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58)화 (158/264)

휘아킨의 단호한 목소리에 애리얼은 주춤거리며 문에서 물러났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그래야 빨리 끝나요.”

그가 당부했다. 그건 애리얼을 향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귀찮은 일을 빨리 끝내고 싶으니 잠자코 있어 달라는 요구이기도 했다.

휘아킨의 내심을 읽고서, 애리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욕실 끝으로 물러나 휴대폰을 켰다. 렉시우스의 초상화가 어느새 4층으로 올라와 있었다. 애리얼이 있는 방을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방 앞으로 와 멈춘다.

애리얼은 숨을 죽였다. 긴장으로 바짝 조여든 가슴 속이 세차게 울렸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긴장된 순간, 휘아킨은 별 감흥 없이 문을 확 열어젖혔다. 욕실 안에 숨은 애리얼을 기겁하게 하는 소리였다.

그렇게 렉시우스와 휘아킨이 마주했다.

무표정하던 렉시우스는 의외의 상황에 눈썹을 찡그리며 은발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애리얼은 어디 가고 안면도 없는 인물이 저를 마주하고 있는지.

“룸메이트인가?”

“대공자 저하를 뵙습니다.”

휘아킨이 한 타이밍 늦게 고개를 숙였다. 렉시우스는 휘아킨을 무시한 채 방을 훑었다.

“다른 하나는 어디 갔어.”

“무례하시네요. 이곳은 여학생 기숙사예요. 나가 주세요.”

무엄하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의 차가운 말투였다. 휘아킨이 던진 발언에 애리얼은 입을 막았다.

대체 어쩌자고 대공자에게 저런 소리를 하는지. 지금의 그는 무하의 공자가 아닌 하급 귀족가의 힘없는 편입생 블랑셰 멜로르인데.

렉시우스가 눈썹을 구긴 채 휘아킨을 보았다. 희멀건 인상에 드리워진 긴 은발. 묘하게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누구였더라.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제대로 만난 적은 없는 상대 같았다.

“그래. 내가 좀 무례했네. 미안해.”

그는 성질을 부릴까 하다가 적당히 미소만 지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굳게 닫힌 욕실을 곁눈질했다.

한편, 렉시우스의 온화한 대답에 욕실 안의 애리얼은 비명을 지를 정도로 놀라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저렇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렉시우스가.

성격이 변한 게 아니라면, 그는 화가 났음에도 억지로 인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폭발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적당히 나와 줄래?”

“그건 어렵겠는데요.”

렉시우스가 봐주고 있음에도 휘아킨은 물러날 줄 몰랐다. 오히려 렉시우스의 시선이 닿은 욕실 문 앞을 막고서 섰다.

“여긴 개인적인 공간이에요. 그만 가 주세요.”

“갈 거야. 여기 있는 네 룸메이트만 보내 주면.”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말, 못 들으셨어요? 이렇게 찾아오시지 말고 하녀를 통해 전갈을 보내든가 하세요.”

블랑셰의 모습을 해도 무하가의 하나뿐인 공자님이라는 계급값은 어디 안 가는지, 렉시우스에게 한마디도 지질 않는다.

문제는 렉시우스가 그걸 굳이 인내해 줄 성격이 아니라는 거다.

임계에 달한 듯 렉시우스의 언짢아하는 신음이 문을 넘어 들려왔다.

칼날 위를 걷는 듯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애리얼은 심장이 조마조마해서 숨조차 편히 쉬질 못했다.

가까스로 인내를 끌어낸 렉시우스가 신음 끝에 입을 열었다.

“내가 너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게 아니라서.”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난 지금 너한테 변명하고 있는 게 아니야. 나오라고 경고하는 거지.”

“레이디의 사생활을 함부로 들춰 보는 저급한 인간은 아니시겠죠, 저하.”

애리얼은 휘아킨의 옷자락을 붙잡고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렉시우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남은 인내심을 바득바득 긁어모았다. 애리얼의 우려대로 그는 가까스로 성질을 죽이고 있었다. 더 건드려지면 진짜 폭발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참는 거였다.

애리얼만 만나면 된다. 애리얼이 욕실 안에 숨어 있다는 건 진작에 눈치챘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좋게 넘어가 주려고 하는 거였다. 오랜만의 재회에서 난폭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왜 숨어 있었는지 따지기는 하겠지만.

“너한테는 볼일 없으니까 신경 끄고…….”

“나가세요. 옷 갈아입을 거예요.”

휘아킨이 렉시우스의 말을 도중에 끊어 버리며 블라우스에 묶인 리본을 풀어 헤쳤다.

어지간해선 물러나지 않는 렉시우스조차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휘아킨이 멈추지 않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네 개까지 풀어냈을 때, 그는 결국 몸을 돌렸다. 이를 사리물고서 성난 걸음걸이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누군지도 모를 인간의 기행에 엮여 구설에 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문 앞을 떠나자 휘아킨은 곧장 문을 닫아 버렸다.

애리얼은 멀어지는 렉시우스의 초상화를 보고서 겨우 숨을 돌렸다.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그 순간 욕실 문이 열렸다.

“이제 나오셔도 돼요, 선배님.”

휘아킨이 그녀를 불렀다. 리본과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서 쇄골을 훤히 드러낸 그의 모습에 애리얼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왜 렉시우스가 성질을 죽이고 떠났는지 알 만한 광경이었다.

