렉스가 승전했어.”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내일 와.”
“……예?”
진심으로 기뻐하며 경쾌하게 말하던 애리얼은 그의 다음 말에 곧장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내일 오신다고요? 대공자 저하께서?”
“응. 내일 황성에서 승전식이 있어. 완전한 승전은 아니라서 제국민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승전식은 아니야. 고위 계급만 가는 건데, 렉스가 특별히 널 초대했어.”
렉스의 무사 귀환이 다행스러운 것과 별개로 눈앞이 깜깜해지는 소식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 소식을 왜 황성의 전갈로써 알리지 않고 레이신이 직접 전해 주고 있는가. 그것도 승전식이 있기 하루 전에.
“왜 서하께서 제게 이런 소식을 전해 주시는 건가요?”
“네가 스카이라를 안 만난다기에. 나라도 말해 줘야지.”
“황자 저하께서 그런 용건으로 오신 거였어요?”
“그건 나도 몰라. 난 스카이라가 아니니까. 어쨌건, 넌 황성 상황을 모르니까 알려 주는 거야.”
“……네. 근데…….”
애리얼이 말을 끌자, 레이신은 가만히 그녀에게 집중했다. 애리얼은 망설이는 눈치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못 들은 거로 해도 돼요?”
“……왜?”
“안 가고 싶어서…… 요. 못 듣고 빠진 거로 위장하고 싶어요.”
“뭐?”
레이신이 드물게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렉시우스의 승전식이다. 애리얼은 그를 나름대로 친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나. 아까도 그의 승전 소식에 목소리까지 높이며 기뻐하던데. 승전식에는 당연히 참가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다니.
“렉스가 싫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