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56)화 (156/264)

레이신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애리얼은 고개를 저어 그의 물음을 부정했다. 렉시우스를 싫어하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안부도 묻고 다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하트는 네 개 반. 렉시우스가 특별히 초대까지 했다는 승전식에 참가했다간, 그의 호감도가 상승할 확률이 높았다.

반대로 승전식을 넘겨 버리면 호감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빠지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매정한 결론을 내렸다.

애리얼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발치에 흔들리는 잔디를 바라보았다.

대화가 끊기고 잠시 침묵이 지났다.

레이신은 나무에 기대어 애리얼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서 심란한 눈빛을 애써 감춘 말간 얼굴이 시선을 잡아 끌었다.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소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녀의 흑발이 부드럽게 물결치며 흔들렸다. 바람을 이기지 못한 약한 잎사귀가 추락하다가 그녀의 머리칼 사이로 엉켜들었다. 여전히 생각에만 골몰한 애리얼은 나뭇잎이 끼어든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연분홍색 입술을 살짝 깨문 하얀 얼굴에 손을 뻗었다. 고운 흑발의 사이에 걸린 나뭇잎을 손끝으로 집어 빼냈다.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피부를 스쳤다.

그의 손길에 애리얼이 사념에서 깨어났다. 두 눈이 그를 향했다. 연흑색 눈동자 속에 오월의 봄이 깃들어 옅은 녹색이 비치는 것 같았다.

“공자 서하?”

애리얼이 그를 불렀으나, 그는 반응하지 못했다. 손가락에는 아직도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았던 나뭇잎을 쥐고서 가만히 있었다. 빨려 들 것 같은 검은색 눈동자에 담긴 자신을 바라보면서.

다시 바람이 불었다. 약한 바람에도 결 좋은 흑발은 휘날렸다. 아찔한 향기가 났다. 꽃, 솜, 양모(羊毛)……. 그런 부드럽고 폭신한 것을 떠오르게 하는 향이 그의 심장을 두드렸다.

이게 은인을 향한 충정 같은 게 아님을 알았다.

이름을 모르는 감정. 미지의 설렘.

왜 그녀를 자신의 주군이 아닌 공작 부인으로 만들고 싶었을까.

‘아, 이건…….’

가슴 한중간에서 알 수 없는 덩어리로 뭉쳐져 있던 것이 확 피어올랐다. 선명한 형태를 갖추고서.

우우우웅-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려 댔다.

레이신의 대답을 기다리던 애리얼은 날벼락 같은 진동음에 움찔 몸을 떨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스카이라가 이 근처에…….’

“그래서, 내일 안 가는 거야?”

레이신의 목소리가 다른 곳으로 향하려던 그녀의 집중을 다시 끌어왔다. 재차 마주한 그의 금빛 눈동자는 이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뭐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좀 더…… 집요한 느낌.

도망치고 싶어지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고개에 힘을 줬다.

“네. 안 갈래요.”

“그래. 가지 마.”

레이신이 애리얼의 선택에 동조하며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조금 기뻐 보였다.

애리얼은 그의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위화감이 무엇인지 더 관찰하기도 전에 그는 떠나 버렸다. 후원을 홀로 걸어가 버리는 그의 뒤로 늘 대충 땋아 늘어트리는 금발이 흔들거렸다. 손에는 아직 그녀의 머리칼에서 빼낸 나뭇잎을 든 채였다.

‘저건 왜 들고 있는 거지?’

애리얼이 의아해하는 사이 그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어느새 거리가 한참 벌어졌다. 레이신의 뒷모습이 점처럼 작아졌다. 애리얼은 여전히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서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레이신은 애리얼이 아예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걸음을 멈췄다. 제3 기숙사 동을 완전히 빠져나와 아카데미 정문으로 향하는 빈 길이었다.

오로지 그 혼자뿐이다.

바람이 불어와 줄지어 심은 나무를 훑고 갔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사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머리칼이 흔들리는 듯한 환각이 일어났다.

그는 손에 든 나뭇잎을 입으로 가져왔다. 그녀의 머리칼에 닿았던 그 잎사귀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대었다. 보드라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조금 전 느꼈던 향기가 떠올랐다. 가슴이 마구 설레 왔다. 고작 몇 분 전의 일인데 노스탤지어를 불러왔다.

느껴 본 적 없던 감각, 감정들이 범람했다.

그는 희열을 느꼈다.

매번 혼몽한 채로 지냈던 봄을, 올해는 이토록 다양한 것들을 선명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희열이 환희로 바뀌었다.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이토록 좋을 수가 있다니. 신기하다.

***

대연회장에 붉은 깃발이 줄줄이 걸렸다. 마법으로 개화일을 당긴 붉은 글로리오사가 계단을 장식했다.

검은색 제복을 입은 승전의 영웅, 대공자 렉시우스를 필두로 그의 특수 부대가 연회장의 중앙으로 입장했다. 연회장을 채운 귀족들이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연회장의 끝, 높은 자리에 앉은 황제는 수척한 모습이었다. 바로 아래의 좌우 좌석으로는 황태자와 황자가 앉아 있었다. 렉시우스는 계단을 올라 황제의 앞까지 직진했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황족의 사이에 까마귀 같은 옷을 입고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크레시앙 대공가의 대공자, 렉시우스 크레시앙. 제국의 안녕을 위하여 승리의 깃발을 들고, 지금, 황제 폐하께 귀환하였습니다.”