애리얼은 옷 사이로 드러난 그의 살결에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휘아킨은 벌어진 블라우스를 잠갔다. 리본은 매기 귀찮은지 쓱 빼서 침대 위로 던졌다.

“대공자 저하, 되게 무섭더라고요.”

“그런 거치곤 말을 너무 잘하던데…….”

“딱히 설득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원래 자기 고집만 내뱉는 건 쉬워요.”

“무서우면 그것도 어렵지 않아?”

“그런가?”

그는 대충 대답하고는 리본이 던져진 시트 위로 드러누웠다. 그대로 눈을 감고서 아까 못 잔 낮잠을 청했다. 휘아킨은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애리얼은 그를 가만히 보다가 제 침대에 앉았다. 휘아킨은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 렉시우스를 내쫓은 것도 대단한데, 심지어 내쫓은 방법도 충격적이었다.

그가 공략 대상이 아닌 히든 캐릭터인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공략하기가 어지간히 어려웠을 것 같았다.

***

렉시우스는 불쾌함이 잔뜩 낀 얼굴로 제1 기숙사의 1층 휴게실에 앉았다.

애리얼이 제3 기숙사 동으로 내쫓긴 것도 황당했는데, 그녀의 룸메이트라는 인간 때문에 만남도 무산되었다. 전쟁이 길어지는 동안 별일이 다 일어났구나 싶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룸메이트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를 지시해 뒀다. 남은 건 애리얼과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것.

문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반 학기도 못 채우고 다시 전장에 나가야 했다. 그렇게 출정하고 나면 데본시아 탓에 전쟁이 질질 끌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동안 아카데미에 남아 제 손에 닿지 않을 애리얼을 생각하면 초조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떠나기 전에 뭐라도 애리얼과 확실한 관계를 맺어 놓고 가야 했다. 렉시우스는 호출 벨을 눌러서 제 보좌관을 불렀다. 일찌감치 황성에서 빠져나와 그를 기다리던 메튼이 한달음에 달려와서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저하.”

“카스트로, 어머니께 전갈을 보내야겠다. 채비해라.”

***

「월요일

오전 10시 - 고대 역사와 마법의 이해(아카데미 1관, 제3 교육실)」

애리얼은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수업은 열 시지만 사람이 덜 붐빌 때 열차를 이용하고 싶었다.

첫 열차는 일곱 시에 출발했다. 아카데미의 벽을 따라 순환하는 열차였다. 첫차라 내부는 아직 한산했다. 애리얼은 내리는 문과 가까운 좌석에 조용히 앉아서 갔다. 15분 정도를 이동했다. 교사 동이라며 정차한 곳에 내려서 북쪽으로 15분 정도 걷자 아카데미 1관이 나왔다.

붉은 벽돌로 고풍스럽게 지어진 건물의 내부로 발을 들였다. 엄숙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1관은 필수도 아닌데 무겁게 진행되는 수업 위주로 구성되어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물론 1층에는 중요 강의가 이루어지는 교육실이 몇 개 있어서 붐빌 때는 붐볐다.

애리얼은 계단을 올라 인적이 극히 드문 2층으로 향했다. ‘고대 역사와 마법의 이해’가 이루어질 제3 교육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섰다.

사람이 전무한 장소가 스산한 기운을 몰고 왔다.

이상한 기시감이 애리얼을 감쌌다.

‘이상하다. 왜 여길 와 본 것 같지?’

처음 와 본 곳에서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불길한 감각.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이곳에서 벌어졌었던 것 같은…….

혹시나 하여 그녀는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이이잉-

진동과 함께 휴대폰의 액정이 켜졌다. 특정인의 이름과 함께 여러 개의 시스템 창이 줄줄이 떴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공략 대상이 근처에 ……』

애리얼은 황급히 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꺾어지는 벽면 뒤로 숨기 바쁘게 창문 아래로 몸을 낮췄다. 그러느라 떠오른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다.

목적지까지는 고작 수 미터였다. 애리얼은 고개만 슬쩍 내밀어 전방을 확인했다.

고대 역사 수업이 진행되는 장소. 서너 걸음 거리의 어두운 나무 문. 명패에는 <제3 교육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순간 애리얼의 뇌리를 지배했던 기시감이 정점을 찍었다.

“애리얼!”

스카이라의 목소리가 머리를 강타했다. 얼음을 깨물었을 때처럼 머릿속이 쨍 울렸다.

애리얼은 이마를 붙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기시감에 기억이 따라붙었다. 과거에 겪었던 상황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찾았다.”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거야.”

“애리얼, 너…… 지금 도망치는 거야?”

스카이라의 서늘한, 격해지기 직전의 음성. 그의 분노한 얼굴.

“왜…… 도망가?”

퍼즐이 맞춰지듯 상황이 연결되어 펼쳐졌다.

휴대폰 화면 속 제3 교육실에서 기다리는 그의 초상화. 그때와 같다. 겪은 적 없던 과거와 현재가 겹쳐졌다.

단편적인 기억이 완성되며 끔찍한 두통을 몰고 왔다. 바르르 손이 경련했다.

애리얼은 쥐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탕, 타당!

하필이면 소리가 크게 울리는 대리석 바닥이었다. 당연하게도 휴대폰이 낸 충돌음은 시끄러울 만큼 컸다.

몇 미터 거리에 있던 교육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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