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57)화 (157/264)

대공자는 없었지만 승전식은 이어졌다. 황태자는 대공자가 피곤해 보여서 쉴 수 있게 보내 줬다며 매끄럽게 둘러댔다. 내빈들은 모두 수긍하는 눈치였다. 당장 오늘 새벽에 귀환하여 오늘 승전식을 치르고 있었으니, 피곤한 게 당연했다.

물론 실상은 그들이 이해하는 바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참 쉬워.”

데본시아가 웃으며 평했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대공자의 부재를 받아들인 내빈들을 비웃는 게 확실했다.

스카이라는 미간을 구기고서 그의 오만한 발언들을 잠자코 들었다. 평소 같으면 이딴 인간이 차기 황제라는 데에 암울함을 느꼈겠으나, 지금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애리얼이 있는 곳으로 향했을 렉시우스가 신경 쓰였다. 그와 달리 자신은 앞으로 네 시간이나 더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미칠 노릇이었다.

스카이라는 어제 결국 애리얼을 만나지 못했다. 승전식을 핑계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전갈도 보내지 않았었는데. 심지어 직접 제3 기숙사 동에 찾아가서 허탕만 쳤다.

그는 어제 일만 생각하면 피로해졌다.

제3 기숙사에는 한바탕 소란이 났었다. 그가 호위도 없이 홀로 간 게 원인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둘 눈치를 보던 이들이 나중에는 우르르 몰려왔다. 황족과 한번 친해져 보겠다고 수작을 부리는 거였다. 그 와중에 애리얼은 어딜 갔는지, 기숙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들러붙는 인간들을 적당히 상대하며 애리얼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갑갑함에 확 짜증을 내자 들러붙던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그는 홀로 기숙사를 다 돌아보았다. 애리얼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딜 간 건지. 내부에는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다고 외부까지 찾으려니 한 세월이 걸릴 판이다. 애리얼을 감시하는 특별 감시 인원은 황태자의 직속이라 스카이라에게는 섣불리 정보를 넘기지 않았다.

어차피 그것들보다는 자신이 더 애리얼을 잘 알았다. 스카이라는 그렇게 자부했다.

애리얼은 활동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잠깐 산책은 나가도 주로 방 안에서만 지냈다. 오래 있어도 도서관이 다였다. 그러니 기다리면 다시 기숙사로 오겠지.

그 생각으로 그는 한 시간을 휴게실에서 죽치고 있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기숙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나타나면 알려 달라고 관리인에게 말해 뒀으나, 관리인도 찾아오지 않았다. 초조해졌다.

혹시 애리얼이 일부러 자신을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나 하는 가정을 한 것뿐인데 속이 후벼 파이는 기분이었다.

불안해진 그가 추적 마법이라도 써서 그녀를 찾으려는 순간에 황성에서 호출이 왔다. 바쁜 와중에 억지로 낸 시간 동안, 그는 애먼 인간들에게만 시달리다가 돌아왔다.

그렇게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불안감만이 그의 안에 남았다.

“스카이라, 인상 펴.”

데본시아가 테이블 아래에서 포크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스카이라는 목구멍까지 욕이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서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내빈이 가득한 만찬장이었다. 억지로라도 웃어야 했기에, 인상을 펴라는 데본시아의 말은 정당했다. 다만 포크로 찔러 대는 유치한 짓거리에 열이 받았을 뿐.

스카이라는 나긋한 표정을 지으며 만찬을 이어 갔다. 내빈들과 시선을 맞추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속으로는 전쟁 영웅인 대공자도 없는 허울뿐인 승전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쫓아다니고, 붙잡고 싶어 합니다.)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어제 레이신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는 이거였나.

애리얼은 하트 반 개가 늘어난 그의 호감도를 확인하고는 욕실을 나왔다.

방에서는 간만에 모습을 드러낸 휘아킨이 침대에 엎드린 채 책을 보고 있었다. 꽤 열중하는 중인지, 그는 애리얼의 인기척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애리얼은 휘아킨이 무엇을 읽는지 궁금했다. 은근슬쩍 그가 펼쳐 놓은 페이지를 훑었다.

「로제트가 떨어진 손수건을 주우려 손을 뻗었다. 남자가 손을 뻗은 것도 그때였다. 둘은 같은 생각을 했다. 그게 서로의 손끝이 맞닿도록 이끌었다. 손가락이 우연히 교차하며 온기가 ……」

일단 학문에 관련된 건 아닌 게 확실했다. 소설인 듯한데, 언뜻 본 내용으로 보아 로맨스 소설인 것 같았다.

의외였다.

평소 꽤 시니컬한 성격이길래 간질거리는 이야기는 취향이 아닐 줄 알았다. 그런데 저렇게 열심히 읽는 모습이라니. 왠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선배님도 보고 싶으세요?”

갑자기 말을 거는 휘아킨 때문에 애리얼은 움찔거리며 놀랐다. 휘아킨이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보았다. 잿빛 눈이 애리얼을 담았다.

애리얼은 나쁜 일을 하다 들킨 것처럼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 뒤에서 몰래 훔쳐봐서.”

“뭔 소릴 하나 했더니.”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거 가지고 뭐라 안 그래요. 선배님, 좀 소심한 성격이신가.”

“응……. 좀 소심한 거 같아.”

“그걸 또 뭘 그렇게 고해 성사 하듯이 인정하고 있어요.”

휘아킨은 책을 덮더니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오래 엎드려 있느라 뻣뻣해진 어깨를 주무르고는 쭈뼛거리고 선 애리얼을 향해 책을 내밀었다.

“궁금하시면 보세요.”

“그래도 돼?”

“네.”