“훌륭하다. 그대에게 제국의 무한한 영광이 있으리.”

황제의 목소리에서 오래된 문을 억지로 연 것처럼 쇳소리가 났다.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가죽밖에 남지 않은 듯 골격이 그대로 드러난 팔은 훈장조차 수여하지 못했다.

렉시우스가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자 황태자가 다가와 황제 대신 훈장을 수여했다. 붉은 리본에 매달린 금배지가 그의 왼쪽 가슴팍에 달렸다. 열다섯 번째 훈장이었다. 고작 열아홉의 나이에.

역사에 남을 기록이었다.

연회장의 모든 내빈들이 둘을 주목했다. 차기 황제와 차기 대공.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갈 차세대 권력.

“그대의 노고를 치하한다. 대공자에게 제국의 빛이 영원히 함께하리.”

황태자가 축사를 건넸다.

훈장을 매단 대공자가 한 발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영광을 깊이 새기며, 제국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대공자의 말이 맺어지자 일시에 갈채가 쏟아졌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승전식의 대미를 장식하는 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대연회장의 천장을 수놓으며 타올랐다. 불꽃에서 뿜어진 황태자의 신성 마력이 연회장을 휩쓸었다. 마력을 지닌 높은 자리의 귀족들이 전율했다. 환희로 물들어야 할 날, 황태자는 위압적인 마력을 방사했다.

아픈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당히 하거라.”

그가 노기 어린 음성으로 명령했다.

그제야 황태자는 미소를 띤 채 마력을 거두었다. 불꽃이 사그라졌다.

대공자가 고개를 들어 황태자와 마주했다.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서늘한 눈빛이 오갔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환호성 하나 없이 숙연했다.

르젠만을 복속하고 돌아온 반쪽짜리 승전식이었다. 연회도 반나절만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오후 네 시 반에 이른 만찬을 하고서 여섯 시가 되면 끝난다.

렉시우스는 그것조차 견디질 못했다. 고작 두 시밖에 안 되었을 때 대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아예 황성 서관을 나서려는데, 데본시아가 그의 앞을 막았다. 순간 이동이었다.

렉시우스가 삐딱하게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마력이 남아도시나 봐?”

시큰둥하게 비꼬았으나 데본시아는 하하 웃기나 했다. 거슬렸다. 렉시우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할 말 있으면 하고, 아니면 난 간다.”

“승전식에 주인공이 없으면 어떡해.”

“네가 불장난 좀 한답시고 깽판을 치길래 알아서 빠져 드리는 건데, 고맙지 않아?”

“렉스.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끝까지 참석해. 네 승전식이야.”

데본시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낮았다. 장난으로 떠보는 소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는 지금 황태자로서 대공자가 갖춰야 할 품위와 예의를 말하고 있었다.

렉시우스는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데브, 제발 가식적으로 굴지 말자.”

“가식을 떨어야 할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식을 떨지 말라니, 모순이네.”

“르젠만 먹고 하는 반쪽짜리 승전식에 참석자 명단도 제대로 못 채워 놓고 혀가 기네.”

“애리얼이 여기 없는 건 내 탓이 아냐.”

데본시아가 애리얼을 언급하자 렉시우스의 얼굴이 단박에 험악해졌다. 아슬아슬 폭발 직전인 감정을 다스리며 가까스로 화를 참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너한테 추궁 안 하잖아?”

“렉스.”

“나와. 온종일 수도에만 있는 너랑 달리 난 또 남부로 가야 하니까.”

렉시우스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두 달이나 더 길어진 전쟁 탓에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앞길을 막는 데본시아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데본시아가 밀쳐진 채 뒤를 돌아보았다. 렉시우스의 뒷모습이 멀리 복도를 빠져나갔다. 새카만 제복의 대공자를 보는 그는 석상처럼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피식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동족 혐오라는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와 원하는 것이 같고, 그걸 가지려고 사고하는 방식도 비슷하니 틀린 생각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그도 저처럼 강압에 이르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동족이었다. 렉시우스가 지하에서 발견한 신성 술식을 애리얼에게 말하지 않은 순간부터, 둘은 공범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너까지 자리 비우지 마.”

복도를 올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에 데본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아, 스카이라.”

잔뜩 인상 쓴 스카이라가 복도에 기대어 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대연회장이 있는 쪽이었다.

“가식 부릴 거면 빨리 와서 자리나 지키라고.”

“다 들은 거야? 부끄럽네.”

그가 간드러지게 받아치자 스카이라가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빨리 연회장에나 가라고.”

“렉스가 나가 버렸어.”

“어쩌라고. 어차피 다 너만 기다리는데.”

“근데 렉스, 애리얼한테 갔을 텐데.”

그 말을 던지자 스카이라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짜증에 불과했던 감정이 확실하게 분노와 불안으로 변해 얼굴에 드러났다.

“쫓아가면 안 된다?”

데본시아가 웃는 얼굴로 다가와 스카이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스카이라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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