담백한 허락이었다. 애리얼은 그에게서 연보라색 표지의 <로제트>를 받아 펼쳤다.

<로제트>는 앙숙이었던 두 사람이 점점 마음을 나누고 친구로, 또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해 가는 내용을 그린 로맨스 소설이었다. 적당히 훑어보고 넘겨주자 휘아킨이 책을 받아 들며 말했다.

“저는 로맨스가 좋아요.”

“그렇구나.”

“의외라고 생각했죠?”

“……응. 추리나 스릴러 같은 거 좋아할 줄 알았어.”

“그건 제 성격을 보고 든 생각이에요? 아니면 제가 그런 거 좋아하게 생겼다든가?”

“성격이 시니컬한가 싶어서……. 책도 그런 쪽을 선호할 줄 알았어.”

“뭐 그런 종류를 싫어하진 않아요. 딱히 찾아서 읽지는 않지만.”

휘아킨은 <로제트>를 제 책상에다 던져 놓으며 말했다. 애리얼은 깔끔하게 책상 위로 안착한 <로제트>를 보다가 휘아킨에게 말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하세요.”

“왜 로맨스를 선호해?”

“나랑은 관련 없는 이야기 같아서. 그래서 재밌어요.”

그는 고민하지도 않고 단박에 답했다.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니, 평생 누구와도 사랑하지 않을 것 같다는 소리인가. 어딘지 묘한 이유였다.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휘아킨은 애리얼더러 무슨 장르를 좋아하냐고 묻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대화가 끝나자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낮잠을 잤다.

애리얼은 누워서 눈을 감아 버린 그를 보다가 침대에 앉았다. 풀썩, 상체를 뒤로 넘기며 누워 버렸다. 푹신한 매트리스와 시트의 감촉을 느끼며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문득, 모든 것이 온화하게 느껴졌다.

창문을 통해 바닥으로 스미는 햇살, 조용한 가운데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 수업이 없는 주말 오전의 나른한 분위기. 그녀가 좋아하는, 낮잠을 자며 게으름을 피우기에 완벽한 환경이었다. 스르르 찾아오는 졸음에 거스르지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몽롱하게 잠에 취했던 머리를 번쩍 깨우는 소리였다. 애리얼은 시트에 늘어뜨렸던 상체를 황급히 일으켰다. 접근 알림이 분명했다. 곧장 욕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켰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강한 애정을 느낍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데 더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3 기숙사 동 - 3층』

악, 비명이 나올 것 같은 내용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황성에서 승전식을 하고 있어야 할 렉시우스가 애리얼과 같은 곳에 있다. 그것도 바로 아래층에.

승전식에 나타나지 않은 그녀를 찾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 만나면 좋은 소리는 못 듣겠지 싶었다.

애리얼은 세면대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했다.

‘만나긴 해야지. 전쟁에서 귀환했잖아. 솔직하게 걱정도 했고, 반갑게 맞으면 돼.’

솔직히 렉시우스를 만나는 것 자체가 싫지는 않았다. 그를 걱정한 건 사실이며, 그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공략을 생각하면 그를 만나선 안 됐다. 만나도 좋은 소리는 못 해 준다.

렉시우스의 호감도는 데본시아와 고작 반 개 차이니까.

‘……반갑게 맞지는 말자.’

차라리 조금 무심한 반응으로 그의 호감도를 떨어트리는 게 나을 것이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욕실을 나왔다.

애리얼은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문 쪽을 흘금거렸다. 금방이라도 그가 들이닥칠 것 같았다. 안절부절못하고 문 주변을 서성댔다.

꽤 산만한 기척에 휘아킨이 슬쩍 눈을 떴다. 문 앞에 선 애리얼을 곁눈질로 살피고는 물었다.

“뭐 해요?”

애리얼이 흠칫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 시끄럽게 했네.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동안에도 애리얼은 문밖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휘아킨은 무릎을 세워 그 위에다 턱을 괴고서 애리얼을 응시했다.

“누가 와요?”

“아마도……. 미안해. 만나는 건 나가서 만날게.”

애리얼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문고리를 쥐었다. 휘아킨도 있는데 방 안까지 렉시우스가 들어오도록 할 수는 없었다. 렉시우스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만나기 싫은 거 같은데, 왜 억지로 만나요?”

휘아킨이 무신경하게 물었다.

막 나가려던 애리얼은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나. 난감하여 손을 꼼지락거렸다.

“싫은 것까진 아니야.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

“근데 그런 표정이에요?”

그의 지적에 애리얼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그 정도로 표정 관리가 안됐나.

휘아킨이 손가락을 깍지 끼고서 앞으로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더니, 긴 호흡을 토해 내며 말했다.

“나중에 만나고 싶을 때 만나요. 지금 만나 봐야 서로 안 좋을 거 같으니까.”

“알았어. 일단 잘 말해서 돌려보낼게.”

“아, 저쪽에서 무턱대고 찾아오는 거였어요?”

휘아킨이 이제 알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 선배님은 일단 욕실에 들어가 계세요. 제가 알아서 돌려보낼게요.”

“하지만……!”

휘아킨이 갑작스레 애리얼의 손목을 쥐더니 그녀를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상당히 단호한 태도였다.

애리얼은 뛰쳐나오려고 했으나 그에게 저지당했다. 블랑셰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힘은 어찌나 센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결국 힘으로 이기는 건 포기하고 대화를 시도했다.

“나랑 아는 사람이잖아. 내가 할게.”

“이런 건 아예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게 잘돼요.”

그는 애리얼의 말을 반박하며 욕실 문을 닫았다. 애리얼이 다급히 욕실 문에 붙어서 말했다.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상대는…….”

“절 믿고, 나오지 마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